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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산림보호 정책, 금표와 봉표

일제의 남벌로 70%이상 벌거벗어

일제가 이 강산에서 자행한 수많은 수탈행위를 산림이라고 피해갈 수 없었다. 7억㎥에 달하던 금세기 초의 한반도 산림 총축적이 해방 직전에는 약 2억㎥로 줄어든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제의 산림 수탈이 얼마나 극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이 베어낸 약 5억㎥의 벌채량을 식민지 기간 전체로 나누어보면 매년 1천4백만㎥에 해당한다. 이것은 산업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난 오늘날 국내에서 한 해 필요한 목재 총수요량의 1.5배에 달하는 양이다.

일제는 우리 숲을 수탈하기 위해서 '조선임정 전무론'(朝鮮林政 全無論), 즉 "조선에는 나무와 관련된 정책이 아예 없었다"라는 논리를 조작해냈다. 일제가 조선의 임업정책 부재를 강조한 이유는 근대 임업을 도입한다는 핑계로 전국에 걸쳐 강제로 임야 조사를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조사는 소유구분이 불분명한 마을 소유의 공유림을 국유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렇게 국유화한 산림에서 합법의 탈을 쓰고 목재를 약탈하려는 숨은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일제의 주장처럼 조선시대에는 우리 숲을 지키고 육성하기 위한 적절한 산림정책이 없었던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최근들어 일제가 퍼트린 식민사관인 '조선임정 전무론'이 조작된 것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 숲을 수탈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왕실에 봉납할 산삼을 길러낸 가리왕산의 천연 활엽수림


금산은 오늘날의 그린벨트

새로운 연구 결과의 단초는 치악산 구룡사 입구 언덕의 작은 자연석이 제공했다. 이 자연석에는 음각으로 '황장금표'(黃腸禁標)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네 글자는 구룡사 주변이 조선시대 질 좋은 황장목 소나무를 생산하던 숲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단서다. 아울러 이 명문(銘文)은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숲을 어떻게 관리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몇 안되는 산림유적이기도 하다.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산림의 사적인 소유를 금지하고, 금령(禁令)으로서 산림을 보호했다. 고려의 옛 관리들이 소유했던 사유지를 몰수하고, 권세가와 왕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뗄나무를 베는 장소(柴場)의 개인 소유를 금지시킨 것이다. 이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태조(6년)는 일반 백성의 의식주 생활에 필수적인 산림 이용을 자유스럽게 보장하기 위해 '산림천택여민공지'(山林川澤與民共之)라는 산림에 대한 기본 이념을 정립했다. 이는 '산림과 하천, 바다는 온 나라 사람이 그 이익을 나누어 갖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선정부가 모든 산림을 백성들에게 개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정부는 특정한 산림을 국가의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따로 지정했다. 이렇게 국가에서 지정한 산림을 금산이라 불렀고, 자연 상태에 있는 바위에 글을 새긴 금표(禁標)를 통해 그 경계를 구분했다.

그 첫 대상은 도성 안팎의 산림이었다. '도성내외 사산금산'(都城內外 四山禁山)이라 해서 백악산(북악산), 남산, 인왕산, 타락산(낙산)의 네군데 산의 숲은 오늘날 환경보존림 구실을 하는 대도시 주변의 그린벨트처럼 금산으로 지정됐다.

이들은 산림벌채로 인한 암석과 토양 유실은 산사태와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도성과 궁궐을 이와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또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해 금산에 나무를 심어 도성안팎의 지맥을 보호함으로써 조선 왕조의 번영을 누리려는 숨은 목적도 있었다.
 

산삼 생산지를 알리는 정선군 회동리 가리왕산의 삼산봉표


문헌에 나오는 수백개의 금표는 어디에?

한편 지방의 금산은 특수용도 목적으로 비축된 국유림 구실을 하던 숲으로 외방금산(外方禁山)이라고 불렸다. 조선정부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후 엄청난 양의 재목이 필요했다.

궁성과 정부기관의 건물, 서울의 민가건물, 병선, 조선 등에 소요되는 목재를 공급하기 위해 소나무에 대한 일반 백성의 사사로운 벌채를 금하는 '송목금벌'(松木禁伐)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강가, 바닷가, 섬 등 소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도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이용할 수 없도록 했다.

지방에 소재한 금산의 종류로는 1) 관방금산(關防禁山: 국방 목적으로 보존하는 산림, 조령, 죽령, 추풍령, 동선령, 마천령, 철산 등), 2) 연해금산(沿海禁山: 전국 3백8처의 바닷가에 위치한 소나무 숲. 건축재, 조선재, 관곽재 등을 생산하기 위해 금산으로 지정), 3) 태봉금산(胎封禁山: 임금과 왕후의 포의를 매장한 곳) 등이 있었다.

오늘날 조선정부 초기에 금산으로 지정된 전국 수백 곳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란 쉽지 않다. 단지 문서나 옛지도로 개략적인 금산의 위치를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금산의 경계석인 금표가 산림유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수백년 전 금산으로 지정된 우량한 산림의 과거와 현재를 금표로서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 숲의 역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이 금표지만, 아쉽게도 관방금산이나 외방금산의 금표는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고, 오직 황장금산을 나타내는 금표만이 최근 발견되고 있다.

황장금산은 황장목을 생산하던 황장산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족이 죽으면 몸통 속 부분이 누런 색을 띠고 재질이 좋은 소나무를 관곽재로 사용했고, 이런 소나무를 황장목이라 불렀다. 나라에서는 왕실의 관을 만드는데 필요한 질 좋은 황장목을 원활하게 조달하고, 일반 백성에 의한 도벌을 예방하기 위해서 황장산을 지정했다.

오늘날 황장산을 나타내는 황장금표는 모두 강원도 지방에서 발견된다. 원주시 학곡리 치악산 구룡사 입구와 영월군 두산리와 법흥리 새터마을, 그리고 인제군 한계리 안산 기슭의 황장금표가 그것이다.

특히 한계리 안산 기슭에서 발견된 황장금표에는 황장산의 경계가 서쪽으로 한계령에서부터 금표 동쪽 20리에 걸친 지역(黃腸禁山 自西古寒溪 之東界二十里)임을 함께 새겨 놓고 있다. 금표가 발견된 이들 지역의 소나무 숲은 왕실에 공급하던 질 좋은 소나무 산지임을 증명이나 하듯이 오늘날도 다른 지방의 소나무에 비해 월등하게 좋은 생장을 나타내고 있다.
 

치악산 구룡사 황금장표


밤나무는 조상 숭배의 상징

조선정부는 초기에 목재의 공급을 원활하게 도모하기 위해서 금산제도를 시행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는 인구증가에 따라 산림에 대한 사적인 점유가 늘어나고, 농지개간과 화전이 증대됨에 따라 산림의 관리와 보호에 대한 행정체제를 금산으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다.
결국 문란한 임정을 쇄신하고 관리의 부정을 막는 한편, 조세를 효과적으로 거두기 위해서 산림에 대한 새로운 국가 제도가 절실하게 됐다. 그래서 조선정부는 숙종 때부터 금산제도 대신 봉산(封山)이라는 산림제도를 새롭이 도입했다. 봉산제도는 국가의 다양한 수요에 따라 산림을 기능적으로 보다 세분화시켜 관리, 보호할 수 있는 시책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봉산의 종류는 황장봉산(黃腸封山), 율목봉산(栗木封山), 진목봉산(眞木封山), 향탄봉산(香炭封山)과 삼산봉산((蔘山封山) 등이 있으며, 이렇게 지정된 봉산에는 금산의 금표와 마찬가지로 봉표(封標)를 자연석에 새겨두어 나라에서 지정한 산림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했다.

황장봉산은 황장금산처럼 왕실의 관곽재를 생산하던 소나무 숲을 말한다. 조선 조정은 강원도와 경상도와 전라도의 32읍 60여처에 황장산을 지정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4곳의 황장금표와 최근 울진군 소광리에서 발견된 황장봉산 표석만이 현재까지 알려진 것의 전부다.

울진군 소광리에서 발견된 황장표석에는 오늘날도 사용하는 생달고개와 안일왕산이란 봉산의 경계 지명, 그리고 명길이란 산지기의 이름이 함께 새겨져 있다(黃腸封界 地名生遠峴 安一王山 大里堂城 周回 山直命吉). 또한 소광리 일대의 소나무 숲은 조선시대 황장 소나무 산지란 이름에 걸맞게 우리 소나무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율목봉산은 왕실에 사용되는 위패를 만드는 신주목인 밤나무를 생산하던 숲이다. 조상들이 위패를 밤나무로 만든 이유는 밤종자의 껍데기가 묘목의 뿌리에 오랫동안 붙어 있는 독특한 특성 때문이었다.

조상들은 밤나무가 가진 이러한 특성을 근본(根本, 조상)을 잊어버리지 않는 나무로 생각했고, 그래서 사당이나 묘에 두는 위패를 만들 때는 밤나무로만 만들었다. 밤나무가 바로 조상 숭배의 나무인 셈이다.

작년 전남 구례군 직전리 지리산 피아골에서 처음으로 율목봉표가 발견됐다. 피아골에서 발견된 율목봉표는 연곡사가 영조 21년에 율목봉산으로 지정돼 위패를 만드는 신주목으로 쓰이는 밤나무를 왕가에 봉납했다는 기록과, 대동여지도에 구례 부근에 표기된 율목봉산의 위치가 정확함을 입증해주었다.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장군터의 황장봉표


선박용으로 참나무 보호

진목봉산은 선박건조에 필요한 참나무(眞木)를 생산하던 숲이다. 우리 조상들은 참나무류 (떡갈나무, 상수리나무)를 이용해 전통 목선의 늑골, 용골, 내용골 및 선수재와 키를 만들었다.

또한 목재와 목재의 연결은 쇠못 대신 참나무 못을 사용했다. 진목봉산을 지정한 목적은 조선시대 중요한 운송수단인 선박을 건조하는데 필요한 참나무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지도를 살펴보면 경남 기장이나 고성지방에 진목봉산이 표기돼 있지만, 이전까지는 정확한 지역을 나타내는 봉표가 발견되지 않아 추정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피아골에서 율목봉표와 진목봉표가 함께 새겨진 자연석이 발견되면서 조선시대 선박 건조에 필요한 참나무의 생산지를 보다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 자연석에는 '봉표의 위로는 참나무 봉산이고 봉표의 아래는 밤나무 봉산(以上眞木封界 以下栗木界)'임을 알리는 명문이 함께 새겨져 있다.

향탄봉산은 능묘의 제사에 쓰이는 향목과 목탄을 배양하기 위해 나무를 하거나 짐승을 기르는 것을 금한 능 부근의 산이다. 향탄봉산의 흔적은 대구시 동구 용수동 팔공산에서 발견됐다.

앞의 봉산들은 모구 국가에서 필요한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 향나무와 같이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서 지정된 산림인 반면, 삼산봉산은 산림 부산물인 산삼을 얻기 위해 지정된 숲이었다.

삼산봉산임을 알려 주는 봉표는 최근 강원도 정선군 회동리 가리왕산 말목재(馬項峙)의 삼산봉표와 인제군 상남면 미산1리의 삼산봉표 등 모두 두개가 발견됐다.

말목재의 삼산봉표는 궁실에 공납하던 산삼을 채취하는 곳으로, 일반인의 채취를 금하기 위해 자연석에 강릉부 삼산봉표(江陵府 蔘山封標)란 명문과 지명 마항(地名 馬項)이 음각돼 있다.

임업은 다른 산업과 달리 과거의 발자취를 중요시 여긴다. 왜냐하면 생산과 이용에 수백 년이 소요되는 나무나 숲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금표나 봉표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전적류가 아니라 산림 현장에서 직접 찾을 수 있는 산림 이용 흔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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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전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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