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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해온 목조건축의 꽃 공포

사회 신분따라 모양 제각각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공포를 거론한다. 하지만 공포는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목조건축을 이해하는 필수적 요소다. 또한 서양 목조건축과 구분되는 기본 요소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포는 기둥과 보, 그리고 도리가 만나는 부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기둥 위에 작은 재료들을 서로 겹쳐 쌓으면서 그 사이사이 보를 끼워넣고 도리를 받치고 결국은 서까래까지 받치는 것이 공포다. 따라서 공포는 기본적으로 구조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각종 문양을 집어넣고 정교하게 가공함으로써 목조건축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되기도 한다. 또 그 구성방식도 아주 간단하고 기본적인 조합에서부터 복잡하고 화려한 조합까지 다양해 건축물의 용도에 맞게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높은 적용성 때문에 공포는 중국의 한나라 때 처음 만들어진 이후 무려 2천년 동안 계속 사용될 수 있었다.


3차원 연결짓는 화려한 매개자

기둥은 수직으로 서있는 건축재료이며 보와 도리는 수평으로 놓이는 자재다. 보는 건물의 짧은 방향으로 놓이고 도리는 긴 방향으로 놓이기 때문에 보와 도리는 다시 같은 평면상에서 직각을 이룬다. 즉 기둥과 보, 도리는 3차원 좌표의 X, Y, Z축과 같이 놓이고 이 들이 만나는 점에 공포가 사용된다.

가장 간단한 결합방식은 이들을 서로 걸쳐놓고 끈으로 묶는 것이다. 아마도 선사시대의 움집이 이러했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발전하면 기둥 위에 홈을 만들어 보와 도리를 끼워넣는데, 일반적인 살림집에 이 방법을 적용했다. 다만 이렇게 보와 도리를 끼워넣을 홈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둥이 상당히 두꺼워야 하고, 또 기둥이 아무리 두꺼워도 십자 홈을 파냈기 때문에 그 부분이 쉽게 부러지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관청이나 종교건축물과 같은 공적인 성격을 갖는 고급 건축물에는 공포를 사용한다. 공포는 첨차, 주두, 소로라고 하는 세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첨차는 막대기 모양의 길쭉한 목재이고, 주두와 소로는 크기에 차이는 있지만 둘 다 넓적한 받침목 형태다.

조립 순서는 먼저 기둥 위에 주두를 올려놓고 그 위에 첨차를 가로세로 직각 방향으로 겹치면서 쌓아 올려간다. 소로는 첨차를 위아래로 겹쳐 쌓는 중간중간에 쓴다. 이때 보는 첨차가 쌓이는 층에 끼어 들어가기도 하고 첨차가 다 쌓인 맨 위에 올라가기도 한다.

한편 도리는 이들 첨차가 쌓인 제일 위층에 올라간다. 이렇게 해서 기둥과 보, 도리는 공포라고 하는 복합부재를 매개로 서로 연결된다. 공포를 사용하지 않았을 경우와 비교하면 결과적으로 도리가 훨씬 더 높은 곳에 놓이게 되며 이것은 지붕 처마선이 높아지는 효과를 낳는다.
 

1 공포의 조립순서. 기둥 위에 십 자 모양의 주두를 올려놓고  2 그 위에 첨차를 가로세로 직각 방향으로 쌓아 올린다.  3 소로는 첨차를 위아래로 겹쳐 쌓는 중간중간에 끼우며 4 보를 첨차가 쌓이는 틈에 끼워 넣어 공포를 완성한다.



시대상 말해주는 목조건축의 상징

공포는 단순한 형태의 기둥이나 도리 등의 부재에 비해 전후좌우로 튀어나온 형상을 갖기 때문에 의장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것을 주심포식 공포라 하고, 기둥 위에는 물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것을 다포식 공포라고 한다. 또한 주심포식 가운데 특히 첨차의 수를 대폭 줄이고 그 형태를 간략하게 새날개 모양으로 다듬은 것을 익공식 공포라고 한다.

이 세가지 형식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이들의 변형이나 잡종이 드문드문 발견되는 것이 한국의 목조건축이다. 그 형식과 모양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공포는 건축양식에 따른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웃한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 목조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익공식 공포다. 익공식 공포는 아무리 빨라도 조선전기, 즉 16세기에 등장했고, 전국적으로 사용된 때는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다.

전후 복구사업으로 많은 건물이 한꺼번에 지어짐에 따라 익공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과 곧 이은 병자호란의 경험은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줬고, 이런 사회적 맥락과 경제적 결핍 속에서 탄생한 것이 익공식 공포다.

익공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형식으로 재료의 양과 가공하는 노력을 줄이고 구조적, 의장적인 효과는 거의 같게 만드는 경제적인 모델로 평가할 수 있다.

익공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주심포식 건축과 다포식 공포 사이에 의장적인 위계가 있었던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익공이 등장한 이후로는 이전에 사용됐던 주심포식은 더 이상 이용되지 않았고 다만 다포식 공포와 익공이 서로 위계적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절이나 궁궐을 가보면 불전이나 정전과 같이 가장 중요한 건물은 다포식 공포를 가지며, 요사채나 정자와 같은 건물은 익공식 공포를 사용했고, 부속채와 같은 기타 시설은 일반집처럼 만들어 전체가 체계적으로 구성되도록 했다.


우리나라는 주심포식과 다포 식 공포를 혼용해서 썼으 나,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익 공식과 다포식 공포를 위계 적으로 사용했다. 주심포식 공 포의 대표적 예는 부석사 무량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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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전봉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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