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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영재는 영원한 영재?

영재 씨앗 키워 인재 명목 만든다

“나는 어린 나이에 사회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 획일화된 사고와 정형화된 교육을 고집하는 유치원과 학교, 재미와 화제거리만을 좇는 매스컴으로부터 겪은 혼란과 갈등을 한동안 떨쳐내지 못했다. 이 사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을까?”

만 5세에 ‘창의성이 뛰어난 영재’라는 평가와 함께 한때 매스컴을 가득 메웠던 A 씨의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다. 일찌감치 극심한 정서 혼란을 겪었던 탓인지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사람은 왜 사는 거예요’ ‘정신과에는 머리가 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것은 아니죠? 상담 좀 받아보면 좋겠어요’라는 질문을 던져 부모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조기에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영재성은 소멸한다고 지적한다.


영재성은 사라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신동, 천재, 영재라고 불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린이들에게 관심이 많다. 특히 어릴수록 사람들의 호기심은 증폭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어린이들은 일시적인 호기심과 부러움의 대상일 뿐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진다.

과학기술부에서 진행하는 ‘과거 신동 추적 연구’의 책임자인 경원대 김명환 교수는 “그동안 매스컴에 영재로 노출된 30~40명의 사람들과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며 “그들은 한결같이 영재성이 세상에 드러난 뒤에도 제대로 된 교육을 지원받지 못한 점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그동안 영재라고 하면 교육의 도움 없이 저절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 문제”라며 “영재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전환이 시급하다”고 꼬집는다. 인천대 교육대학원 한기순 교수도 “영재성을 타고난 어린이라 해도 조기에 적절한 교육을 제공받지 못하면 영재성이 소멸한다”면서 가능성이 무한히 잠재된 유아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명한 신경심리학자 머라이언 다이아몬드와 자넷 홉슨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뇌성장은 만 6세 이전에 집중돼 있다. 러시아 영재교육 전문가 쿠스네토바는 98% 이상의 어린이들이 다양한 형태의 창의적 재능을 타고난 것으로 보이지만 7살이 되면 37%, 8살이 되면 17% 등으로 연령이 더해감에 창의적 재능이 감소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유아는 영재교육에서 관심의 사각지대다. 현재 영재교육은 주로 초등학교 4학년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한 공식적인 영재교육 기관은 거의 전무하다.

따라서 최근 유아 영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의 확대와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가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초중고 시기의 영재들보다 유아 영재의 판별이 어렵고 정형화된 교육방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어른들의 직무유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재성을 타고난 어린이를 영원한 영재로 키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딱히 몇 가지를 꼽긴 힘들지만 영재교육 전문가들이 보고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해법을 제시한다. 단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임을 밝혀둔다.
 

다양한 놀이 기구를 갖고 놀며 창의성을 키우는 어린이들.


사례1_조금 다르다고 문제가 되나요

지성이는 사물의 원리나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과학책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런데 유치원에 가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유치원 교사는 지성이가 친구들과 적응을 하지 못하고 유치원 생활을 재미없어 한다고 털어놨다. 원인은 지성이의 관심사와 친구들의 관심사가 너무 다르다는 데에 있었다. 친구들은 카드, 만화 캐릭터 등에 관심을 보인 반면, 지성이는 과학책과 과학 교구에 집중했다.

인간발달복지연구소 김경진 소장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는 모범생을 영재로 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울증을 보이거나 공격적이고 돌출된 행동을 보이는 어린이 중 5~10%가 영재로 밝혀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지성이 엄마는 수소문해 시범적으로 대학부설 과학영재교육원의 프로그램을 받게 했다. 주 1~2회지만 서로 관심사가 통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자 지성이는 유치원 생활에서도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지성이 엄마는 지성이의 답답한 마음을 이제야 풀어준 것 같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국교육개발원 학교혁신연구실 조석희 박사는 “영재성을 분출할 기회가 없다면 다른 부분에서도 심각한 부적응이 유발된다”며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쏟아낼 만한 도전적인 과제를 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김종득 KAIST 과학영재교육원 원장은 호기심을 유발하는 영재교육의 필요성에 동의하면서도 가능한 학교교육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01 호기심은 모든 교육의 출발점이다. 02 영재성을 분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제공돼야만 어린이들의 정서 혼란을 줄일 수 있다.


사례2_관심이 깊어지면 재능도 커져요

수형이는 첫돌을 지나자 글씨에 관심이 많아져 집에 있는 물건이나 간판에 쓰인 글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읽어달라곤 했다. 3세가 넘어서는 저녁이 되어 ‘햇님이 져서 집으로 가서 코 잔다’는 아빠의 설명에 대해 햇님 집은 어디인지, 어떨 때는 아파트가 집이고, 어떨 때는 산이 집인지 묻기 시작했다.

올해로 채 5세가 안 된 수형이는 초등학생들 수준의 과학책을 탐독하면서 과학원리와 현상들을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특히 요즘에는 신체 내부 기관의 구조와 각 기관의 역할을 익히고, 이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아기는 재능 발달의 민감기이므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기순 교수는 “유아 영재는 성취물이나 산출물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재능은 고정적이지 않고 다른 분야로 전이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수형이의 경우도 처음에는 언어에 집중했지만 과학으로 관심 분야가 바뀌었다.

조석희 박사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다양한 체험학습 기회를 제공하다가 그 이후부터 입시위주의 교육을 시키는 부모들이 많다”며 “꾸준히 관찰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해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계발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사례3_잘 할수록 더 잘하게 해줘요

현재 초등학교 2학년인 지윤이는 수학 미적분 문제를 술술 풀어낼 정도로 높은 수학재능을 보이고 있다. 고2 언니의 수학 문제를 거뜬히 풀어주기도 하며 독특한 문제해결력으로 사람들의 탄성을 불러일으켰다. 지윤이의 모든 관심은 수학에 쏠려 있다. ‘수학문제가 안 풀릴 때’가 인생에서 가장 슬플 때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윤이는 어려서부터 숫자에 관심이 많았다. ‘오늘은 100% 중에 기쁨이 95%구요. 5%는 그저 그래요’ 라며 수를 이용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부모는 지윤이의 수학적 능력을 발견하고 이를 키워줄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제공했다. 예를 들면 집에서도 카드게임, 미로찾기, 시장놀이 등을 통해 수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영재교육 전문가들은 특별한 능력을 보이거나 잠재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분야를 빨리 파악해 발굴시켜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단순한 지식습득을 넘어 관심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어떤 경험이 필요한지 미리 안내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덧붙인다.

사례4_언어의 속 깊은 친구가 됐어요

현준이는 추상적인 것에 대해 관심이 높고 개념 형성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어휘량과 어휘 수준이 높았으며, 어른들이 사용하는 어려운 단어들도 척척 이해했다. 예를 들면, 나보다 느린 것을 찾아보라는 질문에 ‘아픈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 ‘손톱이 자라나는 속도’ ‘약한 마음’ 등, ‘나보다 빠른 것’을 찾아보라는 질문에 ‘높은 생각,’ ‘빛’ 등의 심적 이미지를 형성화시켜 대답했다.

김종득 교수는 “언어 발달능력이 뛰어난 어린이들의 대부분이 영재로 판명됐다”고 말했다. 말을 잘하거나 글을 잘쓰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를 갖춰야 하는데, 이런 능력이 어린 나이에 완성되면 여러 분야에서 영재성이 발현되고 그 발달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김경진 소장은 정보를 추상화하여 개념을 정확히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부모와 교사가 어린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올해 만 8세로 국내 최연소 대학새잉 된 송유근 군.


그때 그때 달라요

이미 여러 사례에서 드러나듯 유아 영재의 경우 영재성 일차 판별자인 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부모들은 영재 특성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고 적절한 교육환경을 제공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자녀의 영재성 징후를 파악하고 지적 성장에 맞춰 교육을 시키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기술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발벗고 나섰다. 올 초 초등학교 3학년 이하 유아 영재를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과학 신동 프로그램’을 발표한 것. 김재식 과학기술부 과학기술인육성과 과장은 “송유근 군 같은 영재는 기존 시스템에서 수용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영재성이 드러난 어린이에게 양질의 교육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한기순 교수는 “창의적인 인재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하게 됨에 따라 국가적인 영재교육의 필요성에 동의한다”면서도 “어떻게 유아 영재를 판별하고,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이며, 누가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종득 원장은 “유아 영재는 여전히 발달단계에 있으므로 어린이마다 차이가 많이 난다. 따라서 소규모 단위로 어린이들의 특성을 감안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영재교육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컨설턴트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오는 4월 중순경 ‘과학 신동 프로그램’의 바람직한 운영방향에 대한 공청회가 열릴 계획이다. 이번 공청회는 유아 영재교육에 대해 궁금하거나 막막한 학부모, 교사 등이 참여해 맞춤형 영재교육의 틀을 갖추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영재 헌팅 프로젝트

요즘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통하지 않는다. 지난달 19일 서울대는 2006년 신입생 중 강남구 출신은 전체의 7%라는 통계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마포구의 24배에 해당하며, 서울지역 학생의 비율은 전체의 36.6%로 조사됐다. 이런 지역과 계층에 따른 교육격차는 영재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들어 우수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가정형편상 교육의 기회를 놓치는 것을 우려해 영재교육 전문가들이 팔을 걷어부쳤다.

청주교대 과학영재교육원 박종욱 원장은 충북 지역에서 산간 벽지로 통하는 보은, 단양, 괴산군에 소속된 10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영재 헌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교육환경이 열악해 잠재성이 있어도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 학생들을 찾기 위해서다. 또 성남초등학교의 이정아 교사는 학교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높은 논리력을 가진 학생들을 발굴해 지도했다.

박 원장은 “발굴된 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예리한 창의성과 강한 학습의욕을 보임으로써 지도교수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며 “교육 기회가 적은 지역의 영재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재판별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기술부 지원 ‘소외된 과학 영재 교육방안’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조석희 박사도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된 영재들은 작은 자극으로도 교육효과가 놀라울 정도”라며 부모, 교사, 정부에 의한 다양한 발굴 노력과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소외 영재에 대한 지원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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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진행

    김창민
  • 박은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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