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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가

한국인과 미국인, 공간을 다르게 지각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양이 소리를 ‘야옹’이 라고 말하는데, 영어권에서는 ‘mew(뮤)’라 고 말한다. 그러면 동서양의 고양이는 서로 다 른 소리를 내는 걸까. 아니면 소리는 같지만 듣는 사람이 다른 소리로 지각하는가. 또는 같 은 소리로 들리지만 언어 자체가 다른 표현을 하게 하는가. 이런 궁금증이 언어와 사고의 관 계에 관한 물음이다.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 관한 주장들은 매우 다 양하다.

미국의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언 어와 사고가 서로 독립적이라고 주장했고, 스위스의 동물행동학자인 장 피아제는 사고가 언 어를 선행한다고 말했다. 구소련의 심리학자인 레프 비고츠키는 처음에는 둘이 독립적이지만 발달과정에서 점차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언어와 사고에 대한 충격적인 명제는 미국의 언어 학자 벤자민 워프와 에드워드 샤피어가 주장한, ‘언어가 사고를 결 정한다’는 언어 결정론이다. 이들은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며, 언어 가 다르면 사고도 달라진다는 언어 상대성 가설을 주장했다. 이 가 설을 확장하면 언어가 없으면 사고도 없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언어의 어휘 수가 사고를 결정할까

언어의 최적 단위는 어휘 또는 단어다. 따라서 언어에 따 른 어휘 수의 차이가 언어 결정론에 대한 논쟁을 증 명하는 수단으로 종종 쓰인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농부는 쌀에 대한 어휘가 수십 개에 이르며, 아랍의 목동은 낙타에 관한 어휘 가 수십 개이며, 우리말에도 비에 대한 어휘가 수십 개나 된다고 알려져 있다.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휘 수에 따라 사고가 달라 야 하지 않겠는가. 워프와 샤피어의 언어 결정론에 대한 평가는 색 채 지각이 언어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밝히는 연구에서부터 시작됐다. 색채는 초점색 과 비초점색으로 분류된다. 초점색은 기본색이 라고도 하는데,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대표적 인 색이다. 예를 들어 ‘흰색’ ‘검정’ ‘노랑’ ‘빨강’ ‘파랑’ 등이 초점색이다. 비초점색은 초점색을 제외한 색으로 사용 빈도가 낮은 색이다. 사람 들은 초점색을 더 정확히 기억한다.

인도네시아의 원시부족 다니족은 모든 색을 ‘몰라’와 ‘밀리’라는 두 어휘로 표현한다. 몰라는 주 로 밝고 따뜻한 색이고 밀리는 어둡고 차가운 색이다. 초점색과 비초점색을 구분하기 위한 어휘 수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언어가 색채 지각을 결정한다면, 다니족처럼 빈약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은 색채 지각도 빈약할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엘리너 로쉬는 다니족과 미 국인의 색채 지각을 비교했다.

참가자에게 색을 제시하고 나중에 그 색과 같은 색을 찾도록 했는 데, 다니족과 미국인은 색을 기억하는 정확도에서 차이가 없었다. 또한 다니족에게 초점색과 비 초점색을 보여준 다음 기억하게 했을 때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초점색을 더 정확히 기억했다. 색 채 지각 패턴이 색채 어휘의 세분화 정도와 무관하다는 증거다. 한편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조나단 위나워 교수팀은 영어와 러시아어를 비교했다.

영어의 경우 파란색은 ‘블루(blue)’ 하나지만 러시아어는 밝은 파란색은 ‘골루보이’, 어두운 파란색은 ‘시니이’로 구분해 쓴 다. 따라서 영어책을 러시아어로 번역 할 때 ‘블루’가 나오면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연구자들은 파란색을 밝기에 따 라 20단계로 나눈 뒤 골루보이와 시니 이의 경계를 조사했다. 조사결과 그 경계는 대략 9번째 밝은 색이었다. 그 뒤 한 색을 보여주고 난 다음 두 색을 제시하고 앞에서 본 색을 고르게 했다.

그 결과 러시아인은 뒤의 두 색 모두 골루보이나 시니이에 속할 때(예를 들어 8 번 색을 보여준 뒤 6번 색과 8번 색 가운데 고르는 과제)보다 하나는 골루보이, 다른 하나는 시니이에 속할 때(예를 들어 8번 색을 보여준 뒤 8번 색과 10번 색 가운데 고르는 과제) 더 빨리 선택했다. 반면 영어권 사람들은 차이가 없었다. 이 결과는 언어가 색채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다.

이 연구는 로쉬의 연구 결과와 상반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 여다보면 로쉬의 연구는 색 차이가 뚜렷한 초점 색을 구분하는 과제였던 반면, 위나워 교수팀의 연구는 미묘한 색 차이를 구 분하는 과제였다. 즉 색채를 지각해 구 분하기 애매한 경우에는 언어의 힘이 작용하게 된다. 나아가 언어의 역할은 구체 개념보다는 추상 개념에서 더 강 력한 힘을 보여준다. 언어가 단순히 사물의 지각이나 기억 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넘어서 과 장하거나 왜곡시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기억색 을 지니고 있다. ‘사과 색’, ‘포도 색’ 등의 어휘가 기억색이다.



어떤 붉은 색을 기억할 때 이것을 ‘사과 색’으로 기억하면 나중에 실제 지각된 색보다 더 붉은 색을 봤다고 반응하는 비율이 높 아졌다. 이를 ‘기억색 효 과’라고 부른다. 기억에 저장된 어휘의 심상이 실제 색채의 기억과 사고에 과장된 영 향을 미친다는 증거다. 오래전에 미국 브라운대의 심리학자인 L. 카미카엘은 참가자에게 같은 그림 을 놓고 한 그룹에게는 ‘아령’이라며 보 여주고 다른 그룹에게는 ‘안경’이라며 보여줬다.

그리고 그 그림을 다시 그려 보라고 하자 붙여진 이름의 물체와 유사하게 그림을 왜곡하는 현상을 발견 했다. 또한 미국 워싱턴대 심리학과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와 존 파머 는 두 자동차가 부딪치는 장면을 참가 자에게 보여준 다음 그 장면을 기술 하는 문장에 두 자동차가 ‘접촉했다’ 혹은 ‘충돌했다’라는 동사를 사용했 다. 그런 다음 “깨진 전조등을 봤 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충돌했다’라는 동사를 본 피험 자들이 ‘접촉했다’라는 동사 를 본 피험자들보다 ‘예’라 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언어에 따라 공간을 지 각하는 방식이 달라진 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샌디에이고 주립대 언어학과 최순자 교수는 대상들 사이의 공간 관계를 기술할 때 한국어와 영어가 다른 어휘를 사용한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영어는 ‘put in(넣다)’과 ‘put on(놓다)’으로 대상들 사이의 모든 공간적 관계를 기술하지만 한국어는 공간의 범주를 기술하는 어휘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바구니에 물건을 넣을 때는 ‘넣다’라고 표현하며, 책상 위에 물건을 놓을 때는 ‘놓다’라고 표현한다. 두 표현은 한국어와 영어가 같다. 그런데 반지를 손가락에 ‘넣을’ 때는 영어는 역시 ‘put in’으로 표현하지만 한국어는 ‘넣다’가 아닌 ‘끼다’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한국어는 탁자 위에 물건을 놓을 때는 ‘놓다’라고 하고 벽에 물건을 ‘놓을’ 때는 ‘붙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영어는 둘 모두 ‘put on’이다. 한국어는 공간 어휘의 표현이 영어보다 세분화돼 있다는 증거다. 미국 어린이에 비해서 한국 어린이가 상대적으로 명사보다 동사 습득이 빠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솔교육문화연구원 장유경 원장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어린이는 어휘 300개를 구사할 때 동사와 형용사가 20%를 차지하지만 한국 어린이는 어휘가 200개만 돼도 3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공간 어휘 덕분에 한국인은 연속적인 공간을 어휘 의미에 따라서 자연스레 범주화할 수 있다.

언어도 사고 영향 받아



그렇다면 언어는 모든 사고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가. 언어가 사고에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착시다. 예를 들어 길이가 똑같은 두 선분이 달라 보이는 ‘뮬러-라이어 착시’ 같은 경우는 아무리 두 선분의 길이가 같다고 언어로 정보를 줘도 결코 두 선분이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장 피아제는 사고를 명확하게 하기 전에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진정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어른이 쓰는 ‘더 큰’이란 단어를 듣고 자기도 그 말을 따라할 수 있지만, 더 크다는 비교 개념을 습득하기 전까지는 그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그 단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심리학자 마이클 토마셀로와 제프레이 파라는 아이들의 대상 영속성이 발달하는 시기 동안에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연구했다. 대상 영속성이란 눈앞의 대상을 천으로 가려 안 보이게 했을 때 이 대상이 사라진 게 아니라 천 밑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능력이다. 연구자들은 아이들이 눈앞에 보이는 대상의 위치 변화를 나타내는 단어인 ‘up(위)’이나 ‘down(아래)’을 대상의 존재변화를 나타내는 단어인 ‘gone(사라졌다)’보다 먼저 이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대상 영속성 개념이 없는 아이들은 언어 훈련을 받더라도 여전히 ‘gone’ 같은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사용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오히려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다. 한편 미국의 수화 교사인 샐러는 27세까지 농아였다가 수화를 뒤늦게 배운 사람도 수화를 배우기 이전의 경험들을 표현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언어를 배우기 전에 이미 사고를 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다.

미국 버클리대 언어학과 폴 캐이 교수는 올해 발표한 한 리뷰논문에서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워프의 가설이 절반은 맞다고 결론지었다. 언어가 지각의 반을 차지한다면 정말 대단한 힘이다. 눈으로 보고 있는 물리적 세계를 추상적인 언어에 반이나 빼앗긴다면 실로 놀라운 수준인 것이다. 인간의 인지능력이 발달할수록, 가상이나 추상 세계에 대한 생존적 적응이 요구될수록 언어의 비중이나 필요성이 증폭될 것은 자명해 보인다.

고양이 소리를 주의 깊게 듣고 있으면 ‘야옹’으로도 ‘뮤’로도 들린다. 알 듯 말 듯한 소리가 언어에 의해 섬광처럼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실제 소리는 지각 체계에 따라 분석되지만 어떤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언어와 지식의 역할이다. 고양이 소리를 자석처럼 끌어당겨 ‘야옹’으로도 ‘뮤’로도 들리게 하는 신기한 체험을 언어가 제공해 준 것이다. 언어의 힘은 여기에 있다.

이재호 교수는 고려대에서 언어심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간의 언어학습과 사고, 지각에 관한 인지심리와 사회문화적 현상이 주요 관심사다. 현재 계명대 심리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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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재호 계명대 심리학과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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