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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똑똑해서 슬픈 베르테르들

최근 서남표 총장이 “해외 우수 대학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며 “MIT(매사추세츠 공대)에 비하면 카이스트 학생들은 공부의 양이 적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실제로 미국 보스턴글로브의 발표에 따르면 MIT에서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10년간 인구 10만명당 10.2명이 자살했다. MIT가 학사운영을 가장 혹독하게 했던 1980년대에는 10만 명당 19명이 자살했다. 같은 기준으로 하버드대는 7.4명, 존스홉킨스 대학은 6.9명이 자살했다.

과연 우수한 학생들이 일반 학생들보다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높을까. 한편에서는 국내 다른 대학에서도 자살하는 학생이 많으며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카이스트’라는 이름 덕(?)에 자살 소식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또 같은 기간 동안 우연히 카이스트 재학생이 여럿 죽은 것이거나, 학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 죽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른편에서는 영재가 일반인보다 정신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실패했을 때 대처하는 능력이 비교적 떨어진다는 것이다.

정신과 종합전문병원인 서울 은평병원의 민성길 원장을 통해 카이스트 학생들의 심리를 살펴봤다.




[카이스트 학부 총학생회는 지난 4월 11일, 학생들의 잇단 자살에 대한 총장의 사과와 무한경쟁 교육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다른 사람 죽음에 감정 이입해 ‘나도 자살’
민성길 원장은 “일정 기간 동안 한 집단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연달아 나왔기 때문에 베르테르 효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베르테르 효과란 자기가 닮고 싶어 하던 스타나 주변 사람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따라서 자살하는 현상을 말한다. 독일 작가 괴테가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주인공이 사랑에 실패하고 권총으로 자살하는 데서 끝난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젊은이 세대에서 자살이 급증했다. 그 후 (연쇄적인) 모방 자살 현상에 주인공 베르테르의 이름이 붙었다.

지난 4월 11일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자살한 대학생은 한해 평균 230명이다. 매년 200명 안팎이 자살하는 것에 비해 2008년에는 대학생 자살자 수가 332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 해에 안재환, 최진실 같은 유명 연예인이 자살하는 것을 보고 따라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민성길 원장은 “베르테르 효과는 피암시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암시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 즉 주변의 말이나 분위기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 모방 자살을 할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특히 나이가 어리거나 정신연령이 낮을수록 피암시성이 크다고 한다. 민 원장은 어떤 한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이 “너 왜 우니? 뭘 안 울어, 지금 울고 있고만! 운다, 운다, 그것 봐, 울고 있네”라고 놀리는 상황을 예로 들었다. 보통 어른이라면 그 말을 무시해 “난 울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지만, 어린 아이는 울고 있지 않았는데도 약이 올라 결국은 울음을 터뜨린다. 즉 이번 연쇄 자살사건을 피암시성과 베르테르 효과로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 - 카이스트 재학생이다 -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나친 경쟁과 학업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고 한다 - 나도 카이스트에 다니는데, 학업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힘들다 -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살뿐인가’라고 생각이 이어졌을 수 있다는 얘기다.


[카이스트에서 최근 석 달 동안 학생 4명이 연달아 자살하면서 서남표식 교육개혁이 언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베르테르효과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공감을 ‘동정’과 ‘감정이입’ 두 가지로 설명한다. 불쌍한 사람을 봤을 때 마음은 짠하지만 이성을 되찾는 동정과 달리, 감정이입은 마치 그 사람이 자기자신인양 몰두해 헤쳐 나오기가 어렵다. 민 원장은 “베르테르 효과는 동정보다는 감정이입에 가깝다”며 “인격이 성숙한 사람은 감정을 이입하기 보다는 동정을 느껴 비교적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베르테르 효과보다는 10~20대 자살률이 급등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로 보는 전문가도 있다. 김대진 가톨릭대 의대 정신과교수는 “우리 사회에 지나친 성공 지향주의와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게 문제”라며 “경쟁에서 밀린 학생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패배감 모르는 영재는 정신적으로 가난
그렇다면 영재들이 일반인보다 정신적으로 나약하다고 볼 수 있을까. 종종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정신이 나약하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지 않아 감정이 쉽게 요동치는 것을 말한다. 민 원장은 “실패를 많이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크게 실패했을 때 밀려드는 패배감, 실망감, 자괴감,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등을 이겨내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부정적인 감정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설명했다. 사람이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처음 시도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처음 느끼는 감정도 그냥 무시해야 할지, 이것에 집중해야 할지,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조절하기가 어렵다.

처음으로 하위권인 성적표를 받았을 때 느껴지는 절망감과 무력감, 미래에 대한 불안감, 부모님께 드릴 실망감,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드는 수치심 등을 이겨내는 것도 ‘정신적인 능력’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실패와 부정적인 감정을 수 차례 겪어왔기 때문에 다른 즐거운 것으로 기분 전환을 하거나 앞으로 더 잘하면 된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실패에 무딘 영재들은 첫 실패를 이겨내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고생하지 않고 자란 사람, 별다른 어려
움 없이 승승장구 해온 사업가 등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이야기를 카이스트 재학생들도 토로했다. 산업및시스템공학과 서지인씨는 “1학년 때 난생 처음 받아보는 ‘안 좋은 성적’에 무척 당황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 씨는 “당시는 많이 힘들었지만 결국 스스로 이겨냈고, 지금은 오히려 한계에 부딪쳤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깨쳤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 여행 중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나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1파트 참조).

서지인 씨의 말은 전문가가 영재들에게 또는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내용과 통한다. 민 원장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성적이 떨어지는 것 말고도 절망적인 일이 무수히 많다. 사람마다 취업이나 사업, 사랑에 실패할 수도 있고, 남들이 보기에 대단한 실패가 아닌 일도 본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보면서 다양한 감정을 겪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즐거운 일이나 힘든 일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다. 민 원장은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칭찬만 들을 게 아니라 혼도 나고 잔소리도 많이 들어야 정신적으로 튼튼하게 자란다, 즉 인격이 성숙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카이스트에서 재학생 4명이 연달아 자살한 이유도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대로 학교 정책 때문이 아닌 인격의 성숙도를 들었다.

그는 “직접적인 경험이 부족하다면 간접적인 경험을 풍부하게 가지라”고 조언했다. 서 씨처럼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나거나 시, 소설, 영화, 연극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볼 수 있다.


[서남표 총장은 지난 4월 8일 학생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앞으로 소통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대학 신입생은 ‘걸음마’부터 가르쳐야
카이스트 재학생들은 사회와 대학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에 대한 의견도 내놨다. 화학과 김성윤 씨는 “교내에 상담 전문가나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있다는 것을 막연히 알고 있지만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잘 모르는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생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생명과학과 박건우 씨는 “캐나다 워털루대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했는데 상담 센터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활용하는지 알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면서 “우리나라 대학과 달리 즐겁고 바르게 학교생활을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모습에 감동 받았다”고 말했다.

전문가의 생각도 비슷했다. 민성길 원장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이 신입생에게도 대학생활을 하는 법을 차근차근 알려줘야 합니다. 먹고 살기가 무척 힘들었던 과거에는 고등학생들이 일찍 철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집집마다 자녀수도 많지 않고 생활수준도 좋아져서 대학생이 돼도 ‘어린’ 사람이 많습니다. 예전과 비교해 요즘 애들은 패배감을 견디지 못한다고 비판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1학년 때는 경쟁이 덜한 교양과목 위주로 수업을 편성해 스트레스를 줄이고, 청소년기 말미를 잘 보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학교 1~2학년 때 교우 관계를 통해 우정을 기르고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쉽게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학생 4명이 연달아 자살한 사건은 비단 카이스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절망감을 이겨내지 못할 만큼 나약했더라도, 궁지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에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이 크다. 한명 한명 모두 귀중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우수한 인재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Intro. 누가 영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Part 1. 대한민국 영재들이 사는 법
Part 2. 똑똑해서 슬픈 베르테르들

 

201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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