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9년 관상감의 제조(실무 최고 책임자)가 혜성의 위치를 묻자, 혜성의 모습을 열심히 그리던 안국빈이 답했다. 안국빈은 조선시대 유명한 천문학자로 특별히 이번 혜성을 관측하라는 명을 받았다. 거극도는 혜성이 북극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나타내는 각도이고 입수도는 28수(별자리)를 기준으로 혜성이 어디쯤 있는지를 나타내는 각도다. 익수의 3도라는 말은 혜성이 익수라는 별자리의 기준별에서 3도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안국빈을 비롯한 조선의 관상감 천문학자들이 관측한 혜성은 바로 핼리혜성이다. 핼리가 발견한 뒤 그의 예측대로 찾아온 이 혜성은 유럽에서는 1758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관측됐고 이듬해 6월까지 관측되다 사라졌다.
관상감은 1452년 세종대왕이 이름을 바꾸기 전까지 서운관으로 불렸다. 서운관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천문역법, 지리, 택일 등의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다. 고려시대인 1308년 태사국을 병합해 서운관이라 했다. 올해로 서운관이 설립된 지 700주년이 된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해 1392년에 서운관을 설치했는데, 이때 서운관은 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 했다. 흥미롭게도 세종이 서운관의 이름을 관상감으로 바꾼 뒤에도 관상감의 별명이 운관(雲觀)일 정도로 서운관이란 이름은 잊히지 않는다.
“구름과 사물의 길흉을 기록한다!”

정조 때인 1818년에 성주덕이 서운관의 모든 것에 대해 적어 놓은 책인 ‘서운관지’(書雲觀志)에 따르면, 서운(書雲)이라는 이름은 춘추좌씨전에 “분지계폐, 필서운물(分至啓閉, 必書雲物)”, 번역하면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에는 반드시 구름과 사물의 길흉을 기록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서운관지’에는 서운관(관상감)의 연혁과 맡은 일, 규범과 제도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관상감 학자들은 그 역할에 따라 천체에 대한 관측과 역서를 만드는 일(천문학), 묘나 집의 자리를 잡는 일(풍수학), 길흉을 판단해 국가 행사의 날짜를 잡는 일(명과학)을 했다.

1급 비상 천변, 발견 즉시 보고

일식과 월식, 태양의 흑점, 별똥 등의 천문현상이 관측되면 미리 정해둔 시간에 보고하도록 했다. 해뜨기 직전부터 해질 때까지 관측된 것은 모았다가 해진 뒤에 보고하고, 해질녘부터 새벽까지 밤에 관측된 것은 모았다가 다음날 아침 통금이 풀리기를 기다려 보고했다.
그런데 혜성, 객성(초신성), 별이 낮에 떨어지는 현상, 지진 등은 1급 비상 천변으로 발견 즉시 보고해야 했으며, 보고 형식도 직접 말로 전하거나 간이 보고서로 대체했다. 상번은 승정원(왕의 비서실)과 시강원(세자 교육기관)으로 가서 구두로 보고하고 왕과 세자에게 알렸고, 중번과 하번은 의정부와 관상감의 두 제조에게 고하는 한편 관상감의 선임 관원에게도 보고하게 했다.
천문 관측뿐 아니라 역서를 만드는 일도 관상감의 주요업무였다. 동양의 역법은 단순히 달력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해에 일어날 일식과 월식을 미리 계산해 국민들에게 알려줌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막고 왕권의 탄탄함을 과시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왕조의 기틀을 다지려면 천문학을 진흥해야만 했다. 세종대왕은 여러 학자들과 함께 규표(圭表)를 만들어 1년의 길이를 아주 정밀하게 측정하고, 간의(簡儀)라는 관측장치를 만들어 달의 위치 변화를 측정했다. 시간에 따라 천체의 위치 변화를 측정하는 일에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드는 일은 빠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측정한 해와 달의 위치를 바탕으로 언제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는지 계산했다.
세종대왕 이전에는 중국에서 이런 일식 계산 결과를 받아왔다. 동짓날 출발한다고 해 ‘동지사’라고 부르던 사신들이 중국 수도에서 이듬해의 달력을 받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일식의 진행 시간은 서울과 북경에서 관측한 것이 차이가 난다. 두 지점의 경도와 위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세종대왕과 관상감 학자들이 해결하고 ‘칠정산’이라는 자주적인 역법을 이룩했다.

연산군에게 별똥 보고했다가 강등
어진 지도자를 만나 제 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던 관상감도 폭군을 만나 고생한 경우도 있었다. 연산군 시대가 바로 그런 시기였다. 동양에서 천문학은 정치와 상당히 관련이 깊었다. 동양의 유교 정치에서는 임금은 하늘을 대신해 지상 만물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하늘에서 전에는 보이지 않던 괴이한 천문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늘이 임금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괴상한 천문 현상이 일어나면, 이것은 일단 임금의 탓이었다. 이때 임금은 보통 신하들에게 바른 말을 아뢸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물론 임금이 그런 기회를 따로 주지 않아도 신하들은 지금이 기회라는 심정으로 입바른 말을 임금에게 아뢰곤 했다.
연산군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산군 5년(1499년)에 혜성이 자미원이란 별자리에 나타났다. 자미원은 임금이 사는 궁궐이고 혜성은 전쟁, 반란 등을 의미한다. 신하들은 한결같이 “임금이 이를 두려워하고 반성하고 덕을 닦아야 한다”고 반응했지만, 임금 입장에서는 자기 잘못을 지적하며 자기를 가르치려 드는 신하들의 말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이듬해 관상감에서 혜성이 또 나타났다고 아뢰자, 연산군은 “혜성이 어디에 나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니 떠들어서는 안 된다. 만일 대간(臺諫, 관료를 감찰하던 대관과 임금의 잘못을 말하던 간관을 통칭하는 말)에 말이 새면 또 반드시 시끄럽게 와서 말할 것”이라고 귀찮아했다.
연산군 10년에는 관상감에서 별똥이 어느 별자리에서 나타났다고 글로만 보고하므로 이해하기 어려우니 앞으로는 천문도에 표시해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뒤 관상감에서 자주 별똥을 봤다고 보고하자, 연산군은 싫증이 나 마침내 보고를 하지 말도록 명했다. 별똥은 날씨만 좋으면 밤마다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닌가. 그런데도 연산군 12년에 관상감이 자꾸 천변을 아뢰자, “이런 재변을 아뢰지 말라고 명했거늘, 어찌 또 아뢰느냐? 어리석은 사람들이 망령되이 사사로운 생각으로 재변을 논하는 것은 천기를 어지럽히는 일이니, 관상감을 혁파함이 온당하겠다”라며, 관상감을 ‘사력서’로 낮추고 물시계 운영과 역법 편찬의 일만 맡도록 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다시 관상감이란 이름과 지위를 되찾았다. 그 뒤 관상감은 안정적으로 수백 년에 걸쳐 꾸준히 천체를 관찰했다.
정조가 뽑은 천문학자, 굶어 죽다

또 과거를 봐 관상감 관원이 될 수 있었다. 과거에서는 암송, 임문, 계산을 시험했다. 암송은 ‘천문류초’라는 별자리 안내 시를 암송하는 시험이었고, 임문은 주어진 천문 서적과 행정 관련 서적을 읽고 그 뜻을 새기는 시험이었으며, 계산은 시헌력으로 일·월식 날짜를 계산할 줄 아는지 판단하는 시험이었다. 이렇게 전문적인 내용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시험 자격은 생도(관직에 임명되기 전 소속 관아에서 학문과 기술을 익히던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그 밖에 취재라는 오늘날의 승진 시험에 해당하는 시험도 있었다.
관상감에서는 수많은 천문학자를 배출했지만, 천거나 과거를 거치지 않고 파격적으로 발탁된 경우도 있다. 조선 후기 정조시대의 천재 천문학자 김영(金泳)이 대표적 예다. 1749년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천문학의 천재였다. 그는 키가 크고 얼굴이 파리했다고 한다. 그는 ‘기하원본’을 혼자 익히면서 수학에 흥미를 느껴 15년간 수학과 천문학에 몰두한 끝에 남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기원전 300년경에 그리스의 수학자인 유클리드가 저술한 기하원본은 1605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됐다.
1789년 김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길 때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덕성과 함께 세차운동을 보정해 별의 적경과 적위를 다시 계산하고, 제사 시간, 입관 시간 등을 정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해시계와 물시계의 눈금을 조정했다.
정조는 김영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과거 시험도 없이 관상감의 천문학자로 발탁했다. 관상감 관리들은 모두 그를 시기했으나 정조의 특별 배려로 그는 천문 계산 책임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의 계산은 역법 책에 있는 잘못된 글자도 다 잡아낼 만큼 정확했다. 정조가 세상을 뜨자 그는 곧 관상감에서 쫓겨났지만, 큰 혜성이 나타나거나 역법상의 오류가 생겼을 때 관상감 관리들은 그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다. 말년에 김영은 가난하게 살면서 주역 연구, 수학과 과학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다. 안타깝게도 1817년 대기근이 들었을 때 굶어죽었다. 이때 그의 연구 자료와 논문은 누군가가 훔쳐갔다는 얘기가 전한다.

신고식에 참여한 조선 천문학자 명부
관상감의 부서 가운데 삼력에 능통한 삼력관이 근무하던 삼력청은 주목할 만하다. 삼력(三曆)은 중국의 대통력인 칠정산 내편, 아라비아의 역법인 칠정산 외편, 그리고 서양 천문학이 반영된 시헌력이었다. 당시 천문학자는 삼력관이 되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역대 삼력관의 계보를 책으로 엮어 놓았을 정도다. ‘삼력청선생안’(三曆廳先生案)이 그것이다. 이 문헌에는 삼력관의 본관, 출신, 생년월일,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간단한 계보, 역임한 관직 등이 기록돼 있다. 또 새로 삼력관이 되면 요즘의 ‘신고식’에 해당하는 허참례를 했다. 이 허참례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부가 남아 있는데, ‘삼력청허참록’이란 책이다. 한편 ‘운관방목’(雲觀榜目)은 관상감에서 시행된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천문학자들의 명부다. 이러한 서적들은 옛날 천문학자들의 계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직업적인 천문학자들은 대를 이어 천문학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인구는 700만 명 정도였는데, 관직은 오직 2500개뿐이었다. 공무원이 되면 어느 정도 생활이 보장됐기 때문에 대를 이어 천문학자가 될 만했다. 심지어 어릴 적부터 자식들에게 천문학을 공부시켰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천문학자를 뽑는 과거 시험에 어린 나이로 합격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신분은 세습되는 것은 아니었고, 뛰어난 공을 세우면 현감 정도의 벼슬까지는 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잠시 끊겼던 서운관의 전통은 1965년 춘분날 창립돼 학술활동을 전개해온 한국천문학회와, 1974년 국립 천문대로 설립된 현재의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이어졌다. 서운관의 역사 700년, 그 이전 삼국시대부터 계산하면, 한국 천문학은 훨씬 더 긴 세월의 전통을 갖고 있지만, 현대 천문학이 시작된 것은 겨우 30년 세월이다. 그 짧은 세월 동안 우주에 대한 한국인의 호기심은 더욱 더 힘차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세차운동*
지구 자전축이 황도면(지구 공전 궤도면)의 축에 대해 기울어져 있어 팽이처럼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현상. 2만 5800년에 한 번씩 제자리로 돌아온다.
안상현 연구원 >;
서울대 대학원에서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초기 은하의 형성과정뿐 아니라 역사 속의 별똥비, 혜성, 일식 등을 연구해왔다. 저서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별자리’ ‘한국사탐험대4 과학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