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전쟁의 관계를 말할 때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늘 신무기다. 하지만 신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뒤바꾼 사례는 드물다. 오히려 근대들어 ‘과학 연구’가 전쟁과 다양하게 엮이면서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과학 연구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자원을 꾸준히 투입해야 하는데 전쟁은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도 그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과 과학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변곡점은 1차 세계대전이다.
유럽에서는 근대국가 형성 초기부터 군사 문제 때문에 과학에 자원을 배분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육군의 공병장교인 세바스티앙 보방은 위력이 세진 대포에 대항할 수 있는 ‘성형요새(星形要塞) 축성술’을 집대성했다. 튼튼한 요새를 세울 때 삼각법과 기하학이 필수가 되면서 공병대와 포병대에서는 응용수학 교육이 제도화됐다. 이 훈련을 받는 장교가 많아지면서 수학과 자연과학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사람이 ‘쿨롱의 법칙’으로 유명한 18세기 중반의 쿨롱이다. 공병대 장교였던 그는 토양과 그 위에 ‘떠 있는’ 건조물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정리해 근대토목공학의 시조가 됐다.
해외로 뻗어가던 영국에서는 근대 해양학의 토대가 마련됐다. 천문학자인 헬리가 바람지도를 최초로 작성한 이래, 영국 해군은 바람과 해류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분석하는 일을 중시했다. 이런 전통이 확립되면서 영국 군대 내부에서 당장의 실용성을 넘어 장기적이고 광범위한 지원이 이뤄진다. 1830년대 영국 해군이 비글호를 파견한 것도 이 덕분이다. 비글호는 찰스 다윈이 탑승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뷰포트 제독이 기상학자 피츠로이 함장을 파견한 탐사항해였다. 뷰포트 제독의 이름은 풍력을 표시하는 ‘뷰포트 풍력계급’으로 남아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 직전,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포병대의 화학 생산·보관·분배 관리체계를 개혁해 포병대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대혁명 이후 수학자 가스파르 몽쥬가 해군성 장관을 맡으면서 프랑스 군함의 성능이 영국 군함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앞선다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해군은 숙련된 수병과 뛰어난 장교를 갖춘 영국 해군에 여전히 열세였다. 그래도 공병장교 양성학교로 출발한 세계 최초의 공대 에콜폴리테크닉은 오늘날까지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19세기 중엽에 벌어진 크림전쟁은 두 가지 학문을 낳았다. 먼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나이팅게일의 주도로 근대 간호학이 만들어졌다. 또 대규모 수송함대가 폭풍우로 침몰한 사건을 계기로 체계적인 일기예보를 할 수 있는 근대 기상학이 탄생했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군대가 신기술 채용에 언제나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탄약과 화약이 일체화된 총알을 총 뒷부분에 장전하는 방식인 후장식 소총은 1820년대 처음 등장했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에 활용된 것은 40여 년이 지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탱크, 비행기 등 새롭게 등장한 신무기들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전쟁 직전 독일의 프리츠 하버가 개발한 암모니아 인공합성법이다. 암모니아는 화약, 비료, 독가스를 만들 수 있는 원료다. 영국의 유대계 화학자 카임 와이즈만도 무연화약 제조에 필요한 아세톤을 대량생산 할 수 있는 발효공정을 완성했다. 과학 연구가 개별 신병기를 뛰어넘어 국가의 전쟁수행능력을 직접 늘려 버린 것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과학 연구와 전쟁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원자폭탄을 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국가와 군부가 당면과제를 해결하려는 연구를 지원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그러나 맨해튼 프로젝트는 성패가 불분명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과학자를 격리된 장소에 모아 기초연구부터 하게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개발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계산이 필요하다는 점이 알려졌고, 이로 인해 곁가지 프로젝트였던 컴퓨터 개발 계획이 중요해졌다. 2차 대전 때 형성된 과학 연구와 전쟁의 관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수정된다. 전쟁이 벌어진 뒤에 군사연구를 하는 것은 이미 늦기 때문이다. 미국은 평상시에도 대학에서 군사연구를 하도록 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역시 기존 학문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학문분야를 낳았다.
핵무기 계획을 통해 지구과학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데이터가 쏟아졌다. 대륙간탄도탄의 탄두 재료 연구는 재료공학이 별도의 학문으로 독립하는 계기가 됐다. 레이더와 컴퓨터 그리고 군인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한 방공망을 개발하기 위해 사이버네틱스와 HCI(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 연구를 정부가 후원했다.
현대과학과 전쟁은 본질적으로 한 몸일까? 답하기가 쉽지 않다. 어린아이와 할머니도 쉽게 사용하는 마우스와 터치패드는 HCI연구의 산물이다. 휴대전화와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은 군사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이다. 향유고래의 장대한 노래를 인간이 깨닫게 된 것은 잠수함전 준비 덕분이다. 그렇지만 전쟁연구가 아니어도 (시기는 늦어졌겠지만) 결국 이런 성과가 나왔을 것이다. 전쟁과 과학연구 모두 인간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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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인류는 전쟁을 멈출 수 있을까?
PART1 제1차 세계대전은 어이없이 일어났다
BRIDGE 전쟁, 학문을 낳다
PART2 서로 돕고, 교역하고, 견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