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4년 6월 28일, 유럽 보스니아의 중심 도시 사라예보의 한 골목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세르비아계 민족주의 운동에 투신한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총알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절명한 것이다. 분노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슬라브계 맏형인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게르만계의 맹주 독일도 러시아 및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것이 교과서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라예보 사건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의 비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는 큰 맹점이 있다. 사라예보 암살사건은 6월 28일에 일어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고 독일, 러시아, 프랑스의 선전포고가 뒤따른 것은 한 달이 지난 7월 28일 ~ 8월 1일이다. 도대체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라예보 사건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된 것은 필연인가?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 유럽을 엮고 있던 세 가지 네트워크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평화의 네트워크 : 혈연이 더해진 외교 관계
요즘 같이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시대에는 각국 지도자 사이에 깊은 교분이 생기기 쉽지 않다. 이에 비해 당시 유럽 왕실은 외교 수단으로 혈연을 맺는 전통이 있었다. 핵심에는 19세기 영국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이 있다. 당시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친손자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며느리였던 알렉산드라 왕비의 조카다. 그러니 빌헬름 2세는 조지 5세의 고종사촌 형이고,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의 이종사촌 형이다.
한편 당시 군주제는 의회 민주주의의 부상과 함께 쇠락해가고 있었다. 유럽 왕족들은 자칫 전쟁에 패하면 적대세력이 일어나고 자신은 공멸에 이를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끈끈한 혈연으로 엮인, 기득권을 지키려는 운명공동체 네트워크가 존재했던 것이다.

갈등의 네트워크 : 동맹으로 엮인 외교 관계
19세기 후반 유럽에 몰아친 가장 극적인 변화는 1871년 통일 독일제국의 수립이다. 명재상 비스마르크는 영국과의 충돌을 회피하고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노련한 외교전을 펼쳤지만 그의 퇴임 이후 빌헬름 2세가 노골적인 팽창정책을 취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공동의 적인 독일을 저지해야 한다는 목표를 공유하면서 1907년 8월 ‘삼국협상(Triple Entente)’을 맺는다. 복잡한 동맹관계는 소국들까지 뻗쳐 있었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약속했고, 러시아는 세르비아의 내각을 좌지우지했다. 만일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했다.
파멸의 네트워크 : 기차 시간표가 지배한 전쟁의 논리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확대를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 동맹관계를 명시한 외교문서는 대부분 해석의 여지를 충분히 남겨두어, 명분에 따라서는 전쟁의 불구덩이로 끌려 들어가지 않을 장치가 곳곳에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군대를 지배하고 있던 독특한 논리와 전쟁 계획이었다. 당시 유럽 주요 국가들은 국민개병제를 채택해 동원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1914년에는 독일, 프랑스가 각각 500만 명, 400만 명을 동원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 선포 이후 재빨리 대규모 예비군을 동원해 적국보다 빨리 전선에 배치, 진격시키는 능력이 승패를 가늠했다. 이렇게 되자 막대한 병력과 무기의 이동, 지속적인 보급의 중요성이 한층 커졌다. 열쇠는 철도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전쟁계획에 열차운행 시간표를 짜는 일이 중요해졌다.
철도의 가장 큰 맹점은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기차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 한 군데가 막힌다고 쉽게 비켜가거나 돌아갈 수가 없다. 건설에도 시간이 매우 많이 걸렸다. 따라서 철도를 이용한 동원계획은 사전에 정한 바와 어긋나면 엉망진창이 돼버리기 일쑤였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시간계획표를 한 번 조정하려면 몇 달씩 걸렸다. 병력 동원 및 철도 수송계획은 일단 시행에 들어가면 중간에 발을 빼기 어려운 거대한 괴물이 된 것이다.
이는 군사지도자들에게 편리하지만 위험한 논리를 제공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적국보다 최대한 빨리, 더 많은 병력을 집결시켜 적국을 향해 진격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적보다 먼저 사전에 정교하게 짜인 동원 및 배치계획을 실행시켜야 한다. 상대가 전쟁의 징후를 보이기만 해도 국가는 선제적으로 군을 동원해야 하며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승리를 위해 기계적인 전쟁 돌입을 부추기는 무시무시한 네트워크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전개 : 파국적인 임계 현상의 촉발
자연이든 사회든 다양한 네트워크가 맞물리며 예상 못한 결과를 내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복잡성 과학’이다. 특히 흥미를 끌어온 주제는 어느 경계(임계점)를 넘어가면서 갑작스럽게 파국으로 돌변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매년 고작 수 cm씩 움직이는 지각운동이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가면 지진, 쓰나미를 일으킨다. 끝없이 치솟던 주택시장과 주식 거품이 한 순간에 꺼져버린 일도 그렇다. 이런 현상을 ‘임계 현상’이라고 하며, 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갑작스런 파국은 먼저 임계상태로 다가가는 과정이 발생한다. 유럽도 20세기 초부터 독일 제국의 팽창압력으로 한껏 달아오른 상태였다. 하지만 사라예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사건 직후만 해도 유럽 여론은 오스트리아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결정적인 패착을 저질렀다. 대응 수위에 대해 갑론을박을 벌이며 3주를 허비한 것이다. 특히 독일의 지원 약속을 얻어내는 데 너무 매달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발칸 반도를 집어 삼키려 한다는 의구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임계상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의 증폭 속에 소리 없이 다가왔다.
임계상태에 도달한 시스템은 파멸의 네트워크가 극도로 긴밀해진다. 우발적인 작은 사건이 네트워크 전체로 퍼져 나간다. 예를 들어 주식시장에서 불안심리가 높아지면, 평상시에는 보고 넘겼을 매도 주문에도 불안이 밀려오고, 더 늦기 전에 나도 주식을 팔아야한다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대다수 시장 거래자들에게 확산되는 순간, 대폭락이 발생하는 것이다.
1914년 7월 25일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세르비아 정부가 오스트리아의 굴욕적인 요구를 수락한다고 발표하기 직전에 급전이 도착했다. 러시아가 전쟁 준비를 발령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는 러시아 군부와 일부 정치가들의 과민 반응이었다. 러시아는 워낙 영토가 거대해 군대 동원속도가 밀리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미리 부분 동원조치를 내린 것이다.
세르비아는 한껏 고무돼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더욱 긴장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군 지도부는 러시아가 부분적이나마 ‘동원’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크게 자극 받았다. 바로 총동원에 들어가야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논리가 팽배해지고 러시아에 경고를 보냈다. 독일의 고압적인 자세는 다시 러시아 내부에서 총동원 확대 주장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물론 평화의 네트워크도 분투하고 있었다. 7월 29일 오후,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에게 “러시아가 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 유럽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에 몰아넣지 않을 수 있다”는 전보를 연이어 보냈다. 니콜라이 2세는 그날 밤 군부가 내린 동원령을 모두 취소했다. 영국 내각도 직접 개입의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강경파 각료들과 군부의 집요한 요구와 논리는 이를 압도했다. 그 시점에서 동원계획을 중지시키면 결국 ‘패배’로 귀착된다는 압력이었다. 이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군부 모두를 지배한 끔찍한 논리였다. 결국 자제력을 발휘하던 니콜라이 2세도 30일 오후 4시 러시아군의 총동원을 승인했다. 그러자 31일 12시 30분에 오스트리아는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독일은 이날 오후 1시에 형식적인 최후통첩과 함께 전쟁준비태세에 들어갔다. 프랑스도 즉시 총동원에 돌입했다. 무더운 7월 내내 느슨하게 이어져온 긴장 속에서 임계상태로 접근해 간 유럽의 국제정치 시스템이 7월 마지막 주에 갑작스럽게 파국으로 치달은 것이다. 이 파국은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끔찍한 세계대전, 과연 피할 수 있었는가
기묘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많은 이들이 곱씹어보는 사례가 됐다. 사실 이 전쟁은 어떤 호전적인 미치광이나 야심가가 일으킨 게 아니다. 상당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승전이 지상과제이며 한 발 밀리는 순간 우리는 끝장이라는 군사지휘관들의 논리가 거대한 파멸의 네트워크가 됐다. 어렴풋이 그 메커니즘을 알던 이들도 브레이크 거는 방법을 몰랐다. 돌이켜보건대 제1차 세계대전은 ‘무지가 불러온 필연’이었다. 자연과 사회 시스템은 너무나 자주 임계상태를 향해 슬금슬금 접근해가는 속성이 있었던 것이다.


분명 앞으로도 인류는 피할 수 없는 시스템의 긴장과 임계상태로의 접근을 여러 번 겪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파국을 저지할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거대한 관성에 휩쓸려 파국으로 치달을 것인지는 과거로부터 배우는 우리의 지혜에 달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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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인류는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
PART1 제1차 세계대전은 어이없이 일어났다
BRIDGE 전쟁, 학문을 낳다
PART2 서로 돕고, 교역하고, 견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