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발명품은 정말 전쟁 중에 개발되는 걸까. 어그부츠도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음 등장했다. 호주의 비행기 조종사들이 신발 안에 양털 안감을 대서 신었던 게 어그부츠의 시조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윈드서퍼들이 어그부츠를 신었다. 서핑 뒤 차가워진 발을 녹이기 위해서다. 당시 어그부츠는 양털 두 개를 연결하고 바닥에는 말굽을 댄 간단한 형태였다. 세월이 지나며 점점 신발의 형태를 갖춰 지금은 베이지색은 물론 갈색, 남색, 분홍색도 나왔다.
털, 공기를 품다
앞에서 말했듯 어그부츠의 진가는 신발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어그부츠의 훈훈함을 책임지는 것은 바로 양털. 이 양털이 공기를 품어 체온을 지킨다. 공기는 지구에 있는 물질중 최고의 보온재로,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잡을 때 쓰는 행주보다도 열을 전달하지 못한다. 열전도도가 행주의 10분의 1이다. 어그부츠를 신으면 체온을 지키고 바깥의 차가운 기운을 막는 공기층을 발에 한 겹 두르는 셈이다.
동물의 털이라면 모두 공기를 감싸는 법을 안다. 털의 전략은 간단하다. 공기가 들어 있는 방을 제 몸 안에 만드는 것이다. 털을 현미경으로 보면 안이 텅 비어 있다. 이 구멍을 ‘동공’이라고 부른다. 두껍고 나이가 많은 털일수록 동공이 발달해 있다. 비록 털 한 가닥이 품은 공기의 양은 적지만 이런 털이 수천 수만 가닥 모이면 두툼한 공기층을 만들수 있다. 따라서 코트, 목도리, 귀마개 등 털이 달린 것이면 뭐든 따뜻한 것이다. 심지어 묶었던 머리를 풀어 목덜미를 덮는 것만으로도 체온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털은 자기들끼리 얽혀서도 공기가 들어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동물의 털을 가지런히 펼친 후 비비꼬아 만든 실에도 이 공간은 존재한다. 실의 중앙은 텅 비어 있는데, 털의 동공보다 훨씬 크다. 구멍의 이름은 ‘중공’. 크기가 큰만큼 털 한 가닥보다 훨씬 많은 공기를 가둘 수 있다. 실은 더 따뜻한 털인 셈이다. 동물의 털만 실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름과 길이의 비가 1:1000 이상인 길고 가느다란 것이라면 뭐든 실이 될 수 있다. 여기에 겉모습까지 동물의 털을 닮아 거칠다면 실을 만들기는 더 쉬워진다. 큰 마찰력은 실이 다시 풀어지지 않게 도와준다. 사람들은 다른 원료로 실을 만들 때도 중공을 잊지 않았다. 보통 나일론으로 실을 만드는데 여기 들어 있는 중공의 크기는 실 부피의 10~70%를 차지한다. 나일론 중공에도 공기가 들어 있어 동물의 털만큼 따뜻하다.
꼬불꼬불한 털이 더 따뜻해
모양도 공기를 담는 데 영향을 미친다. 양털처럼 꼬불꼬불한 털을 뭉치거나 직물을 짜면 더 많은 공기를 품을 수 있다. 생머리보다 파마머리를 땋았을 때 빈 공간이 많이 생겨 머리 다발이 두툼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양털처럼 꼬불꼬불한 인공 털을 제작해보기로 했다. 우선 양털의 구조를 관찰했다. 양털은 성질이 다른 두가지 섬유로 구성돼 있다. 한 섬유가 다른 섬유보다 수분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팽창한다. 팽창한 섬유가 양털의 밖으로 나와 양털은 나선으로 돌돌말린 모양이 된다. 사람들은 이 양털을 그대로 흉내냈다. 수축도가 다른 두 나일론 섬유를 꼬아 실을 만들었다. 한쪽이 더 많이 팽창하기 때문에 구불구불한 모양이 만들어졌다.
그 외에도 미용실에서 열파마를 할 때처럼 실을 짠 후 열로 모양을 잡아 고정하는 방법도 개발했다. 또 실에 바람을 반대로 쐬어 거칠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실로 직물을 짜면 더욱 많은 공기를 품을 수 있다.
이 털의 이름은 ‘다운’. 오리의 앞가슴 깃털 속에 들어 있는 솜털이다. 핵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털이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털끝은 잔가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운을 뭉쳐 놓으면 다운 사이사이에 미세한 구조를 만들게 된다.
다운은 자체의 모양을 유지할 때 공기를 가장 많이 품기 때문에 다운으로 실을 만들지는 않는다. 다운 그대로 점퍼 안에 넣는다. 오리 한 마리에서 나오는 다운은 20g 정도. 보통 오리털 점퍼 하나를 만들려면 다운이 220~250g 필요하다. 점퍼 하나를 만드는 데 오리를 12~14마리 잡아야 하는 것이다. 오리의 수를 줄이기 위해 깃털과 솜털에서 떨어진 잔털을 섞어 쓰기도 한다.
오리 대신 거위를 쓰는 경우도 있다. 거위는 오리보다 몸집이 크기 때문에 더 많은 다운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가지털이 달리는 마디와 마디 사이가 오리털의 2배 정도로 길다. 그만큼 공기가 들어갈 공간이 많아 오리털보다 따뜻하다.
털도 다이어트 한다
원래 사람들은 점퍼나 이불 안에도 양털을 넣어 썼다. 가늘고 긴 포유류의 털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새의 털에 눈을 돌린 건 우연한 발견에서다. 북유럽에 사는 ‘아이더 오리’는 알을 낳으면 자신의 솜털을 뽑아 둥지를 만든다. 솜털은 알을 따뜻하게 품어 무사히 부화하도록 도와준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오리의 둥지에서 나온 털을 모아 옷 안에 넣기 시작했다. 오리털은 따뜻하면서도 가벼워 특히 산악 장비와 스키복에 많이 이용됐다.
다운은 가닥이 가늘수록 공기가 들어갈 공간을 더 많이 만든다. 표면적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두꺼운 털이 더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솜을 만들 때는 오히려 가늘수록 따뜻하다.
이제 사람들은 털을 가늘게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실 한 가닥을 다시 쪼개는 방법으로 ‘극세사’라는 실을 만들었다. 굵기가 머리카락의 100분의 1 밖에 되지 않는다(지름 0.012mm 이하). 극세사를 뭉치면 오리털이나 거위털을 뭉쳤을 때보다 더 많은 미세구조를 만든다. 극세사 솜을 넣은 이불이나 베개는 다운으로 만든 것보다 1.5배 더 따뜻하다.
실을 쪼개는 기술은 점점 발달했다. 지금은 실 하나를 36가닥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나온 극세사는 1g 안에 무수히 많은 수가 들어 있다. 이 속의 극세사를 모두 이으면 길이가 무려 9000km나 된다. 지구의 반지름보다도 길다. 앞으로는 실 1g으로 지구와 달을 잇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인류가 얼마나 더 가느다란 털을 만들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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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동물의 털, 인간의 털
Part 1. 털, 동물은 입고 인간은 벗다
Part 2. 털 벗은 인간, 다시 털을 만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