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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과학글쓰기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이공계인의 필수지만 교육여건·인식은 부족

“이공계 출신인데, 수식만 제대로 알면 되지”라고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 요즘은 누구나 과학글쓰기가 ‘선택이 아닌 필수’란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것과는 별개로 과학글쓰기의 현실은 그다지 밝지 않다. 서울대에서 과학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는 김훈기 교수, 블랙홀과 천문학에 대한 단행본만 20여 권을 펴낸 한국천문연구원 박석재 원장, ‘하리하라’라는 필명으로 과학교양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이은희 칼럼니스트, 25년 동안 과학 기사를 써온 한겨레신문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네 명의 이공계출신 과학글쓰기 달인을 만나 국내 과학글쓰기의 현황을 들어봤다.

과학글쓰기가 뜨는 이유

5월 26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 강의실. 식품영양학과 김창수 씨가 자신의 전공인 ‘유전자조작농산물(GMO) 색소체 형질전환’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막 마쳤다. 발표가 끝나기가 무섭게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코멘트가 쏟아졌다. ‘GMO도 종류가 굉장히 많은데 제목이 구체적이지 않다’, ‘기존 연구와 다른 점이 무엇인지 나타나 있지 않다’, ‘본론의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은 의미 연결이 안 된다’. 학생들은 ‘GMO’ 자체보다 발표 구성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요즘은 과학자 혼자서는 연구를 할 수 없잖아요. 연구비도 지원받고 대중들의 호응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 사람들과의 소통이 필수죠. 그중에서도 글쓰기는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인 동시에,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방식입니다. 글쓰기 소통 능력을 키우기 위해 대학마다 이런 수업을 늘리고 있습니다.”

서울대 기초교육원 김훈기 교수는 공대 학생들과 생활과학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생활 속에서 글쓰기 주제를 찾고 이를 논문으로 완성하는 게 한 학기 커리큘럼이다.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생각을 논문에 더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지를 배운다. 공학교육인증(ABEEK)과 연계된 이 수업은 졸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다.

“글쓰기는 현재 과학계의 큰 흐름입니다. 요즘엔 과학자들이 연구계획서나 실험보고서 외에도 프레젠테이션 자료나 블로그, 트위터에까지 글을 써야 하죠. 그래서 대학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연구소에서도 글쓰기 강의를 열고 있습니다.”

그는 대학뿐만 아니라 한국연구개발인력교육원(KIRD)이라는 기관에서도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2009년부터 1년에 5~6차례 진행하는 이 수업에서는 대덕연구단지 내에 있는 정부출연연구기관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연구 논문부터 대중매체 기고문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을 작성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는 또 전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T)에서 이공계를 졸업한 여성을 대상으로 과학글쓰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과학글쓰기는 학습 도구로도 주목받고 있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4월 23일자에는 ‘과학, 언어, 그리고 글을 읽고 쓰는 능력(Science, Language, and Literacy)’이라는 특집 기사가 실렸다. 글쓰기 능력이 과학을 학습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데이비드 피어슨 박사는 “글을 쓰면 주제에 대해 질문하는 습관이 길러지는데, 이런 습관이 과학의 개념을 더 쉽게 이해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문제점을 도출해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밝혔다.

이는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하리하라의 과학 블로그’ 같은 과학교양 분야 베스트셀러를 탄생시킨 이은희 작가의 생각과도 같다. 이 작가는 과학글쓰기를 과학적인 소재를 끌어와 재밌게 재구성한 칼럼 같은 글을 쓰는 일과 소재뿐만 아니라 내용이나 전개 방식도 논리적으로 구성한 ‘과학적인’ 글을 쓰는 일 두 종류로 분류한다. 이 작가는 “과학적인 글을 쓰는 과정은 논리적인 사고 능력을 향상시킨다”며 “이공계 학생들에게 수
학만큼이나 글쓰기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과학글쓰기의 빛과 어둠


“과학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지원한 국민들에게 연구의 목적이나 과정, 결과를 쉽게 풀
어 전달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천문학 같은 전문 분야는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은데
도 불구하고 다가가기 쉽지 않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글쓰기 노력이 더욱 중요하죠.”

한국천문연구원 박석재 원장은 e메일을 통해 과학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박 원장은 지난해 3월 발간한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를 비롯해 20여 권의 천문학 관련 서적을 펴낸 명실상부한 ‘천문학 전도사’이다.

그의 말처럼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과학글쓰기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있다. 과학글 쓰기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1990년대부터 시작됐다. 특히 2003년 과학기술부 원자력 국장을 지낸 임재춘 영남대 겸임교수가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라는 책을 출간했을때 과학글쓰기는 이미 과학계 화두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내 과학글쓰기를 주도하고 있는 필자들은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 원장,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정재승 KAIST 교수, 이덕환 서강대 교수 등으로 손에 꼽을 정도다. 흥미롭게도 이들 중에서 최재천 교수와 정재승 교수는 ‘과학동아’와의 인연을 계기로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다. 최 교수는 1996년 ‘개미와 인간’이라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하면서 그의 전공인 동물행동학을 재미있게 소개했고, 그 이후로도 ‘개미제국의 발견’,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같은 베스트셀러를 펴냈다. 정 교수는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시네테크’라는 기사를 통해 영화 속 과학이야기를 과학동아 독자들에게 전했다. 정 교수 역시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과학콘서트’, ‘눈먼 시계공’ 같은 책을 출간하며 유명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처럼 과학글쓰기의 중요성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정작 현실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한겨레신문 조홍섭 기자는 “아직까지도 이공계인에게는 실험이나 연구가 글쓰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과학글쓰기 문화가 정착할 수 없다. 외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별도의 과정을 만들어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라는 전문가들을 양성해왔다. 또 퓰리처상이나 영국 왕립학술원 문학상 같은 권위 있는 과학저술상을 통해 과학글쓰기를 장려해 왔다. ‘원더풀 사이언스’를 쓴 나탈리 앤지어나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 같은 유명 작가들도 이러한 사회적 배경이 뒷받침 됐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과학글쓰기를 할 만한 과학자들의 수도 점점 줄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이공계를 기피하고, 또 이공계 중에서도 돈이 되지 않는 기초과학보다는 눈에 보이는 실적을 낼 수 있는 응용과학을 선택하기 때문이죠. 과학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공계 사람들이 글쓰기를 어렵게 느끼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국내 과학글쓰기의 문제점에 대한 조 기자의 진단이다.

한편 김훈기 교수는 “과학글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과학글쓰기를 하려는 움직임은 있으나 정작 과학글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공계인들이 과학글쓰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려면 그들이 어떤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어떤 글을 쓸 때 어려움을 느꼈는지 구체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가르치는 사람이 누구인가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현재는 인문사회학, 국문학, 철학, 언론학, 자연과학 등으로 강사들의 전공이 다양한데, 과연 어떤 분야의 사람이 이공계인들에게 특화된 글쓰기 수업을 잘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또 막상 이공계인들이 과학글쓰기를 한다고 해도 책으로 펴내기에는 출판업계 사정이 좋지 않다. 예전에 비하면 과학 관련 서적이 많아진 편이지만, 요즘 출판되는 책들을 보면 대부분 과학적인 소재를 가져다 쓴 흥미 위주의 교양서이거나, 글쓰기 방법을 다룬 책이다. 진지하다 싶은 전문서는 대부분 인기가 어느 정도 보장된 외국의 베스트셀러를 번역해 들여온 것들뿐이다.

출판업계에서는 이를 당연한 현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이언스북스의 노의성 편집장은 “출판사 역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상업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 교양서나 교육 관련 책 위주로 출판할 수밖에 없다”며 “외국에서도 전문성이 높은 책은 주로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필자들의 진지한 전문서는 설 자리가 없는 셈이다.

“과학글쓰기에 대한 인식 바꿔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과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아낸 글, 과학적인 시선으로 사회적 이슈에 질문을 던지는 글입니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찬성과 반대 양쪽에서 객관적으로 과학적 사실을 전달할 수 있는 건 오직 이공계인들뿐입니다.”

김 교수는 과학글쓰기가 자칫 과학의 신기한 내용을 홍보하는 글로 흘러갈 수 있다고 염려하며 이 같이 말했다.

여기에 대해 조홍섭 기자는 “가장 간단하면서 가장 어려운 해결 방법은 과학글쓰기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글’보다 ‘기술’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 과학책에 담긴 내용보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글을 더 신뢰하는 풍토를 언급하며 이공계인뿐만 아니라 독자나 사회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죠. 사회 인식이 바뀌는 동안 과학글쓰기의 빈자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채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 기자는 과학저널리스트가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과학글쓰기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국내 지질학자들과 함께 ‘살아 있는 한반도’라는 자연사 기획 기사를 1년 넘게 연재 중이다. 그는 “과학저널리스트의 능력이란 전문가들의 말을 듣고서 쉽고 정확하고 빠르게 글로 풀어내는 능력과, ‘과학글쓰기가 왜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까’라며 기존 과학에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라며 “과학동아 같은 대중매체와 과학에 관심 있는 대중들이 그러한 과학저널리스트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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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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