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관한 한 아이들은 이미 선이 연결된 상태다. 반면에 문자는 고생스럽게 추가 조립해야 하는 옵션 액세서리다. - 스티븐 핑커
방금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미국 하버드대 스티븐 핑커 교수의 말을 인용하기 위해 키보드의 글자판을 130번 두드렸다. 시간은 수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기자의 뇌에는 이미 자판의 배열을 인식하는 신경회로가 배치돼 있어 자음과 모음을 0.1초도 안 되는 미묘한 시간차이로 두드릴 수 있는 정교한 명령이 오갈 것이다.
글자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쪽 위에는 로마자가, 오른쪽 아래는 한글이 표시돼 있다. 이 상황만큼이나 오늘날 문자세계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 여러 글의 기본이 되는 로마자와 한글이 알파벳글자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알파벳 글자, 즉 음소문자는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진 글자다. 실제 사용에서는 로마자가 훨씬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문자 자체의 합리성과 아름다움은 한글이 독보적이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 한글을 배우기 때문에 말은 하는데 글로 표시할 수 없다거나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 세계 7000여 개의 언어 가운데 6600여 개는 문자가 없는 언어다. 이 대부분은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로 이들이 속한 나라의 공용어에 밀려 마치 생물종이 멸종하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찌아찌아족에 한글 수출된 이유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단순한 글자이며 자모음을 조합하면 어떤 언어와 음성도 표기할 수 있다.”
‘대지’의 작가 펄 벅은 한글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국내외를 막론하고 문자에 관심이 많다면 한글의 ‘명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지난 8월 6일 사단법인 훈민정음학회는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주 부퉁 섬 바우바우 시에 사는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의 토착어를 표기할 공식문자로 한글을 채택해 7월 21일부터 한글 문자 교육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인구 6만 명의 찌아찌아족은 토착어가 있지만 이를 표기할 문자가 없어 공용어인 바하사 인도네시아어에 밀려 머지않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훈민정음학회의 총무이자 찌아찌아어 한글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 교수는 “찌아찌아어의 소리를 분석한 결과 다행히 우리말과 발음이 비슷했다”며 “우리말 발음에 없는 음 가운데 하나는 순경음 비읍( )으로 표기 했다”고 말했다.
순경음 비읍은 한글 창제 초기에는 있었다가 사라진 자음으로 찌아찌아어에서 영어 ‘v’와 비슷한 발음을 표기한다. 사실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도 고유문자가 없어 오래전 로마자 알파벳을 채택해 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찌아찌아어 표기에 한글을 선택한 이유는 한글이 다양한 언어와 음성을 최대한 가깝게 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자 알파벳은 글자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발음되는 경우가 많고 풀어쓰기 때문에 음절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이 교수는 “세종대왕이 15세기에 발명한 한글은 21세기 들어 더 빛을 발하고 있다”며 “단말기 입력 속도도 로마자보다 훨씬 빠르다”고 덧붙였다.
사람들의 발명품인 문자는 그 특성에 따라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다양하다. 기원전 4000년 무렵 발명돼 인류 최초의 문자로 추정되는 수메르글자의 경우 오늘날 한자처럼 뜻글자다. 따라서 수메르 글자를 습득하려면 수년 동안 집중적으로 배워야 했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반면 로마자나 한글처럼 음소를 표기하는 문자는 20~30개의 알파벳글자만 익히면 웬만큼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문자 습득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글자와 소리가 투명하게 대응하는 한글의 경우 이런 특성이 두드러진다. ‘훈민정음 해례’에서 정인지는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다 배울 수 있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열흘이면 깨우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가나 50자를 쓰는 일본문자는 로마자나 한글 같은 알파벳문자가 아니라 음절문자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서 ‘가’와 ‘나’는 자음 ‘ㄱ’과 ‘ㄴ’이 각각 모음 ‘ㅏ’와 모여 만들어진 음절인 반면, 일본어에서는 ‘か’와 ‘な’라는 별개의 글자다. 한글 자모음을 조합해 만들 수 있는 음절을 다 표시하려면 가나를 수백 개 만들어야 한다. 결국 일본어는 모음을 5개(ㅏ, ㅣ, ㅜ, ㅔ, ㅗ)로 제한해 가나의 수를 억제했다.
그러다 보니 가나로 표현할 수 있는 음이 확 줄어 버렸고 일본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많은 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게 됐다. 서로 가까운 언어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어를 쉽게 배우는 반면, 일본 사람들은 한국어에 쩔쩔매는 이유다. 재야 사학자인 박병일 씨는 ‘일본어의 비극’이라는 책에서 “원래 일본어 모음은 8개로 추정되는데, 8세기 가나가 발명되면서 언어의 8분의 3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고려대 심리학과 남기춘 교수는 “사람은 태어날 때 모든 소리를 식별할 수 있지만 모국어를 습득하면서 그 능력을 잃는다”며 “따라서 일본어처럼 사용하는 음이 적을 경우 다양한 음을 식별하거나 정확히 발음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글 읽기 전용 신경회로는 없다?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화려한 액션과 재치 있는 연기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스타가 된 영화배우 성룡은 수년 전 자신이 난독증을 앓고 있다고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수많은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엄청난 양의 대사는 모두 옆에서 읽어주는 걸 듣고 외워서 말했다고 한다. 사실 성룡뿐 아니라 천재의 대명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난독증으로 고생했다.
난독증이란 문자를 보고 해당하는 음성이나 의미를 잘 떠올리지 못하는 증상이다. FOXP2 유전자의 변이로 말을 잘 못하는 경우처럼 난독증 역시 감각 기관 이상이나 정신지체 같은 문제와는 관계가 없다. 즉 뇌의 다른 기능은 멀쩡한데 글을 제대로 못 읽을 뿐이다. 그러나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은 아주 드문 반면, 난독증은 영어의 경우 글을 배우는 아이의 5%나 겪고 있는 광범위한 장애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미국 터프츠대 독서 및 언어연구센터 소장인 매리언 울프 교수는 2007년 출간한 ‘책 읽는 뇌’에서 “인류 진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뇌가 독서를 하도록 프로그램돼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말을 하는 능력은 오랜 세월을 거쳐 인류의 뇌 속에 신경회로가 구축돼 있지만 불과 수천 년 전의 발명품인 글을 읽기 위해 준비된 신경회로는 없다는 뜻이다. 결국 우리는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신경회로와 언어처리회로를 활용해 글을 ‘읽는’ 요령을 터득해야 한다.
개인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이 뇌 속 신경회로의 배치가 조금씩 달라 누구는 공간 지각력이 뛰어나고 누구는 말솜씨가 뛰어나다. 그런데 어떤 문자를 해독하려면 꼭 필요한 회로가 부실할 경우 난독증이 생긴다. 그렇다면 난독증인 사람의 뇌는 어떻게 다를까.
글을 읽는 과정에서 뇌의 광범위한 부위가 활동하지만 특히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후두엽과 언어정보를 처리하는 좌뇌의 전두엽과 측두두정엽 부분이 활성화된다. 그런데 난독증인 사람의 뇌를 보면 좌뇌의 활동성이 뚝 떨어져 있다. 즉 독서를 할 때는 보통 좌뇌가 우세한데, 난독증인 사람은 우뇌가 우세하다는 뜻이다. 그 결과 시각정보가 언어정보로 제대로 변환되지 못한다. 좌뇌가 언어 전문이라면 우뇌는 공간 지각이나 패턴 인지를 주로 담당한다.
행동신경과학자인 노먼 게슈윈드는 “난독증을 겪는 이들은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경우가 많다”며 “왼쪽 뇌에 생긴 몇 가지 변화 때문에 다른 부위, 특히 오른쪽 뇌가 우세해질 경우, 그런 변화를 겪은 사람이 글자가 없던 사회에서 살고 있었다면 불리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독증 극복하는 뇌의 유연성
흥미로운 사실은 문자체계에 따라서 난독증에 걸리는 경향이 다르다는 점이다. 특정 문자의 해독에 동원되는 뇌의 회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어떤 문자를 쓰는 곳에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글을 읽는 데 장애를 보이기도 하고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글을 쓰는 우리는 다행인 셈이다.
한국인의 난독증을 연구하는 남기춘 교수는 “한글은 글자도 단순할 뿐더러 글자와 소리가 일대일로 투명하게 대응하기 때문에 같은 음소글자이지만 글자와 소리가 대응하지 않는 영어보다 난독증인 사람들의 비율이 더 낮다”고 말했다. 울프 교수는 “영어와 프랑스어처럼 규칙성이 떨어지는 언어에서는 글자를 보고 음을 떠올리는 능력에 결함이 있는 난독증이 많다”고 설명했다.
한자 같은 뜻글자를 읽을 때는 차이가 더 난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데, 영어와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하기는 이중언어 사용자가 뇌경색에 걸린 뒤 한자만 읽을 수 없게 됐다는 것. 두 글자 시스템이 별개의 회로에서 처리됨을 뜻하는 결과다. 중국 홍콩대 언어학과 리 하이탄 교수팀은 2004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한자 난독증인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뇌 활동 패턴이 영어 같은 알파벳 글자를 잘 못 읽는 사람들의 패턴과 다르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즉 한자 난독증인 사람은 시각기호를 처리하는 좌뇌 중간전두이랑의 활동성이 낮았다.
그렇다면 난독증은 치료될 수 있을까. 미국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엘리스 템플 박사팀은 ‘Fast ForWord’란 청취능력개선프로그램을 이용해 난독증 아이들을 8주 동안 교육시킨 결과 글을 읽는 능력이 개선됐음을 확인했다. 이 프로그램은 7단계로 이뤄졌는데, 예를 들어 두 음의 차이를 점차 좁혀 가며 음을 구별하는 능력을 키우는 방식이다. 프로그램을 마친 뒤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으로 뇌의 활동을 측정한 결과 좌뇌의 측두두정엽 영역과 전두엽 영역이 정상 아동과 비슷한 수준으로 활성화됐음을 확인했다. 템플 박사는 “독서치료프로그램이 일으킨 뇌의 기능 변화를 처음으로 관찰했다”며 “적절한 자극이 주어지면 사람의 뇌는 기존 구조 안에서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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