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팅은 늘 ‘제조의 민주화’ ‘제3차 산업혁명’이라 불린다. 그만큼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이 말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3D 프린팅 기술이 환자의 생명을 살리고, 장애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능력도 아주 뛰어나다는 걸 말이다. 3D 프린터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코 없이 태어난 몽골 소년이 있었다. 두개골엔 숨 쉬는 구멍조차 없었다. 늘 입으로 숨을 쉬어야 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은 2013년 2월, 당시 6세였던 이 소년을 한국으로 초대했다. 소년은 서울성모병원에서 자신의 갈비뼈로 코를 만들어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피가 굳어 코가 계속 막혔다. 딱 일주일이면 아물 텐데, 그걸 버티지 못했다. 피가 굳어도 숨구멍은 유지되도록 콧속에 호스를 넣어보려 했지만, 상용 호스가 소년의 기도 모양과 달라 들어가지 않았다.
의료진은 조동우 포스텍 기계공학과 교수에게 급히 도움을 청했다. 3D 프린팅 기술을 의료 분야에 융합한 과학자였다. 지난 2월 4일, 당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프로젝트를 이끈 심진형 한국산업기술대 기계공학과 교수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특명이었죠. 일주일 안에 환자에게 꼭 맞는 맞춤형 관을 만들어라. 애 하나 살리자. 다른 연구는 올 스톱. 모두가 숙연한 마음으로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열댓 명의 연구팀 전원이 소년의 기도모양을 스캔한 3D 모델을 모니터에 띄우고 일주일간 밤을 지샜다. 삽입하기 쉬우면서도 기도를 지지할 수 있을 만큼 모양이 정확하고 몸에 해롭지 않은 재료를 써야 했다. 결국 두 가지 방식의 3D 프린팅 기술을 융합해 소년에게 딱 맞는 맞춤형 관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포항에서 만든 관을 들고 출발해 다음날 오전 수술 방에 들어가기도 두 차례. 결과는 성공이었다. 콧속이 아물면서 점막이 만들어지고 소년이 스스로 숨쉴 수 있게 되자, 연구팀은 넣어준 관을 제거했다. 3D 프린터로 만든 인공 기관을 삽입한 국내 최초의 수술이었다.
조동우 교수는 20여 년 전부터 3D 프린팅 기술을 연구했다. 응용 분야를 찾던 중, 의료인들이 마이크로미터(μm) 크기의 물체를 정밀하게 만들 기술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포를 실험 접시같은 밋밋한 곳과 특정 구조물 안에서 키웠을 때 결과가 다르다더군요. 그런데 세포 크기의 구조물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 그럼 우리가 3D 프린터로 만들게. 같이 연구해보자.’ 이렇게 된 거죠. 2003년쯤이었을 거예요. 논문은 2005년부터 나오기 시작했고.”
귀가 번쩍 뜨였다. 취재 당일 아침, 해외에서 3D 프린터를 의료에 응용한 첫 사례가 2000년대 초반에 나왔다는 자료를 읽은 참이었다. “외국과 거의 동시에 시작하셨군요.”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네, 맞습니다. 바이오 3D 프린팅에 관한한 국내 기술은 외국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그는 의자를 당겨 자세를 고쳐 앉고는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엔지니어와 의사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게 금방되지 않거든요. 저희들은 의사를 이해하기 위해 해부학·생리학·일반화학을 공부하고 수술도 여러 번 참관했어요. 그 10년의 시간이 바로 우리의 경쟁력입니다.”
바이오잉크로 살아있는 장기 찍어낸다
심 교수는 현재 줄기세포를 3D 프린터로 만든 집(스캐폴드) 안에 넣은 채 손상된 장기에 이식해 재건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기존의 줄기세포 치료, 즉 환자의 몸에 줄기세포를 직접 주사하는 방식은 전쟁터에 총과 식량 없이 병사를 떨어뜨리는 셈이다. 면역세포의 공격으로 절반이 죽고 손상된 장기까지 가는 동안 또 상당수가 죽는다. 심 교수는 “줄기세포를 스캐폴드 안에 넣어 이식했을 때 치료 확률이 월등히 높다는 걸 실험으로 확인했다”며 “최종 목표는 영양분과 산소, 단백질, 약물이 전부 맞춤으로 나와 세포를 키우는 ‘항공모함 스캐폴드’를 3D 프린터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심 교수와 조 교수 공동 연구팀은 혈관세포나 근육세포 등을 도면대로 출력해 인공 장기를 만드는 연구도 시작했다. 연구팀은 장기를 화학처리해 만든 ‘바이오잉크’를 3D 프린터에 넣어 3차원 구조물을 출력한 뒤, 출력물에서 생명활동이 이뤄진다는 증거를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최근호에 발표했다(앞쪽 일러스트). 그런데 3D 프린터로 만든 장기가 과연 본래 기능을 할까. 심 교수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서 해봐야 하는 겁니다. 외국에서 가장 앞선 연구도 출력한 간을 40일 동안 실험실에서 키운 정도예요. 물론 저는 언젠가 인공 장기를 이식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 교수와 조 교수 공동 연구팀은 혈관세포나 근육세포 등을 도면대로 출력해 인공 장기를 만드는 연구도 시작했다. 연구팀은 장기를 화학처리해 만든 ‘바이오잉크’를 3D 프린터에 넣어 3차원 구조물을 출력한 뒤, 출력물에서 생명활동이 이뤄진다는 증거를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최근호에 발표했다(앞쪽 일러스트). 그런데 3D 프린터로 만든 장기가 과연 본래 기능을 할까. 심 교수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서 해봐야 하는 겁니다. 외국에서 가장 앞선 연구도 출력한 간을 40일 동안 실험실에서 키운 정도예요. 물론 저는 언젠가 인공 장기를 이식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9월 23일, 서울 북촌에 위치한 갤러리 ‘우리들의 눈’에서 ‘석굴암과 피에타’라는 제목의 전시회가 열렸다. 어린 아이 품 안에 들어갈 만큼 작게 만든 석굴암과 피에타 조각상, 남한산성, 거북선 등이 공개됐다. 전시를 찾은 이들은 바로 시각장애인. 이들은 작품을 손으로 만지며 마음껏 감상했다. 작품은 문명운 KIST 계산과학연구센터 박사팀이 3D 프린터로 제작했다.
“저도 책에서만 보던 빗살무늬 토기를 이번에 처음 만져봤습니다. 만져보면, 절대 잊을 수 없어요. 시각장애 아동뿐만 아니라 잘 보이는 아이들도 전시에 와서 좋아하더라고요.”
예전에 제조 공정에서 접착력과 표면 처리 기술을 연구했던 문 박사는 3D 프린팅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 처음에는 명함 위에 3D 프린터로 점자를 출력했다. 하지만 응용할 분야를 찾지 못했다. 점자 전문 출판사와 점자 도서관에도 찾아갔지만, 기존 기술로도 충분하다는 답을 얻었다. 그 때 육근혜 한국점자도서관장이 서울맹학교에 다리를 놔줬다. “점자를 비롯해 이런저런 물체를 만들어 가져갔습니다. 그 중에 개구리도 있었는데, 서울맹학교 교장선생님이 보자마자 ‘다른 거 말고 이 개구리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시각장애아동은 개구리가 알에서 나와 올챙이를 거쳐 자란다는 사실을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림을 볼 수 없고 실물을 만져보기란 도시에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 특히 전체 모양을 한번에 만질 수 없는 커다란 물체는 알 방법이 없다. “남한산성에 야외 수업을 가긴 하지만, 정작 산성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르칠 방법이 없다더군요.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품 안에 들어오는 석굴암과 피에타’입니다.”
마침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함께 연구 중인 이헌주 박사였다. “아주 잘 작동합니다. 사용 가능한 정도.” “우리 꺼?” “우리 꺼.” “대박인데? 오케이, 바로 찍어봐.” 최근 개발하고 있다는 맞춤 3D 프린터 얘기인 듯했다. 문 박사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종종 시각장애인 수업을 참관합니다. 가르치고 배우려는 열의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요. 왁자지껄 떠들던 참관인들도 나갈 때가 되면 다들 말이 없어져요. 이런 게 바로 사람을 향하는 기술 아닐까요.”
입체 교구야 얼마든지 있을 텐데 3D프린터로 만드는 게 뭐가 좋을까. 가장 큰 장점은 ‘사용자 맞춤형’이라는 점이다. 유치부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은 손크기가 두 배 이상 달라 교구도 다른 크기가 필요하다. 특히 교사가 가르치기 편한 교구가 교육에도 효과적인데, 3D 프린터를 이용하면 교사의 요청에 따라 자유자재로 교재를 만들 수 있다. 제작비도 싸다. “선생님과 2주에 한 번씩 1년 내내만났어요. 삼국시대 국경의 변화를 알려주는 입체 지도는 선생님 요청에 따라 가르치기 가장 쉬운 형태로 만든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같은 문화재라도 다른 관점에서 관찰하고 싶다면, 디지털 모델만 조정해 그 부분만 더 세밀하게 출력할 수도 있죠.”
문 박사의 요즘 고민은 개구리를 표현하기 위한 말랑한 재료 혹은 아이들이 입에 대도 안전한 친환경 소재로 교구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팔리는 3D 프린터는 해당 업체에서 판매하는 소재만 출력할 수 있어요. 찍고 싶은 소재와 그걸 출력할 프린터를 함께 개발하고 있습니다.”
마침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함께 연구 중인 이헌주 박사였다. “아주 잘 작동합니다. 사용 가능한 정도.” “우리 꺼?” “우리 꺼.” “대박인데? 오케이, 바로 찍어봐.” 최근 개발하고 있다는 맞춤 3D 프린터 얘기인 듯했다. 문 박사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종종 시각장애인 수업을 참관합니다. 가르치고 배우려는 열의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요. 왁자지껄 떠들던 참관인들도 나갈 때가 되면 다들 말이 없어져요. 이런 게 바로 사람을 향하는 기술 아닐까요.”
1월 28일 오전 10시, 기자는 서울 남부터미널역 인근 오피스텔에 위치한 3D 프린팅 콘텐츠 제작 업체인 ‘만드로’ 사무실을 찾았다. 마침 이상호 대표는 고등학생 쯤 돼 보이는 남학생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기가 좀 뻑뻑한 것 같아요.” “아, 그래요? 그럼 좀 더 다듬어 볼게요.” 부산에서 온 김모 군(19)은 선천적으로 오른팔이 짧고 손가락도 세 개뿐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같은 사연을 접한 이 대표가 도와주겠다고 연락했고,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3D 프린터로 찍은 맞춤 의수를 다듬는 중이었다.
이 대표는 국내 최초로 3D 프린팅을 이용해 맞춤 의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는 원래 3D 제작 전문가가 아니다. 사연은 이렇다. 그는 지난 1월 8일 인터넷 게시판에서 지난해 사고로 양손 손목을 절단한 남성의 사연을 접했다. ‘바이오닉스 전자의수는 한 쪽에 4000만 원씩 하더라고요. 너무 비싸서 포기했고요, 3D 프린트 의수 제작이라고 검색해보니 카페 글이 있길래 이렇게 글을 쓰게 됐습니다. 올해 35입니다. 나이가 얼마 되지 않아 쉽게 포기가 안되네요.’
안타까운 사연에 수많은 응원 댓글이 달렸다. 3D 프린터용 소프트웨어를 만들면서 취미로 직접 제작도 하던 이 대표는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제가 제일 못하는 모델링은 다른 분의 도움을 받았고요.” 그는 미국 미주리주 소재 세인트루이스워싱턴대(WUSTL) 학생들이 만든 의수를 참고해 어깨 관절에 가속도 센서를 달아 어깨를 위로 ‘으쓱’하면 손가락이 오므려지고 또 다시 어깨를 움직이면 손가락이 펴지는 전자 의수를 만들었다. 이 대표는 “아직은 손가락별 제어가 되지 않지만, 2월 안에는 좀 더 나은 의수를 만들어 드리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오후, 카톡이 울렸다. 이 대표였다. 김 군의 의수를 만들며 찍은 사진들을 추가로 보내주며 그가 말했다. “3D 프린터 덕분에 단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맞춤 의수를 만들 수 있네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