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활동한 러시아 태생의 조향사 어네스트 보(Ernest Beaux)는 젊은 시절 러시아북방에서 군복무를 하게 됐다. 몇달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북극의 여름이 되자 꽁꽁 얼었던 강과 호수도 모처럼 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상쾌한 냄새가 호수와 강에서 피어올라 백야의 신비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십수년이 지나도록 그 향기는 그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그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향기를 창조했다. ‘여성을 옷의 굴레에서 해방시킨’ 디자이너 코코 샤넬(Coco Chanel)을 위해서였다. 1921년 이렇게 향수의 대명사 ‘샤넬 5번’이 탄생했다.
사실 냄새를 기억하고 재현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 세상에는 수만, 수십만 가지의 휘발성 분자들이 있다. 그 중에는 별다른 냄새를 가지고 있지 않는 분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각자의 고유한 냄새를 갖고 있다. 우리가 주위에서 맡는 냄새는 대부분 수백가지 냄새분자들의 혼합물이다. 어네스트 보같은 ‘후각의 천재’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냄새의 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어느날 문득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잊은 줄만 알고 있었던 아득한 기억을 순식간에 불러오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느 겨울날 그의 어머니가 내준 따뜻한 차에 ‘마들렌’이란 과자를 담궈 한입 베어 문 순간 강렬한 쾌감을 느끼게 됐다. 그 기쁨은 ‘마들렌’의 향기, 어린 시절 그의 숙모가 내어주곤 했던 바로 그 과자의 향기가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 순간 그의 머리속에 펼쳐진 과거의 기억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는 20세기 최고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집필로 이어졌다.
우리의 다양한 감각(오감)은 서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서로를 방해하기도 한다. 특히 시각의 위력은 대단해서 우리는 맛이나 향을 음미할 때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아 시각 정보를 차단한다. 많은 사람들이 코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거의 써보지도 않은 채 일생을 보낸다. 그러나 후각은 연습을 통해서 현저히 능력이 향상될 수 있는 감각이다. 뛰어난 조향사는 10만가지 냄새를 구분할 수 있고 수천가지 향료를 외울 수 있다고 하다.
시청각 장애자인 헬렌 켈러 여사는 집안에 누가 있는지 냄새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그녀는 저기압으로 땅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에 섞여있는 흙냄새를 맡아 비가 올 것을 미리 알았을 정도였다.사람들은 다양한 색과 소리의 향연을 전혀 모르고 살다 간 그녀에게서 깊은 동정심을 느끼곤 한다.그런데 과연 우리는 세상에 펼쳐진 향기의 풍요로움을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갈까?
"과일의 향기는 나의 남쪽 고향,복숭아 과수원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로 나를 보낸다.냄새에 대해 생각만 해도 내 코는 지나간 여름과 무르익는 들판의 달콤한 기억을 일깨우는 향기로 가득 찬다."주위의 걱정스런 시선을 받으며 복숭아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어린 헬렌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