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한국의 도로망. 도로계획의 실패는 정체와 혼잡을 가중시키고 있다.
자동차와 도로. 이들의 관계는 바늘과 실처럼 긴밀하다. 대체로 이들은 서로 보완적이나 때로는 상대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미치기도 한다. 도로가 늘어남과 동시에 자동차의 소통이 좋아졌다면 전자의 예고, 도로의 파손으로 자동차의 사고를 유발했다면 후자의 예가 될 것이다.
「자동차의 과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에 앞서 필자는 자동차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도로의 상황부터 살펴 보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믿는다.
수용한계는 있게 마련
잘 알다시피 도로에는 수용한계가 있다. 마치 그릇처럼 저마다 다른 용량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차선 하나에 승용차가 70~80대(1km당) 들어서면 제 아무리 넓은 도로라 할지라도 '용량초과'가 되는 것은 뻔한 이치다.
더욱이 커브길이거나 경사길일 경우에는 용량이 더욱 줄어든다. 쭉 뻗은 직선로 끝에 커브길이 있으면 예외없이 차가 밀리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용량이 줄어 들었기 때문이다.
교차로에서는 도로의 용량이 절반이하로 떨어진다. 교차로는 두 도로가 연결된 곳이므로 일반 도로보다 2~3배의 용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럴수 없다.
도로의 용량부족현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교차로에서는 신호등을 통해 질서가 유지된다. 신호등은 한 방향 또는 서로 충돌의 위험이 없는 두 방향에 대해 동시에 '통행권'을 준다. 두 길이 서로 마주치는 십자로에서는 여덟 방향으로의 통행권이 가능하다. 이 중에서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없는 네가지의 신호를 줄 수 있다.
따라서 내 차가 진행하려는 방향은 이 네가지중의 하나가 된다. 네번에 한번 꼴로 '나'의 통행권이 주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차로에서는 아무리 넓은 도로라 할지라도 도로의 용량이 4분의 1로 줄어든다.
좌회전 따로 직진 따로 주는 분리방식보다는 한 방향의 좌회전과 직진을 동시에 주는 '동시신호'인 경우에 소통상황이 약간 좋아진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황신호시간과 출발지연시간이 생기는데 이것이 이른바 '손실시간'이다. 원칙적으로 이 4~5초 동안은 차량이 절대 통행할 수 없는 시간이다.
손실시간이 계속 누적된다고 생각해 보자. 신호가 두번 바뀌면 두번, 네번 바뀌면 네번의 손실시간이 예외없이 발생한다. 가령 주기시간 1백20초를 사용하는 경우 20초 정도가 차량이 통과하지 못하는 낭비시간이 된다. 따라서 되도록 좌회전을 교대로 열어서 신호의 회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 일방통행이 되면 신호가 2종으로 감소돼 최소의 '손실시간'이 되므로 최대의 교통량을 소통시킬 수 있다.
또 도로의 블럭 사이가 짧으면 좌회전을 전면 폐쇄할 수 있으므로 원활한 교통소통에 도움을 준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한 블럭 사이의 거리는 1백50m 내외에 불과하다. 이렇게 짧은 블럭을 끼고 돌면 좌회전 효과를 쉽게 얻을 수 있으므로 '좌회전폐쇄'가 불평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도로요건은 좌회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서울의 4대문 안에서 한 블럭 사이의 거리가 가장 짧은 곳이 4백50m 정도니…. 강남 쪽으로 나가면 간격은 더 벌어진다. 8백m는 보통이고 1km가 넘는 곳도 수두룩하다. 따라서 거의 모든 교차로에서 좌회전 신호를 주지 않으면 좌회전 방향으로 가는 것이 극히 불편한 실정이다.
또 우리의 도로중에는 유일하게 그 길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교통량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보여주는 데가 많다. 설령 길이 넓다 할지라도 그런 곳의 교통은 혼잡스러울 수 밖에 없다. 도로율도 덩달아 크게 낮아지기 마련이다. 요컨대 도시계획을 실패하게 되면 신호등의 운용에까지 영향을 미쳐 많은 제약을 받게 한다.
어디 자동차 뿐인가. 보행자도 불편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길을 8차선 이상으로 넓게 건설했기 때문에 도로횡단에 애를 먹는다.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또 차량의 속도가 높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과 치명도가 높아진다. 이런 안전문제 때문에 블럭 사이에는 보행자 횡단 전용 신호등이 설치된다. 이것은 다시 교통소통의 장애가 된다. 결국 문제점들이 꼬리를 물고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교차로마다 대기행렬이 장사진을 친다. 마침내 '통행권'을 얻어 낸 몇대가 통과하고 나면 곧 신호가 끊어져 버린다. 좀 더 오래 청신호를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한쪽이 청신호를 무한정 길게 늘리면 다른 방향은 그만큼 대기시간이 늘어난다. 대기행렬도 계속해서 길어진다. 그뿐 아니다. 횡단보도를 이용하는 보행자도 장시간 기다리게 된다.
어느 방향에나 공평하게 시간을 할애해 주려면 차선수 수요교통량 등을 감안해 최적치가 얼마인지 과학적으로 계산해야 한다. 이때 참고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신호를 받기 위해 기다린 지체시간이 우선 고려돼야 할 것이다. 또 차량행렬의 길이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특히 장사진이 계속 이어지면 그 뒤 교차로까지 가로막는 경우가 있으므로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대책이 수립돼야 한다. 그리고 여러개의 교차로를 관통할 때의 정지회수 유류소비량 배기가스의 정도도 고려사항에서 빠뜨릴 수 없다. 교차로의 성격에 따라 이들 기준중에서 무엇을 중요시할까가 달라지게 된다.
바둑판구조와 같이 교차로가 밀집된 도심에서는 너무 긴 신호를 허용할 수 없다. 되도록 지체시간을 최소로 줄이는 전략이 요구되는 것이다.
반면 변두리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간선도로에서는 비교적 긴 신호시간을 채택하고 있다. 이때는 자동차가 한번 신호를 받으면 다음 신호에 걸리지 않고 계속 진행하게 하는데 관심을 두어야 하고, 정지회수가 최소가 되게 해야 한다. 특히 지형지물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좋다. 예컨대 교차로 간격이 길어서 충분히 대기행렬을 수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잠시 머물게 했다가 거기를 지나면 계속 푸른 신호를 받게 한다.
현재 서울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호주기시간은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다르나 1백~1백30초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 가동방식은 두가지다. 교통량이 증가하면 이 주기시간이 자동적으로 늘어나는 적응식과 교통량에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을 사용하는 정주기식이 있는 것이다. 현재 서울의 외곽 간선도로 교차로에서는 주로 적응식을, 도심지에서는 정주기식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부산의 경우 대체로 적응식을 사용하고 있다. 부산은 도로망이 대개 일자형의 길다란 간선도로로 돼 있고 교통량이 월등히 많은 도로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적응식은 차량이 많아지면 자동적으로 신호주기가 길어지므로 일단 차량에게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이 간선도로를 횡단하는 보행자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횡단보도 앞에서 최고 4분까지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기다리다 지친 보행자가 상대적으로 더 자주 무단횡단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부산은 확실히 이로 인한 교통사고의 비율이 다른 도시에 비해 높은 편이다.
요즘에는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신호를 작동시킨다. 그러나 컴퓨터가 기본 제어전략까지 마련해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역이다.
주어진 도로망과 교통여건을 감안해 어떻게 하면 혼잡과 정체를 줄일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풀려면 전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제어하는 지역의 교통성격을 정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교통량은 물론이고 차종, 시간대별 및 요일별 변동상황을 체크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혼잡과 특별한 사고 때문에 일어나는 혼잡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혼잡·정체상황의 누적통계를 확보하고 있어야 함은 말할 나위 없다. 교통행정이 한발 앞선 미국의 경우 정체·혼잡의 정도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있다. 가장 소통이 잘 되는 A등급부터 최악의 F등급까지 잘 정의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 이런 정량적인 혼잡·정체의 등급규정이 없다. 한 장소에서 한시간 이상 기다리는 것과 10여분 기다리는 것을 구별치 않고 싸잡아 그냥 '정체'라고 부른다.
이제는 혼잡·정체의 정도도 정량적으로 구분돼야 할 시점이라고 믿는다. 그래야만 혼잡 정체를 감소시키는 목표설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정체4를 정체3으로 줄이기 위한 노력이 왜 필요한가가 보다 확실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가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현재 거리에 차량이 가득 찼다'거나 '거리가 주차장처럼 변했다'는 막연한 표현으로 교통상황을 나타낼 시기는 이미 지났다. 도로의 소통상태가 보다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표시돼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