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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를 그리는 햇병아리 SF작가들

컴퓨터 통신으로 만난 공상과학소설 동호인회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예리한 필치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20세기초 영미문단을 살찌운 작가 올더스 헉슬리(A. Huxley). 그는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이 인간성 자체를 부정하는 미래사회를 그린 자신의 소설에 이 역설적인 제목을 붙였다. 이른바 디스토피아(distopia) 소설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때문에 헉슬리를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관계없이 SF(Science Fiction), 즉 공상과학소설가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적지않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공상과학소설이라면 잘해야 어렸을 때 읽은 줄 베르느의 '해저2만리' 정도를 기억해내는 수준인 우리 주변에 바로 그 헉슬리의 소설제목을 문패로 내건 SF동호인 모임이 있다. 헉슬리가 예언한 우울한 미래보다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간성의 고양이 조화되는 낙관적인 내일을 그리려는 이들은 말 그대로의 멋진 신세계를 꿈꾸는 젊은이들.
 

정기모임을 마치고 포즈를 취한 회원들
 

컴퓨터 통신에서 필명 날려

지난 9월에 첫 모임을 시작한 이들은 사실 컴퓨터통신망인 PC서브의 '추리와 SF소설동호회'(이하 '추·공') 회원으로 이미 서로를 알고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멋진 신세계'의 결성은 현재 이 모임의 회원인 박상준씨(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가 '추·공' 7월 모임에 참석해 "SF동호인만의 독자모임을 가져야하지 않겠느냐"고 부추긴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모임의 이름을 SF 매니아(mania)로 붙였다가 최근 회원들의 투표결과 '멋진 신세계'로 개명(改名)했다.

점화가 늦었다 뿐이지 이 모임 안에는 SF에 대한 열정이 단순히 동호인 수준을 넘어서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케텔(KETEL)이나 PC 서브안에서 이미 SF 작가로 필명(筆名)을 날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외국작가의 SF를 번역하거나 창작집을 낸 회원도 있다.

'멋진 신세계'의 유명인사(?)로는 먼저 '아틀란티스 광시곡''우먼 Q'등 SF기근인 국내서점가에 잇달아 자작소설을 내놓고 있는 이성수씨(서울대 전자공학과)를 꼽을 수 있다. 요즘에는 학업에 쫓겨 '멋진 신세계' 출석도 어렵다는 이씨는 과학적 묘사를 중시하는 이른바 하드(hard) SF 경향의 작품을 선호한다.

케텔과 PC서브에 '네메시스의 서'라는 작품을 올리고 있는 임준홍씨(성균관대 토목공학과)도 통신망 안에서는 꽤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 임씨는 SF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깨고자 물질 문명의 발달만이 아닌 인간의 심리적 발전이 가져올 변화된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한다.

SF의 교과서적 작가로 알려진 아서 클라크(A.Clarke)의 '라마와의 랑데뷰'를 최근 번역해 내놓은 박상준씨 역시 중학교시절부터 SF에 빠져 지낸 사람이다. 특히 그는 고(古)서점이나 문화원 도서관 등에 임자를 못 만나 묻혀있는 국내외 SF자료들을 찾아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모임안에서도 '정보통'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 89년에 '내일'이란 이름의 SF동호인을 위한 사설 BBS(Board Bulletin System, 전자게시판)를 만든 최현준씨(성균관대 수학과4년)나 같은해 PC서브에 '추·공'모임을 만들어 계속 회장을 맡고있는 윤태원씨(서울대 섬유공학과)도 SF에 대한 열의나 '멋진 신세계'운영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회원 대부부은 주변으로부터 '책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이며 이공계대학 재학생들이 많다.(그간 모임의 질을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18세이하는 회원으로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최근 대학생 못지않게 SF에 해박한 두명의 고등학생을 회원 만장일치로 명예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학생이라고 해서 '취미생활동호인회'정도로 이 모임을 생각하는 회원은 없다. 장기적으로는 SF작가나 번역가로 활동하겠다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회원 권오상씨(동국대 전산학과 4년)는 "SF를 통해 능동적으로 과학대중화에 기여하려는 것이 멋진 신세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밝힌다.

"이웃 일본에서는 오늘의 과학기술계를 이끌어가는 젊은이들이 바로 우리나라에도 수입·방영됐던 일본만화 '철인 아톰' 시리즈를 보고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세대들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과학적 상상력을 일반인들에게 고취시킨다면 꿈꾸는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권씨의 얘기다.

국내 SF기근으로 활동 어려워

많은 회원들은 SF에 빠지게 된 계기가 어린시절 접했던 한권의 아동용 SF의 감동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SF에 접근하게 되는 가장 쉬운 길은 SF동화나 어린이용 SF만화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용의 SF로 눈을 돌려보면 황무지나 다름없어 국내창작물은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며 번역된 작품들도 SF아닌 추리문고 선반에 꽂혀있기 일쑤다. 이에 대해 박상준씨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나라에 6,70년대에 소개된 SF들은 대개 일본의 가도카와(角川)문고 등 추리소설전문출판사의 책을 해적판으로 통째로 번역해낼 때 그중에 한편씩 끼어 소개된 것들이다. 따라서 SF라기보다는 추리물로 읽혀왔다. 또 국내작품으로는 1965년 한국일보를 통해 발표된 문윤성씨의 '완전사회'를 본격 SF로 꼽을 수 있는데 그 후로는 제대로 맥이 이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자료빈곤은 열의를 가진 회원들에게도 장애가 된다. SF가 발달한 미국의 경우를 예로 보면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SF작가를 초청해 내부시설을 견학시키는 등 전문과학기술자들이 SF를 위한 소재를 제공하거나 과학자들 자신이 SF작가로 활동하는 예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실정에선 이런 도움은 꿈도 꾸기 어렵고 비(非)전문번역인들이 SF를 번역하다보니 'red giant'(적색거성)를 '붉은 거인'으로 'escape velocity'(탈출속도)를 '도망속도'로 옮기는 등 오역도 종종 눈에 띈다.

회원들은 이를두고 "SF가 발전하지 않는 나라는 과학기술선진국이 될 수 없다.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SF황금기와 산업성장기가 일치했다"고 강조한다.

'멋진 신세계'의 사람들이 정의내리는 SF는 무엇인가. 회원들은 누구나 'SF는 이런 것이다'라고 한마디로 영역을 구분하거나 정형화해서 얘기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회원들 내에서도 과학기술적인 묘사를 충실히 해야한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SF니까 소재를 어떤 과학적 기자재로 해야 한다는 유의 강박관념은 고식적인 사고에 불과하고 오히려 미래사회의 삶을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SF의 내용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 G. 오웰의 '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물론 1988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나 최근 국내에서 발표된 복거일씨의 '비명(碑名)을 찾아서', 고원정씨의 '최후의 계엄령'까지도 미래시점의 사회를 총체적으로 예견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SF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SF가 계몽적 성격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그것은 작가가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가공의 이야기(fiction)이지 결코 과학해설서가 아니다. 미국의 저명SF작가인 아시모프(I.Asimov)는 금성탐험이 있기전에 '금성활극'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실제 과학적 탐사 이후 자신의 작품내용 중 잘못된 것이 있다고 판명됐다. 여기에 대해서는 개정판 서문을 통해 미리 독자에게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SF작가가 꿈꾸었던 것이 현실화했을 때 틀린 부분이 발견됐다고 해서 작가의 과학적 상상력마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윤태원씨는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수십년전에 쓰여진 로봇시리즈나 우주여행관련 SF들도 사실여부와는 별개로 당대의 사람들이 그렸던 미래상이나 세계관을 드러내기 때문에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12월에 BBS 개설

이제 겨우 출범 3개월을 넘긴 멋진 신세계의 회원들이 가장 역점을 두고있는 일은 뭐니뭐니해도 회원의 역량을 높이는 것. 제각각 내실있는 SF작가나 번역가, 기획가가 될 수 있어야 양질의 SF보급을 통한 과학대중화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회원들은 2주에 한번씩 작품을 선정해 정례세미나를 갖고있다. 어느 정도 역량이 쌓이면 지금까지는 몇몇 능력있는 회원의 몫이었던 번역이나 SF서적기획 등을 공동작업으로 해나갈 생각이다.

동호회 사무실, 전화 한대없는 지금 상황에서 아직 크게 욕심을 내기는 어렵지만 SF에 관심을 가진 일반대중들을 일궈내는 일도 이들에겐 중요한 과제다. 사람들과 친숙해지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멋진 신세계'가 아직 동인지(紙)등의 대중적인 매체를 갖지 못한 채 컴퓨터통신으로만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 우선 12월초에는 '멋진 신세계'라는 이름의 BBS를 개설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당장에 컴퓨터통신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회원들이 편지로 필요한 정보를 전해주고 있다.(주소 서울시 송파구 잠실본동 우성4차 Apt 105-503 권오상 138-229)

한편 '멋진 신세계'는 무료대관시설을 이용해 걸작SF영화 시사회를 가지는 일도 추진중이다. 현재 거론되는 작품은 화성탐험을 다룬 '듄(Dune)', '2001년 우주의 오디세이'등이다.

90년이후 부쩍 높아진 과학도서출판붐에는 SF도 크게 한몫을 했다. 올해에만도 아시모프의 대작 '파운데이션(Foundation)'시리즈가 번역 소개됐고 내년 초까지는 대여섯개 출판사에서 시리즈물을 포함해 최소한 2,30권의 SF가 번역, 소개될 예정이다. SF가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그간 딱딱한 학교과학교육을 끝으로 과학과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일반인들도 과학적 상상력을 드높일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리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번역 뿐만 아니라 우리 손으로 쓴 양질의 SF도 등장해야할 때. 막 걸음마를 시작한 '멋진 신세게'에 남다른 관심과 기대를 갖게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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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김희철 기자
  • 정은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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