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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현대적 SF의 창시자로 일컫어지는 웰스가 소설 '투명인간'을 발표한지 꼭1백년되는 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은 신의 선물인가, 악마의 저주인가.

‘하늘을 날아봤으면’, ‘저기 보이는 별에 가봤으면’,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돼 로봇을 조종해봤으면’…. 누구나 한번쯤 꿔보는 어린 시절의 꿈. 상상력을 한껏 자극한 이 꿈은 그 시절을 지나 돌이켜 보면 대개 황당무계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과학이 ‘이룰 수 없는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진보해왔음을 헤아린다면, 꿈은 불가능할수록 진가가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여기 우리가 겪은 유년시절의 꿈에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가 있다.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돼봤으면’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투명인간이 되면 나를 괴롭히는 친구를 보기좋게 골탕먹일 수 있을 것이고, 가보고 싶은 곳 어디라도 마음대로 숨어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또 돈이 없어도 맛있는 과자를 무한정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투명인간이 되면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 있을까. 오히려 남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없을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백년 전인 1897년, 영국의 소설가 H.G.웰스는 소설 ‘투명인간’을 발표, 이같은 백일몽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일찌감치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인간 이하의 존재

프랑스의 줄 베르느(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의 작가)와 함께 현대 SF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웰스의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타임머신’에 버금가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물론 몸이 공기처럼 투명하게 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고픈 욕망을 담은 소설을 내놓은 것은 웰스가 처음이 아니다. 연대 순으로 보자면 에드워드 미첼이나 제임스 달톤과 같은 소설가들이 내놓은 ‘수정인간’ ‘투명 신사’ 등의 작품이 웰스보다 몇 년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가보다 웰스의 작품이 ‘원조’로 추앙받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즉 웰스의 투명인간은 이전의 어떤 작가도 소유하지 못한 견고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투명인간의 실체를 실감나게 그림과 동시에, 과학의 비인간화를 섬세하게 지적함으로써 이전의 작품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웰스 이후에도 투명인간을 다룬 아류의 소설과 영상물이 무수히 등장했지만, 그 무엇도 그의 작품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리핀이란 냉혈 과학자다. 그는 빛의 밀도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던 중 인체에 돌고 있는 붉은 피와 검은 머리카락을 무색으로 만드는 실험에 성공, 그 스스로 투명인간이 된다. 그는 육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악용해 재산과 권력을 잡으려 나쁜 일을 저지르다 결국 처참하게 최후를 맞는다.

투명인간은 눈꺼풀이 빛을 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눈을 뜨고 있는 듯이 잠을 자야 한다. 투명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 겨울에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유리 바닥에서도 신발을 신지 못한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존재를 밝힐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옷을 훔쳐 입거나 붕대로 몸을 칭칭 감는 것뿐이다. 비록 그리핀은 전력을 기울여 얻은 결과로 투명인간이 됨으로써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됐지만, 그는 동시에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작가 웰스가 녹녹지 않은 과학적 식견을 가지고 있음은 소설 곳곳에서 나타난다. 특히 그리핀이 그의 대학 동창인 캠프박사를 찾아가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곡절을 설명하는 장면은 물리학 교과서를 연상케 한다.

"우리 주변에는 투명한 물질이면서 언뜻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이 많이 있어. 예컨대 유리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면 작은 알맹이 하나하나는 희고 불투명하게 보이지.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물질 가운데 혈액의 붉은 색소와 모발의 검은 색소를 제외하면 모두 무색투명한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어. 인간의 몸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도 아주 미묘한 작용에 의한 걸세. 생물 조직의 대부분은 물에 가까운 투명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네.”

물론 이 소설은 전적으로 허구이며, 과학적으로도 옳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웰스도 설명하고 있듯이 투명인간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투명인간의 굴절률이 공기의 굴절률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투명인간의 눈(수정체)도 공기의 굴절률과 같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투명인간의 눈에는 외부에서 온 빛이 굴절되지 않으므로 사물을 전혀 볼 수 없게 된다. 만약 소설에서처럼 투명인간이 가능하다면 우리가 투명인간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투명인간도 우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과학적 오류가 작품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이 웰스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강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론가들은 지적한다. 웰스가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빛의 굴절 같은 초보적 과학 지식이나, 단순한 권선징악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의 철학이었다.

즉 웰스는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약점을 투명인간이라는 형태를 통해 나타내면서 이기주의와 잘못 이용된 과학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한 운명으로 이끄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해 과감히 과학의 일부분을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갓 태어난 곤충의 유충이 대개 투명상태임에서 알 수 있듯이 생물 조직의 대부부은 물에 가까운 투명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헉슬리의 제자

이 소설의 작가 웰스는 1866년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다지 풍요롭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며 자란 그는 포목점, 약국 도제 등으로 생활했으나 장사꾼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지 않은 열망으로 틈을 내 학교를 다녔다.

웰스가 예민한 과학적 감각을 소유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진화론을 가장 탁월하게 해석한 다윈의 친구이자 생물학자인 T.H.헉슬리(‘멋진 신세계’의 작가 앨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그는 국립과학학교에 들어가 헉슬리 문하에서 3년간 생물학을 공부함으로써 사실에 입각한 과학적 추론과 지적 훈련을 확고하게 쌓을 수 있었다.

그는 한때 학교에서 생물학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결국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나서 50여편이 넘는 소설을 남겼다. 여기에는 투명인간을 비롯해 SF 최고의 고전 ‘타임머신’, 최근 다시 영화화된 ‘모로 박사의 섬’, 원자폭탄을 예언한 ‘우주 전쟁’, ‘달 최초의 인간’ 등 우리에게 낯익은 작품이 수두룩하다.

그는 단순히 ‘과학을 조금 아는 소설가’ 이상의 인물이었다. 지구의 생물과 인간의 역사를 함께 체계화한 ‘세계사 대계’같은 대저작물을 썼으며, 정치 경제 등에서도 탁월한 식견을 발휘함으로써 사회 예언가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는 그가 한때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모임인 파비안협회에도 깊숙히 관여했으며, 유토피아론자들과 어울리며 ‘세계 국가’라는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 스스로 한번도 자신을 소설가라고 지칭하지 않았을 만큼 다양한 그의 지적 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이름은 SF와 함께 한다. 그가 쓴 과학소설은 대개 주인공을 과학의 놀라운 세계로 몰아넣고, 이것이 일반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살피는 전개방식을 취하곤 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본능보다 우월하며, 과학이 인간을 안락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성일 뿐, 인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노력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지구 역사에 등장했던 여타 생물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같은 사상은 그의 초기 SF 작품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는 단순히 과학을 소설에 녹여넣기 급급한 여타의 작가와 달리 인간성과 분리된 과학의 위험성과 통제불가능한 상태의 테크놀러지가 가져올 재난을 경고하고 인간의 왜소성을 폭로하는데 주력했다. 소설 ‘투명인간’이 ‘나쁜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것은 이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투명인간은 몸의 윤곽을 드러내주는 옷이나 붕대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소설 '투명인간'을 통해 웰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과학의 올바른 이용이다.


보호색을 갖지 못한 인간의 본능

우리는 ‘뻔한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왜 ‘투명인간’ 같은 SF를 읽는 것일까. 다소 뜬금 없는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기상천외의 발상이 안겨주는 재미를 만끽하기 위해서”라는 평범한 답이 있을 것이고, 혹은 “현실과 다른 차원을 다룬 허구의 성(城)에 대한 문학적 탐미를 위해서”라는 대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과학자들은 ‘단순한 재미’나 ‘시간 때우기’ 이상의 것을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들에게 SF는 여타의 통속 소설이나 예술 소설과 그 의미가 다르다. 공상과학소설, 즉 SF가 오늘날의 과학 발전을 이끌어온 한 축임을 누구보다도 과학자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SF의 거장 아시모프는 “로켓을 개발한 로버트 고다드나 폰 브라운 같은 과학자들이 우주 비행과 달 여행을 쓴 웰스나 베르느의 책을 읽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는 로켓 개발자들이 소설가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베르느는 달에 가기 위한 방법으로 대포를, 웰스는 반중력장치라는 것을 이용했는데, 이들로는 달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받아 연구의 실마리를 풀었다면 SF는 과학에 준하는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흔히 “과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기 위한 노력을 통해 발전해왔다”고 한다. 미시 시계를 살피는 현미경이나 망원경, 또 X선의 발명과 발견이 현대 과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본다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얘기다. 하지만 자물쇠가 있으면 열쇠도 있는 법. 반대의 경우, 즉 보이는 세계를 보이지 않게 하는 ‘투명 과학’도 이와 함께 발전해왔다.

이를 테면 스텔스는 전파를 흡수하는 특수 도료나 동체의 각을 특수하게 제작함으로써 적의 레이더를 피하는 첨단 기술이다. 그러나 이 기술을 이용한 비행기가 걸프전 등에서 위력을 발휘한 뒤 세계 각국은 ‘스텔스 무력화 기술’ 개발에 혈안이 돼 있다.

마찬가지로 19세기에 등장한 투명인간은 20세기 후반의 과학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 등장해 못된 짓을 계속한다면, 그가 출몰할 지역에 적외선 투시기나 비가시광선 센서 등의 장비를 설치해놓음으로써 보이지 않는 몸을 쉽게 폭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의 몸을 상대방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하려는 움직임은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소산이다. 의태나 보호색을 구사하는 생물은 자연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투명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이같은 동물적 본능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군사학에서 말하는 엄폐, 혹은 은폐 역시 보호색을 갖지 못한 인간의 생명 보존 방법이다. 이는 자연에 노출된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비록 소설 속의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원격 조종, 무인 감시장치 등이나 ‘스타트렉’의 순간이동장치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 투명인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소설에서와 같은 괴물의 형태를 한 투명인간의 등장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핵무기 제조법으로 인류를 파멸에 이끌뻔 했던 과학이 지금까지 투명인간을 소설 속에 가두어둔 이유는 자명하다. 별다른 효용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핵은 살상용으로 전환돼 ‘나쁜 과학’의 대명사가 됐지만, 애초의 용도는 핵분열시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올 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복제 양 돌리도 인공장기와 인류의 식량난 해소를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일은 소설의 내용처럼 음모를 담고 있는 범죄 외에 그 쓸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투명인간의 필요성에 대한 합목적성을 가진 사회적 요구가 제기된다면, 그 때서야 소설 속의 투명인간은 우리에게 보다 선한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다.
 

'상태 전이 코일'이라 불리는 장치를 이용해 인간의 몸을 쿼크 단위로 분리 전송하는 스타트렉의 순간이동장치. 논리적으로 보자면 실현 불가능한 과학이지만, 한껏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97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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