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한 영화 ‘노잉’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2007년작인 ‘선샤인’은? 두 영화는 태양 때문에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는 사건을 다룬다. 재앙이 일어나는 원인을 따지면 둘은 반대다. 노잉에서는 태양에 슈퍼플레어가 발생해 지구가 화염에 휩싸인다. 선샤인에서는 태양이 갑자기 죽어가기 시작해 에너지를 받지 못한 지구가 점점 추워진다. 결론도 반대인데, 그건 내용 누설이 될 테니 직접 확인해보자.
중요한 건 태양이 어느 쪽으로 변하든 지구에 사는 우리의 목숨은 풍전등화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당장 생존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첨단 문명이 발달하고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갈수록 태양 활동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지구 자기장 뒤흔드는 폭풍
“먼저 정확한 용어를 쓸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하기 쉽거든요.”
이재진 한국천문연구원 태양우주환경연구그룹 연구원은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이렇게 못부터 박았다. 기자가 질문 도중 무심코 ‘태양폭발’이라는 단어를 썼기 때문이었다.
“태양폭발이라고 흔히 쓰는데, 그러면 마치 태양이 폭발하는 것 같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태양 표면의 흑점이 폭발하는 거니까 ‘태양흑점폭발’이나 ‘태양폭풍’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태양 표면의 흑점이 폭발해 에너지를 분출하는 현상이 플레어다. 태양 가장자리에 웅장한 화염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폭발의 규모는 핵폭탄 수백만 개가 터질 때와 맞먹을 정도다. 그렇다면 흑점은 왜 폭발할까. 먼저 흑점이 왜 생기는지를 알아야 한다.
태양 표면 아래에는 내부의 뜨거운 물질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대류층이 있다. 대류층은 안쪽에서 생긴 에너지를 태양 표면으로 전달해준다. 대류가 잘 일어나지 않아 안쪽의 에너지가 밖으로 잘 전달되지 않는 지역이 흑점이다. 원인은 태양의 자기장이다. 태양의 차등자전 때문에 내부의 자기장이 쌓여 밖으로 삐져나오는 지역이 생긴다. 태양을 이루는 입자는 자기장의 영향을 받는다. 결국, 자기장이 강한 지역은 뜨거운 물질이 올라오지 않아 주변에 비해 어두운 흑점이 되고, 이곳과 주변부 사이에 에너지 불균형이 생긴다.
김연한 천문연 우주감시사업센터 책임연구원은 “에너지의 불균형때문에 흑점에 에너지가 저장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분출되는데, 이것이 플레어”라고 설명했다. 플레어 현상은 에너지를 빛과 열의 형태로 분출한다. 기자가 플레어 현상이 담긴 사진을 가리키며 이 화염이 지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느냐고 묻자 이 연구원은 “이런 화염은 거의 태양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표면으로 다시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플레어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흔히 코로나 질량 방출(Coronal Mass Ejection)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CME는 태양 주위에 희미하게 빛나는 부분인 코로나의 물질이 태양 밖으로 분출되는 현상이다. 플레어보다 어둡지만, 태양의 물질을 지구로 쏘아 보내 영향을 준다. 흔히 말하는 태양폭풍이다.
태양폭풍은 말 그대로 폭풍이다. 평소에도 태양의 상층 대기에서는 전하를 띤 입자, 즉 플라스마가 흘러나오는데, 이를 태양풍이라고 한다. 주로 전자와 양성자, 헬륨으로 이뤄져 있다. 입자의 에너지는 대략 1.5~10keV다. 태양풍이 지구에 도착했을 때의 속도는 초속 400~700km. 매우 빠른 속도지만 이 정도는 미풍이다. 그런데 CME가 일어나면 평소보다 많은 양이 방출되고 속도도 빨라진다. 평소에 불던 바람이 세지면 폭풍이 되듯, 태양풍이 평소보다 세져 태양폭풍이 되는 것이다.
[영화 ‘노잉’의 한 장면. 영화 속에서 지구는 슈퍼플레어의 타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인다.]
피해를 끼치는 방법도 다양해
흔히 태양폭풍이 발생하면 고에너지 입자가 지구를 때려 재난을 일으킨다고 묘사하는데,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태양 활동이 지구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은 복잡하다. 먼저 플레어는 영화와 달리 지구에 물질을 직접 보내지 못한다. 대신 강력한 자외선과 X선을 방출한다.
플레어에서 나오는 강력한 X선이나 자외선은 지구를 둘러싼 전리층에 변화를 일으킨다. 주파수 3~30MHz의 단파가 전리층에 반사되는 성질을 이용해 장거리 통신을 하는데, 전리층의 성질이 바뀌어 전파를 흡수해 버리면 이게 불가능해진다. 바로 ‘델린저 현상’이다. 전리층의 두께가 변하면 인공위성에서 지상으로 신호를 보내는 데 걸리는 시간도 달라진다. 신호가 전달되는 시간으로 위치를 계산하는 GPS에 오차를 일으킨다.
한편, CME가 일으킨 태양폭풍은 지구의 자기권과 충돌해 지자기폭풍을 일으킨다. 이때 지구로 날아오는 물질은 태양풍을 이루는 물질과 성분은 대동소이하다. 태양풍보다는 빠르다고 해도 지구 자기권을 통과해 지상에 도착할 정도로 에너지가 높지는 않다. 그 대신 태양폭풍은 지구의 자기권에 충돌해 에너지를 전달하고 결국 지자기폭풍을 일으킨다.
지자기폭풍이 일어나면 지구 주위에 있는 입자가 에너지를 받아 가속된다. 이때 가속된 입자의 에너지는 1MeV 이상이다. 가속되는 위치는 태양폭풍과 맞닥뜨리는 쪽이 아니라 반대쪽이다. 반대쪽에서 생긴 고에너지 입자는 태양풍과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와 지구 자기장의 자기력선을 따라 극지를 향해 움직인다.
이런 입자는 우주에 있는 사람이나 장비에 해를 끼친다. 인공위성을 뚫고 들어가 반도체를 파괴하고, 우주정거장에 머물고 있는 우주인의 생명을 위협한다. 인체를 뚫고 들어온 고에너지 입자가 염색체를 파괴해 암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행히 고에너지 입자는 대기권에 막혀 지상까지는 오지 못한다. 다만, 고에너지 입자가 지구로 향하는 통로인 극지에서는 상공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고에너지 입자가 대기 중의 원자나 분자와 부딪쳐서 생기는 현상이 바로 오로라다. 극지 항로를 자주 비행하는 비행기 승무원이나 승객은 방사선의 영향이 몸에 쌓일 수 있다.
때로는 태양에서 오는 입자가 직접 지구 자기권을 뚫고 들어온다. CME가 발생할 때 양성자가 아주 높은 에너지로 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10~100MeV인 양성자는 태양폭풍과 달리 지구 자기권을 통과해 인공위성이나 우주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런 현상을 ‘태양 양성자 이벤트’라고 부른다.
고에너지 입자가 도달하지 않는 지상도 완전히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태양폭풍의 에너지 때문에 지구 자기장이 교란되면 유도전류가 생긴다. 전력시스템에 유도전류가 들어와 과전류가 생기면 부품이 고장 나 정전이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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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2013년인가?
그렇다면 왜 2013년을 조심해야 한다는 걸까. 태양의 흑점은 11년을 주기로 수가 많아졌다 적어진다. 태양의 자기장도 11년을 주기로 역
전된다. 태양의 북반구와 남반구는 각각 S극 또는 N극을 띠는데, 11년마다 이게 바뀐다는 뜻이다. 따라서 태양의 흑점과 자기장이 다시 처음 상태로 돌아오는 데 22년이 걸린다. 지난 2010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태양물리학부장인 리처드 피셔 박사는 “11년마다 흑점의 수가, 22년마다 태양 자기장의 에너지가 최고에 달하기 때문에 2013년에 강력한 태양폭풍이 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또 하나의 근거는 지금까지 거쳐온 태양활동 극소기다. 우주환경 예보를 제공하는 (주)에스이랩의 오승준 대표는 “긴 극소기는 강한 극
대기의 전조 현상”이라며 “이번 극소기가 조용하고 길었기 때문에 이
어지는 2013년의 극대기가 강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태양폭풍의 세기를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과학자들 역시 내년에 정말 위험한 태양폭풍이 일어날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호들갑이 무색하게 조용히 지나갈 가능성도 있다. 오 대표는 “당장의 확률보다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현대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첨단 기술을 태양폭풍으로부터 보호하려면 태양 활동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태양폭풍을 감시하고 예보할 수 있는 시스템은 아직 시작 단계다. 우리나라에서는 천문연이 2007년부터 우주환경예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플레어 발생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흑점을 꾸준히 관측한다. 이 연구원은 “현재 적중률은 60~70% 정도”라고 밝혔다. 흑점의 크기, 모양, 자기장에 주로 초점을 맞춰 관측한다.
흑점은 중심에 아주 어두운 부분과 그 주변에 상대적으로 밝은 부분이 있는데, 동그랗고 예쁘게(?) 생긴 흑점은 안정적이다. 반면, 무리지어 있다가 어두운 부분이 서로 합쳐지거나 쪼개지는 흑점, 점점 커지는 흑점은 불안정해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흑점의 자기장이 강할수록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4시간 동안 흑점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예측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김 책임연구원은 “광학, 전파, X선, 지구자기장, 고에너지 입자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태양을 실시간 관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와 예측은 항공사나 인공위성을 운영하는 통신사 등에 제공한다.
최근 천문연은 NASA가 발사한 ‘방사선대 폭풍 관측위성(RBSP)’의 데이터를 받아 공동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RBSP는 지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방사선대인 밴앨런대를 관측하기 위한 위성이다. 밴앨런대는 고도 1000~6만km에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플라스마층이다. 주로 태양풍이나 우주선에서 나온 입자가 있다. 태양폭풍이 생기면 이곳에 고에너지 입자가 생긴다. 따라서 밴앨런대의 환경과 변화를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인공위성이나 우주선, 우주인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 천문연은 RBSP의 자료를 받기 위해 지름 7m의 안테나를 새로 설치했으며, 이 자료를 분석해 태양활동 극대기에 아리랑이나 천리안 같은 우리나라 인공위성을 보호할 계획이다.
이해해야 예측한다
일반인 차원에서 태양폭풍에 대비할 수 있는 일은 북극항로로 가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 것 정도다(과학동아 2012년 9월호 기사 “오로라 뜨는 밤엔 태양풍을 조심하세요” 참조). 전기를 이용하기 전에는 태양폭풍으로 사람이 피해를 봤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건강에 대해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기술 의존도가 높아서 전력 시설이 태양폭풍에 영향을 받는다면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는 등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 태양을 더 잘 이해하고, 태양 활동이 끼칠 영향을 예측해 적절히 대비하는 일은 우리가 받을 피해를 예방할 뿐만 아니라 앞
으로 더 정교한 기술을 쓰게 될 문명을 지키는 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2013년 태양이 지구에 무슨 짓을 할지 유심히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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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태양의 분노
Intro . 지구를 지배하는 절대자, 태양
Part 1 . 2013년, 태양은 과연?
Part 2 . 새끼흑점의 서바이벌
Part 3. 태양의 눈부신 비밀
Part 4. 검은 태양이 유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