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1) 김정결 씨는 회사에 출근하면 책상 정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번 제자리에 놓는다고는 하지만 볼펜과 책, 컵 등이 엉뚱한 데 가 있어 책상을 지저분하게 만든다. 김 씨는 책상에 물건을 정리하는 칸막이를 설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상황 2) 소개팅에 나온 남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남자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여자가 남자의 휴대전화를 보고 먼저 말을 건넨다. “어머, 새로 나온 휴대전화잖아? 언제 사신 거예요? 좋아요?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위 상황에는 모두 ‘물건’이 등장한다. 책상 위를 어지럽히는 물건들과 새로 나온 휴대전화다. 두 상황에서 물건의 주인들은 각기 다른 경험을 한다. 김정결 씨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책상 정리에 넌더리가 나 있고 상황 2의 남자는 새로 산 휴대전화로 어색한 상황을 타계할 좋은 구실을 찾아 안도하고 있다.
두 상황은 모두 ‘경험디자인’과 관련이 있다. 비록 두 상황이 주는 경험의 만족도는 크게 다르지만 말이다. 경험디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 디자인이 사용됐을까.
경험디자인의 두 가지 측면
상황 1에서 김정결 씨의 책상 정리법은 비효율적이다. 물건이 항상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제자리라고 정해 놓은 위치가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오른손잡이인 김 씨에게 펜을 쓰고 나서 오른쪽에 치워 놓는 버릇이 있다면 연필꽂이는 당연히 오른쪽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연필꽂이가 왼쪽에 있다면 금세 책상 위에 볼펜이 나뒹굴 것이다.
이때의 경험디자인은 사용자의 경험을 고려해서 디자인에 적용시킨 형태를 뜻한다. 제품은 사용자가 쉽고 효율적이며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사용자의 경험을
추출하고 해석하기 위해 인간공학과 인지과학, 실험심리학 등이 사용된다. 전통적인 제품디자인과 비슷하지만 대상이 더 넓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용자의 경험을 수집한다.
상황 2의 경험디자인은 근래에 와서 새롭게 나온 개념이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새로 산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고 여자의 환심까지 살 수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휴대전화를 살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휴대전화 덕분에 여자의 환심을 받자 남자는 휴대전화의 가치를 더욱 크게 느끼게 됐다. 이처럼 사용자의 경험을 풍부하고 좋게 만드는 디자인도 최근에는 경험디자인으로 각광받고 있다.

사용 전, 후에도 적용되는 디자인
최근 경제와 산업 전반에서 ‘경험’이라는 키워드가 뜨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파인은 2004년에 한 대중 강연에서 “세계는 이미 경험 경제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에게 맞춤형 제품을 제공했던 서비스 산업이 농산품이나 공산품처럼 가격으로 경쟁하는 일상품이 되자 소비자들은 진정성 있는 새로운 가치 기준을 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진정성 있는 가치가 바로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소비자는 원하는 경험을 충족시켜 줄 제품이나 서비스를 위해서는 비합리적인 소비활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타벅스 커피가 자판기 커피보다 10배가 넘게 비싼데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는 자판기 커피에서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경험 중심의 경제에서는 최첨단 기술로 중무장한 정보 기기조차 외면을 당하곤 한다. 현재의 하드웨어 기술력으로 볼 때 가장 뛰어난 스마트폰은 아이폰이 아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아이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체험하기 위해 기꺼이 ‘한 단계 낮은 제품’을 선택한다. 최첨단 기술이나 아름다운 디자인보다 소비자의 경험을 극대화하는 제품의 가치에 소비자들이 더 끌렸기 때문이다.
경험디자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험디자인은 경험과 결합하면서 사용자에게 풍요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제품 또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더해졌다. 덕분에 경험디자인이 들어간 제품을 쓸수록 사용자의 경험은 생생하고 풍부해져 만족감은 더 높아진다.
그렇다면 경험디자인은 왜 각광받고 있을까. 사용자경험 컨설팅 회사인 씽크유저의 오창영 이사는 “점차 기업들의 기술 수준이 비슷해져 더 이상 기술 중심의 제품디자인으로는 차별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의 반영환 교수는 “기기의 기능이 복잡해지자 정보를 쉽게 알려주고 사용자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경험디자인이 뜨고 있다”고 말했다.


경험디자인의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한성대 미디어콘텐츠학부의 지상현 교수는 “기존의 디자인이 제품의 선택과 사용 시의 경험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경험디자인에서는 선택전에 매장과 광고를 통한 경험, 사용 중의 경험, 사후 서비스나 사용 후의 심리적 경험, 심지어 재구매 시 마음 속에 떠오르는 기억 속의 경험까지 포괄적으로 고려한다”고 설명한다. 기존에는 주로 마케팅에서 다루던 부분이다. 지 교수는 “과거 마케팅은 사용자의 경험이나 인지적인 반응을 고려하지 않고 기술이나 가격으로 경쟁하는 면이 컸다면 경험디자인은 체계적으로 소비자의 경험을 분석하고 조직적으로 대안을 만드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한 예로 핀란드의 가구유통 업체 이케아의 매장 디자인을 들었다. 매장에는 제품이 실제 가정에 배치됐을 때의 느낌을 미리 경험할 수 있도록 ‘작은 가정집’이 꾸며져 있다. 소비자는 인테리어를 보면서 가구가 다른 가구들과 배치했을 때 어떻게 보일지, 사용할 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미리 확인한다. 매장 입구에는 종이로 만든 줄자와연필, 메모지를 갖다놨다. 꼼꼼히 쇼핑하는 소비자를 배려하기 위해서다. 계산대로 가기 전에는 그릇이나 깔개 같은 작은 소품을 전시해 비싼 가구를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지 교수는 “이케아의 매장 디자인은 제품의 가격, 크기, 디자인, 사용성 등을 소비자에게 맞게 구성하고 소비자의 동선, 피로도, 심리적 만족감을 적절히 달래는 공간을 마련해 쇼핑이라는 경험 속에 일어나는 세세한 욕구를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게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오창영 이사는 “현재 거의 모든 국내 대기업들은 사용자경험을 연구하는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NHN, 야후코리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다음커뮤니케이션, 아이리버, 넥슨 등 세계적인 대기업들은 사용자경험을 위한 조직을 가동하고 있다. 지난 1월 말 야후는 인지심리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자 등 인문사회학자 25명을 채용했다. 사용자의 마음을 훔쳐보기 위해서다. 영국은 30년 전부터 디자인 컨설팅 회사가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경험디자인이 연구되고 있다.
기계처럼 인간의 스펙을 구했던 인간공학


경험디자인의 대상은 살아 숨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용자인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양대 산업경영공학과 김정룡 교수는 “산업혁명 이후 기계와 제품,시스템 사이에 상호작용이 생기면서 공학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인간공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실 인간공학의 시작은 다소 불손(?)했다.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가 생기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시간당 몇 개’는 생산성의 지표가 됐다. 공학자와 생리학자들은 인간을 하나의 기계처럼 보고 스펙과 능률을 연구하기시
작했다. 어느 강도로 얼마만큼 일하면 피곤해지는지, 근육의 피로도와 집중력을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인간공학을 ‘노동과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람은 지치지 않는 기계와 달리 얼마 동안 일하고 나면 현저하게 능률이 떨어졌다.
인간공학의 또 다른 줄기는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에서 생겨났다. 미국에서는 조종사의 조작실수 때문에 전투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한두 사람의 사고라면 개인의 실수라고 볼 수 있지만 사고가 잦아지자 당국은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분석 결과 사고 원인은 복잡하고 보기 불편한 조종석 디자인 때문이었다. 조종석에는 수많은 버튼과 레버, 숫자를 표시하는 기판이 달려 있는데, 전투를 벌이거나 본부로부터 정보를 수신하는 등 긴급한 상황에서 조종사의 실수가 잦았다. 인간공학자들은 점차 사람이 실수할 확률을 고려하지 않은 시스템은 디자인이 잘못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지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공학에서 발전한 디자인공학은 사용자에게 안전과 편리, 만족을 주는 제품과 시스템을 설계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가능하면 한 번에 딱 보고 기능을 알 수있는 디자인을 제작한다. 복사기는 워밍업이 끝나면 상황을 알려주는 계기판이 빨간색에서 녹색으로 바뀐다. 사용자는 경험적으로 복사기를 사용해도 좋겠다고 알아챈다. 복사 버튼이 녹색인 것도 같은 이치다.
사용자의 경험과 맞지 않게 제품이 디자인되면 웃지 못 할 상황도 펼쳐진다. 1950년대 유나이티드 에어의 여객기 승객들은 에어컨 구멍에 자꾸 편지를 집어넣곤 했다. 에어컨 구멍이 당시 우체통 구멍의 모양과 유사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또 트랜스월드 항공의 승객들 중에는 좌석 머리 위의 화물칸에 아이를 넣어두려는 엄마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해프닝을 거쳐 디자인공학은 ‘인간’을 더욱 주목하게 됐고 마침내 경험디자인까지 탄생하게 됐다.
‘사용자경험’이 만든 강력한 소통의 장
인간공학에서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 경험디자인을 얻는다. 김정룡 교수는 “경험디자인을 설계하는 과정은 이조백자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도자기공은 백자를 빚고 구워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깨뜨려버린다. 그리고 다시 빚어서 굽고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도자기공은 그때마다 진흙의 농도라든지, 유약의 점성, 굽는 온도, 시간 등에 변화를 줘가며 개선안을 찾는다.
인간공학에서도 사용자에게 확인할 변수는 시력이나 근력, 과거 경험, 수행도, 피로도 등으로 정해져 있다. 이 중 몇 개를 선정해 조금씩 변형하고 바람직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경험디자인은 인간공학 외에도 인지심리학, 산업디자인 등에서 개발된 기술을 가져와 인간의 경험을 더욱 깊숙이 끌어내고 있다. ‘경험테크놀로지’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은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났을 때 느끼는 무의식적인 태도나 심리 상태를 분석한다. 세부 학문인 실험심리학과 인지과학에서는 사람의 눈 움직임을 측정하는 도구나 뇌파를 측정하는 장비로 사용자의 반응을 관찰한다.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유럽에서는 정신분석학이나 인류학적 방법론을 이용해 디자인을 개발하기도 한다.
경험디자인에서는 제품을 개발하는 초기부터 디자이너와 공학자, 개발자, 인지과학자가
함께 모여 일을 한다. 오랫동안 따로 발전해온 학문들이 만나다보니 서로의 언어가 달라충돌하기도 한다. 공학자가 사용성 공학을 이야기하면서 방법론을 제시하면 디자이너는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공학자는 디자이너가 말하는 창의성과 미적 감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사용자경험(User eXperience)’, 즉 UX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이런 간극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공학자가 추구하는 사용자경험이나, 인지과학이나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사용자경험이 모두 같은 것이라는 이해가 이뤄진 것이다. 여러 전문가들은 “사용자경험을 통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경험디자인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까. 최근 경험디자인의 주요 연구주제는 사용자가 정보통신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다.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제품과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요즘 UX는 주로 웹이나 소프트웨어, 비즈니스 등 컴퓨터와 관련된 디지털 제품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와 만나는 공간이 곧 제품과 서비스가 되기 때문에 주로 시각과 촉각, 청각 디자인에 집중되는 편이다.

로봇도 연구 대상이다. 디자인이라고 해서 로봇의 생김새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KAIST 산업디자인학과의 김명석 교수는 “외형은 전체 프로세스에서 30%에 불과하다”며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미래 로봇이 어떻게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발전할지 고려해 행동, 콘텐츠, 방법론 등 프로토타입(초기모델)을 연구 한다”고 설명했다. 경험디자인이 로봇개발에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제품 개발자들이 함께 세운 ‘사용자경험’이라는 무대 위에서 한동안 계속 뜨거워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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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험이 세상을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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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측정하는 시대
(상황 2) 소개팅에 나온 남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남자가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여자가 남자의 휴대전화를 보고 먼저 말을 건넨다. “어머, 새로 나온 휴대전화잖아? 언제 사신 거예요? 좋아요?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위 상황에는 모두 ‘물건’이 등장한다. 책상 위를 어지럽히는 물건들과 새로 나온 휴대전화다. 두 상황에서 물건의 주인들은 각기 다른 경험을 한다. 김정결 씨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책상 정리에 넌더리가 나 있고 상황 2의 남자는 새로 산 휴대전화로 어색한 상황을 타계할 좋은 구실을 찾아 안도하고 있다.
두 상황은 모두 ‘경험디자인’과 관련이 있다. 비록 두 상황이 주는 경험의 만족도는 크게 다르지만 말이다. 경험디자인은 무엇이고 어디에 디자인이 사용됐을까.
경험디자인의 두 가지 측면
상황 1에서 김정결 씨의 책상 정리법은 비효율적이다. 물건이 항상 제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제자리라고 정해 놓은 위치가 사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고 설정돼 있기 때문이다. 만일 오른손잡이인 김 씨에게 펜을 쓰고 나서 오른쪽에 치워 놓는 버릇이 있다면 연필꽂이는 당연히 오른쪽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연필꽂이가 왼쪽에 있다면 금세 책상 위에 볼펜이 나뒹굴 것이다.
이때의 경험디자인은 사용자의 경험을 고려해서 디자인에 적용시킨 형태를 뜻한다. 제품은 사용자가 쉽고 효율적이며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사용자의 경험을
추출하고 해석하기 위해 인간공학과 인지과학, 실험심리학 등이 사용된다. 전통적인 제품디자인과 비슷하지만 대상이 더 넓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용자의 경험을 수집한다.
상황 2의 경험디자인은 근래에 와서 새롭게 나온 개념이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새로 산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고 여자의 환심까지 살 수 있었다. 어쩌면 남자는 휴대전화를 살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휴대전화 덕분에 여자의 환심을 받자 남자는 휴대전화의 가치를 더욱 크게 느끼게 됐다. 이처럼 사용자의 경험을 풍부하고 좋게 만드는 디자인도 최근에는 경험디자인으로 각광받고 있다.

사용 전, 후에도 적용되는 디자인
최근 경제와 산업 전반에서 ‘경험’이라는 키워드가 뜨고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파인은 2004년에 한 대중 강연에서 “세계는 이미 경험 경제로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개인에게 맞춤형 제품을 제공했던 서비스 산업이 농산품이나 공산품처럼 가격으로 경쟁하는 일상품이 되자 소비자들은 진정성 있는 새로운 가치 기준을 찾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진정성 있는 가치가 바로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소비자는 원하는 경험을 충족시켜 줄 제품이나 서비스를 위해서는 비합리적인 소비활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타벅스 커피가 자판기 커피보다 10배가 넘게 비싼데도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곳에서는 자판기 커피에서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경험 중심의 경제에서는 최첨단 기술로 중무장한 정보 기기조차 외면을 당하곤 한다. 현재의 하드웨어 기술력으로 볼 때 가장 뛰어난 스마트폰은 아이폰이 아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아이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체험하기 위해 기꺼이 ‘한 단계 낮은 제품’을 선택한다. 최첨단 기술이나 아름다운 디자인보다 소비자의 경험을 극대화하는 제품의 가치에 소비자들이 더 끌렸기 때문이다.
경험디자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험디자인은 경험과 결합하면서 사용자에게 풍요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제품 또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더해졌다. 덕분에 경험디자인이 들어간 제품을 쓸수록 사용자의 경험은 생생하고 풍부해져 만족감은 더 높아진다.
그렇다면 경험디자인은 왜 각광받고 있을까. 사용자경험 컨설팅 회사인 씽크유저의 오창영 이사는 “점차 기업들의 기술 수준이 비슷해져 더 이상 기술 중심의 제품디자인으로는 차별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국민대 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의 반영환 교수는 “기기의 기능이 복잡해지자 정보를 쉽게 알려주고 사용자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경험디자인이 뜨고 있다”고 말했다.


경험디자인의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한성대 미디어콘텐츠학부의 지상현 교수는 “기존의 디자인이 제품의 선택과 사용 시의 경험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경험디자인에서는 선택전에 매장과 광고를 통한 경험, 사용 중의 경험, 사후 서비스나 사용 후의 심리적 경험, 심지어 재구매 시 마음 속에 떠오르는 기억 속의 경험까지 포괄적으로 고려한다”고 설명한다. 기존에는 주로 마케팅에서 다루던 부분이다. 지 교수는 “과거 마케팅은 사용자의 경험이나 인지적인 반응을 고려하지 않고 기술이나 가격으로 경쟁하는 면이 컸다면 경험디자인은 체계적으로 소비자의 경험을 분석하고 조직적으로 대안을 만드는 점이 다르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한 예로 핀란드의 가구유통 업체 이케아의 매장 디자인을 들었다. 매장에는 제품이 실제 가정에 배치됐을 때의 느낌을 미리 경험할 수 있도록 ‘작은 가정집’이 꾸며져 있다. 소비자는 인테리어를 보면서 가구가 다른 가구들과 배치했을 때 어떻게 보일지, 사용할 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미리 확인한다. 매장 입구에는 종이로 만든 줄자와연필, 메모지를 갖다놨다. 꼼꼼히 쇼핑하는 소비자를 배려하기 위해서다. 계산대로 가기 전에는 그릇이나 깔개 같은 작은 소품을 전시해 비싼 가구를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지 교수는 “이케아의 매장 디자인은 제품의 가격, 크기, 디자인, 사용성 등을 소비자에게 맞게 구성하고 소비자의 동선, 피로도, 심리적 만족감을 적절히 달래는 공간을 마련해 쇼핑이라는 경험 속에 일어나는 세세한 욕구를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게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오창영 이사는 “현재 거의 모든 국내 대기업들은 사용자경험을 연구하는 조직을 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NHN, 야후코리아, 한국마이크로소프트, 다음커뮤니케이션, 아이리버, 넥슨 등 세계적인 대기업들은 사용자경험을 위한 조직을 가동하고 있다. 지난 1월 말 야후는 인지심리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자 등 인문사회학자 25명을 채용했다. 사용자의 마음을 훔쳐보기 위해서다. 영국은 30년 전부터 디자인 컨설팅 회사가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경험디자인이 연구되고 있다.
기계처럼 인간의 스펙을 구했던 인간공학


경험디자인의 대상은 살아 숨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용자인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양대 산업경영공학과 김정룡 교수는 “산업혁명 이후 기계와 제품,시스템 사이에 상호작용이 생기면서 공학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인간공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실 인간공학의 시작은 다소 불손(?)했다.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공장에 컨베이어 벨트가 생기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시간당 몇 개’는 생산성의 지표가 됐다. 공학자와 생리학자들은 인간을 하나의 기계처럼 보고 스펙과 능률을 연구하기시
작했다. 어느 강도로 얼마만큼 일하면 피곤해지는지, 근육의 피로도와 집중력을 연구했다. 독일에서는 지금도 인간공학을 ‘노동과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람은 지치지 않는 기계와 달리 얼마 동안 일하고 나면 현저하게 능률이 떨어졌다.
인간공학의 또 다른 줄기는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에서 생겨났다. 미국에서는 조종사의 조작실수 때문에 전투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한두 사람의 사고라면 개인의 실수라고 볼 수 있지만 사고가 잦아지자 당국은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분석 결과 사고 원인은 복잡하고 보기 불편한 조종석 디자인 때문이었다. 조종석에는 수많은 버튼과 레버, 숫자를 표시하는 기판이 달려 있는데, 전투를 벌이거나 본부로부터 정보를 수신하는 등 긴급한 상황에서 조종사의 실수가 잦았다. 인간공학자들은 점차 사람이 실수할 확률을 고려하지 않은 시스템은 디자인이 잘못된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지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공학에서 발전한 디자인공학은 사용자에게 안전과 편리, 만족을 주는 제품과 시스템을 설계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가능하면 한 번에 딱 보고 기능을 알 수있는 디자인을 제작한다. 복사기는 워밍업이 끝나면 상황을 알려주는 계기판이 빨간색에서 녹색으로 바뀐다. 사용자는 경험적으로 복사기를 사용해도 좋겠다고 알아챈다. 복사 버튼이 녹색인 것도 같은 이치다.
사용자의 경험과 맞지 않게 제품이 디자인되면 웃지 못 할 상황도 펼쳐진다. 1950년대 유나이티드 에어의 여객기 승객들은 에어컨 구멍에 자꾸 편지를 집어넣곤 했다. 에어컨 구멍이 당시 우체통 구멍의 모양과 유사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또 트랜스월드 항공의 승객들 중에는 좌석 머리 위의 화물칸에 아이를 넣어두려는 엄마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해프닝을 거쳐 디자인공학은 ‘인간’을 더욱 주목하게 됐고 마침내 경험디자인까지 탄생하게 됐다.
‘사용자경험’이 만든 강력한 소통의 장
인간공학에서는 일정한 방법론에 따라 경험디자인을 얻는다. 김정룡 교수는 “경험디자인을 설계하는 과정은 이조백자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도자기공은 백자를 빚고 구워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깨뜨려버린다. 그리고 다시 빚어서 굽고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도자기공은 그때마다 진흙의 농도라든지, 유약의 점성, 굽는 온도, 시간 등에 변화를 줘가며 개선안을 찾는다.
인간공학에서도 사용자에게 확인할 변수는 시력이나 근력, 과거 경험, 수행도, 피로도 등으로 정해져 있다. 이 중 몇 개를 선정해 조금씩 변형하고 바람직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경험디자인은 인간공학 외에도 인지심리학, 산업디자인 등에서 개발된 기술을 가져와 인간의 경험을 더욱 깊숙이 끌어내고 있다. ‘경험테크놀로지’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지심리학은 사용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났을 때 느끼는 무의식적인 태도나 심리 상태를 분석한다. 세부 학문인 실험심리학과 인지과학에서는 사람의 눈 움직임을 측정하는 도구나 뇌파를 측정하는 장비로 사용자의 반응을 관찰한다. 미국을 비롯해 일본과 유럽에서는 정신분석학이나 인류학적 방법론을 이용해 디자인을 개발하기도 한다.
경험디자인에서는 제품을 개발하는 초기부터 디자이너와 공학자, 개발자, 인지과학자가
함께 모여 일을 한다. 오랫동안 따로 발전해온 학문들이 만나다보니 서로의 언어가 달라충돌하기도 한다. 공학자가 사용성 공학을 이야기하면서 방법론을 제시하면 디자이너는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공학자는 디자이너가 말하는 창의성과 미적 감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사용자경험(User eXperience)’, 즉 UX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이런 간극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공학자가 추구하는 사용자경험이나, 인지과학이나 디자이너가 추구하는 사용자경험이 모두 같은 것이라는 이해가 이뤄진 것이다. 여러 전문가들은 “사용자경험을 통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경험디자인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까. 최근 경험디자인의 주요 연구주제는 사용자가 정보통신사회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다. 인간과 컴퓨터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제품과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요즘 UX는 주로 웹이나 소프트웨어, 비즈니스 등 컴퓨터와 관련된 디지털 제품에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와 만나는 공간이 곧 제품과 서비스가 되기 때문에 주로 시각과 촉각, 청각 디자인에 집중되는 편이다.

로봇도 연구 대상이다. 디자인이라고 해서 로봇의 생김새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KAIST 산업디자인학과의 김명석 교수는 “외형은 전체 프로세스에서 30%에 불과하다”며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미래 로봇이 어떻게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발전할지 고려해 행동, 콘텐츠, 방법론 등 프로토타입(초기모델)을 연구 한다”고 설명했다. 경험디자인이 로봇개발에 하나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제품 개발자들이 함께 세운 ‘사용자경험’이라는 무대 위에서 한동안 계속 뜨거워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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