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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과학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과는 구별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은 과학을 좋아하지 않으며, 과학을 말하는 언어로는 철학과 윤리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브로노프스키(Jacob Bronowski)는 인간 문화의 본질로서 과학을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이다. 브로노프스키가 그리고 있는 과학과 인간에 대해 살펴보자.
 

브로노프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



과학과 인류사의 다큐멘터리

필자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어느 날 밤, 졸린 눈을 번쩍 뜨게 해준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재미있고 유익한 다큐멘터리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BBC 방송사에서 과학사와 관련된 시리즈물을 재방영하고 있었다. 작은 키에 투박한 안경을 쓴, 눈썹이 유난히 짙은 진행자는 매우 지적이면서도 절제된 화술로 과학과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폭넓은 시각으로 역사를 꿰뚫어 보면서 과학에도 정통한 것일까. 프로그램이 끝나고 올라가는 자막을 통해 그가 바로 브로노프스키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프로그램 제목은 ‘The Ascent of Man’이었다. BBC는 이 다큐멘터리를 1971년 7월부터 1972년 12월에 걸쳐 촬영해서, 이듬해인 1973년에 방영한 바 있었다. 프로그램 내용은 인류 문명사와 관련된 세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해설하는 것이었다. 프로그램이 최초로 방영됐던 그 해에 같은 제목의 단행본 ‘인간 등정의 발자취’(김은국 역, 1985, 범양사)도 출판됐다.

브로노프스키는 이미 1960년대 초에 BBC의 ‘Insight’라는 과학 프로그램에 출연해 수학과 물리학, 인간지능 등에 대한 뛰어난 해설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특히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폭넓고 수준 높은 저술과 호소력 있는 강연 솜씨로 과학 비평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The Ascent of Man’은 총 13부작으로, 원시인류의 출발에서 시작해서 석기, 청동기, 철기 등 각 문명의 진화 과정과 근대 과학의 등장을 거쳐 원자물리학, 유전공학, 컴퓨터공학, 인간두뇌 연구 등 최신 과학을 다루고 있다. 각 시리즈의 제목은 시와 문학을 즐겼던 그의 취향에 따라 매우 은유적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천사 아래 있는 존재, 2장 계절의 수확, 3장 돌의 결, 4장 숨겨진 구조, 5장 천체의 음악, 6장 별의 사자(使者), 7장 장엄한 시계 장치, 8장 동력을 찾아서, 9장 창조의 사다리, 10장 세계 속의 세계, 11장 지식과 확실성, 12장 이어지는 세대, 13장 긴 유년 시대가 그것이다.

브로노프스키는 수학자로 출발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물리학과 생물학 등 자연과학 전반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했다. 또한 과학자이면서 철학자, 시인, 극작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학자이면서 강연자, 행정가, 방송인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TV의 위력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보기 드문 과학사상가였다.

‘The Ascent of Man’이란 제목은 찰스 다윈의 저작으로 유명한 ‘인류의 유래와 성선택(性選擇)’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1871)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연히 인류 역사에 대한 브로노프스키의 입장은 진보와 희망, 그리고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간과 과학에 대한 희망

순수 수학자가 역사와 인간, 그리고 가치에 대해 매달린 데는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브로노프스키는 다른 영국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시(戰時) 과업에 동원됐다. 그가 맡았던 임무는 수학 이론을 적용해서 폭격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1945년 그는 일본에 투하됐던 원자폭탄의 위력을 조사하는 방문단의 일행으로 나가사키를 시찰했다. 당시 목격했던 처참한 문명 파괴는 이후 그의 삶 전체를 바꿔놓았다. 이후 그는 군사연구를 그만두고 과학과 윤리, 생명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B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제작되기 이전 브로노프스키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과학의 상식’(1951), ‘과학과 인간의 가치’(1956),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1965)을 출판한 바 있다. 이런 저서를 통해 완성해 갔던 과학과 인간에 대한 그의 철학적 성찰이 종합돼 표현된 것이 바로 ‘인간 등정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책의 곳곳에 인류의 진보와 과학에 대한 브로노프스키의 애정과 희망이 깃들어 있다. “인간의 성취, 특히 과학은 완성된 구조물의 박물관이 아니다. 그것은 진행과정이며…” “예술과 과학은 동물이 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행동이다.”

또한 브로노프스키는 기술의 진보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기술은 과학 원리로부터 도출되지만 기술의 발명과 고안을 통해 인류가 생존할 수 있고 문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받침만 있다면 지구도 움직일 수 있노라”는 주장에 빗대어, 그보다 수천년 앞서 지레의 원리를 쟁기에 사용해서 경작했던 중동 문명에 대해 “나에게 지렛대를 다오. 그러면 나는 온 세상을 먹여 살리겠다”라고 말하며 인류 생존에 대한 기술 진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류 발달사를 다룬 이 책은 인류 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등정이 되기 위해서는 휴머니즘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류 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과학에 있으며, 따라서 과학에 대한 자부심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20세기에 대한 그 어떤 믿음도 존재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브로노프스키는 과학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지상의 부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상상력을 계승하는 것이다. 도덕적 상상력 없이는 인간과 믿음과 과학은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과학과 인류, 그리고 윤리적 성찰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책의 머리말에 잘 집약돼 있다.

“인간성 없이는 철학이 있을 수 없고, 나아가서 올바른 과학도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나의 확신이 이 책에서 잘 드러나길 바란다. 나에게 있어서 자연의 이해는 인간 본성의 이해를, 그리고 자연 안에서의 인간 조건의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20세기 대표적인 ‘지적 멀티플레이어’
 

브로노프스키(J. Bronowski, 1908‐1974)


브로노프스키(J. Bronowski, 1908­1974)는 1908년 1월 18일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로 이주했으며, 1920년에는 다시 영국으로 건너갔다. 과학과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케임브리지대에서 1933년에 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3년간 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일했으며, 1950년에는 영국 석탄국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연료 연구를 지휘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는 인간생물학에 관심을 갖고 생명, 두뇌, 윤리 등의 문제를 연구했다. 생물학에 대한 높은 관심은 미국 샌디에고 솔크 생물과학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1964년 미국으로 귀화했다.

브로노프스키는 수학자면서 물리학자였고, 시인이자 행정가였으며, 극작가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다방면에 걸쳐 능력과 식견을 발휘했던‘지적 멀티플레이어’였다. 대표적 저서로는‘과학의 상식’(1951), ‘과학과 인간의 가치’(1956), ‘인간의 정체성’(1965), ‘과학과 인간의 미래’(1977)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라디오 대본과 희곡 등을 남겼다.

2002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송진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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