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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은 기생충 퇴치 약물을 개발한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일본 기타사토대 오무라 사토시 명예교수와 아일랜드 출신의 미국 드류대 윌리엄 캠벨 교수는 회선사상충증 치료제인 ‘아버멕틴(Avermectin)’을 발견한 공로로 상을 받았다. 중국에서 평생 연구한 중국 전통의학연구원 투 유유 교수는 말라리아 퇴치에 탁월한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을 분리해낸 공로로 영광을 안았다. 독립적으로 진행된 연구지만, 제3세계의 기생충 퇴치에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함께 상을 받게 됐다. 흥미로운 점은 두 약물이 모두 화학적으로 합성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추출한 천연물질이라는 점이다. 필자도 천연물 연구자로서 천연의약품 연구가 노벨상을 수상해 무척 기쁘다.
골프장 흙에서 백만 명의 목숨을 구하다
먼저 사토시 교수와 캠벨 교수의 업적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회선사상충 치료제를 개발했는데, 회선사상충증은 ‘하천 실명(river blindness)’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회선사상충을 옮기는 흑파리가 유속이 빠른 하천 주변에 살기 때문이다. 흑파리가 잔뜩 있는 강에 뛰어들거나 주위에 있을 경우 흑파리를 통해 성체 회선사상충이 사람의 몸으로 침투한다. 성체는 몸속에서 하루에 1000마리 이상 새로운 유충을 만든다. 이런 유충들은 피부와 눈에 치명적이다. 극심한 고통과 가려움을 동반하고 반복적으로 감염되면 시력을 잃을 수 있다. 회선사상충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70년대에는 서아프리카 한 마을의 성인 절반이 맹인이 됐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기록이 있을 정도다. 서아프리카에서는 회선사상충 때문에 사람들이 강가를 피해 황무지로 이주하며 큰 경제적 손실을 입기도 했다.
오무라 교수가 아버멕틴을 처음 발견한 것도 1970년대였다. 토양 미생물에서 항균성분을 찾던 오무라 교수는 특히 ‘스트렙토미세스 속(Streptomyces)’에 관심이 많았다. 스트렙토미세스 속은 ‘스트렙토마이신’이라는 항생제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무라 교수는 1974년 한 골프장의 토양에서 새로운 스트렙토미세스 속 방선균을 찾았다. 이 균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었는데, 오무라 교수는 이를 아버멕틴이라고 불렀다.
오무라 교수는 공동연구를 진행하던 미국의 제약회사 ‘머크’에 아버멕틴을 보냈다. 이어서 오무라 교수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캠벨 교수(당시 머크 책임 연구원)팀은 아버멕틴이 동물 기생충을 치료하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버멕틴을 화학적으로 개량한 ‘이버멕틴(Ivermectin)’이라는 새로운 의약품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멕틴과 이버멕틴은 기생충의 글루타메이트의존성 염소채널을 활성화해 세포내 염소 농도를 높인다. 음이온인 염소가 많아지면 과분극이 일어나 신경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된다. 글루타메이트의존성 염소채널은 인간 같은 척추동물에는 존재하지 않아 부작용도 거의 없다. 이버멕틴은 미국에서 1970년대 후반에 처음 판매를 시작해, 1980년대에는 가축과 애완동물의 기생충 치료에 널리 사용됐다.
캠벨 교수와 머크는 이버멕틴을 회선사상충에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버멕틴이 회선사상충과 비슷한 동물 기생충에 효과가 있다는 데 착안해 임상시험에서 효과를 증명했다. 머크는 1987년 이버멕틴의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을 앞두고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버멕틴을 무료로 나눠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때부터 해마다 매년 150만 명 이상이 머크 기부 프로그램으로 이버멕틴을 제공받고 있다. 회선사상충으로 인한 실명도 눈에 띄게 감소해 콜롬비아를 비롯한 몇몇 국가는 회선사상충을 완전히 박멸하는 데 성공했다. WHO는 2020년에 회선사상충을 박멸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개똥쑥에서 찾은 말라리아 치료제
투 교수는 중국 전통의학에서 아르테미시닌을 찾았다. 아르테미시닌이 개발되기 전에 가장 널리 쓰이던 말라리아 치료제는 ‘키니네’다. 키니네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인 키나의 껍질에서 추출한 말라리아 치료제다. 17세기 때부터 쓰이던 유서 깊은 치료제지만 1960년대부터 키니네가 듣지 않는 내성 말라리아 원충이 지속적으로 출몰해 피해가 점차 늘고 있었다.
특히 열대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던 베트남전에서 말라리아가 극성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말라리아에 걸린 미군 숫자만 4만 명 이상이었다. 반대편인 북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북베트남을 돕던 중공군의 마오쩌둥은 1967년 5월 23일 베이징에서 비밀 회동을 열어 500명이 넘는 과학자와 의사로 구성된 ‘프로젝트523’을 출범한다. 프로젝트523은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장기적으로는 중국 천연약품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기로 했다. 과학을 천대하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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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교수는 프로젝트523에 연구책임자로 참여했다. 그녀는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 대부분이 원충이 증식할 때 생기는 고열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모기를 매개로 체내에 침투한 말라리아 원충은 간에서 증식을하는데, 이때 적혈구에 큰 피해를 입히며 고열을 일으킨다. 증식만 넘기면 원충이 다시 조직에 숨어들어 정상 체온으로 돌아와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투 교수는 중의학에서 열성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기록된 약재로부터 치료제를 찾기 시작했다. 200개 가량의 후보를 검토한 결과 1971년 개똥쑥에서 아르테미시닌을 추출해 구조를 확인했다. 1979년에는 말라리아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도 직접 확인했다. 아르테미시닌은 1990년대부터 말라리아 치료제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투여 후 48시간 내에 원충을 박멸했고, 다른 어떤 말라리아 치료제보다 뛰어난 해열작용을 보였다. 기존의 말라리아 치료제에 내성을 보이는 원충에 대해서도 효과적이었다.
현재 WHO는 아르테미시닌에 대한 원충의 내성을 막기 위해 아르테미시닌 병용요법(ACTs)을 말라리아 표준 치료법으로 권고하고 있다. 병용요법은 아르테미시닌과 다른 말라리아 치료제를 함께 사용하는 방법이다. 아르테미시닌 내성 원충이 생기더라도 다른 치료제가 그 개체를 공격해 내성 원충이 확산되는 것을 막는다. ACTs 용법으로 2004년에는 연간 95만 명에 달하던 말라리아 사망자 수가 2013년에 58만 명으로 줄었다. 어린이 말라리아 사망률도 크게 감소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제약회사도 말라리아 ACTs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국산신약 16호로 허가된 ‘피라맥스’는 아르테미시닌을 개선한 아르테수네이트와, 또다른 화합물인 피롤리지딘이 섞인 말라리아 치료제다. 유럽의약국(EMA)은 2012년 피라맥스의 사용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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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연구는 모두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물에서 새로운 신약을 찾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어떤 물질도 합성할 수 있을 것 같은 현대에서도 천연물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약 16만 종의 화합물이 자연에서 발견됐다. 자연에서 인간과 함께 진화한 천연 화합물은 합성 화합물에 비해 독성이 적다. 자연계 곳곳에 존재하다 보니 원재료를 얻기도 쉽다. 또한 일반적인 합성 과정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골격의 물질을 발견할 가능성도 높다. 실제로 천연 화합물 중 약 40%는 합성 화학으로는 얻는 게 불가능하거나 합성이 어려운 매우 독특한 구조다. 이번에 노벨상을 수상한 아르테미시닌을 인공적으로 합성하기 위해서는 128개나 되는 아르테미시닌 입체 유사체가 필요하고, 이마저도 여러 화학적 후처리 단계를 거쳐야 한다. 개똥쑥이 없었다면, 과학자들이 처음부터 아르테미시닌을 합성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천연 화합물에 현대 과학을 접목할 경우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천연물 연구자들이 새로운 천연물을 찾아내 보고하면 분자생물학, 단백질학 등을 기반으로 한 현대 과학이 효능을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연구방법부터 정착시켜야 한다. 천연물 연구 초기 단계부터 현대적 연구와 병행해 연구 효율을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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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물질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생명공학적 방법을 활용할 수도 있다. 식물이나 동물이 만들어 내는 천연물은 아무래도 공장에서 만드는 화합물에 비해 대량생산이 어렵다. 가령 미국 UC버클리대 화학공학과 제이 키슬링 교수가 유전자를 편집해 개발한 아르테미시닌 합성 미생물은 현재 아르테미시닌 수요의 3분의 1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약물 지식도 중국에 못지않다. 우리나라에도 식물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치료법이 존재하므로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처음 개발한 약물을 발전시켜 더 효과가 뛰어난 치료제를 완성했듯, 새로운 약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자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번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우리나라 천연물 연구에도 재능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참여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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