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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은 약이다

자율신경계에 영향 미쳐 난폭함도 잦아들게 해

여기 만 세 살부터 다섯 살까지의 어린이들이 모여 있다. 이들 앞에 빨간색 세모와 초록색 원이 그려진 큰 깃발이 세워졌다. 이들을 인솔한 선생님이 빨간색 원 그림을 내 보이면서 이것과 같은 깃발 아래 모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어른들이라면 선생님께 말할 것이다. 문제가 애매하고 당혹스럽다고. 색이 같은 것인지, 형태가 같은 것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색을 따르자니 형태가 다르고, 형태를 따르자니 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린이들은 서슴없이 빨간색 세모로 몰려든다. 이는 어린이들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색임을 보여준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캣츠는 1980년대 초 실시한 이 실험 결과를 토대로 어린이들은 형태보다는 색을 먼저 인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색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은 의학적인 견지에서도 규명돼 있다. 핵심은 시신경에서 흡수된 색이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자율신경계는 소화, 호흡, 땀 분비, 심장 박동처럼 의식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몸의 움직임을 관장한다. 올해 1월 영국 서섹스대 던컨 스미스 박사팀이 자국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파란색을 본 사람은 심장박동 수와 땀 분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몸이 편안해지는 진정 작용이 일어났다는 얘기다.

2002년 국내 한 공중파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실시한 실험에서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여러 색에 노출된 실험자들을 대상으로 컴퓨터단층촬영(CT)을 했더니 파란색 계열에 노출된 사람은 기억력을 활성화하는 두정엽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에 비해 빨간색에 노출된 실험자는 자율신경계가 흥분해 있었다. 한 마디로 가슴이 쿵쾅거리고 진땀 나는 상태가 됐다는 얘기다.

이처럼 색이 사람의 몸에 영향을 준다는 점은 과학적인 견지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색을 통한 간접적인 심리 치료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학교에서, 병원에서, 때로는 감옥에서까지 색은 ‘약’이 되고 있다.

병원만 가면 ‘고혈압’, 흰색 가운이 원인

필자는 1998년 어린이들이 선호하는 색채를 파악하고자 3~9세 아동을 대상으로 직접 면접을 통해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좋다고 응답한 색은 빨강이 가장 많았으며 그 다음으로는 노랑, 핑크, 보라, 주황 순이었다. 주로 차가운 느낌이 들지 않는 난색(暖色)과 중성색계가 상위에 꼽혔다.

특히 대부분의 어린이가 명도 4 이상의 밝은 색을 좋아했으며, 핑크를 제외하고는 채도가 10이 넘는 순색에 가까운 색을 선호했다. 아동들이 싫다고 응답한 색은 명도, 채도가 각각 4.5 이하인 어둡고 탁한 색이었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소아과 병원에는 빨강, 노랑, 핑크, 주황처럼 어린이가 비교적 좋아하면서도 밝은 느낌을 주는 색을 칠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어린이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상업공간에서는 밝은 적색 또는 오렌지색을 가미해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좋다.

색은 어린이뿐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색채 응용 분야의 뛰어난 이론가였던 파버 비렌은 색이 인간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단순히 심리적인 차원을 넘어 인체에 생물학적으로 직접 작용한다고 말했다. 색에 민감한 정서적 반응을 하는 사람들의 예를 보자. 집에서는 혈압이 정상인데, 막상 병원에 가서 재보면 고혈압인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을 ‘백의(白衣) 고혈압 환자’라고 하는데 통계에 따르면 병원에서 고혈압으로 분류되는 환자의 약 30%가 이런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정상 혈압인 사람이 병원에만 가면 혈압이 오르는 이유는 의사나 간호사가 자신의 혈압을 재는 행위를 보고 너무 긴장하거나 당황하기 때문이다. 주목할만 한 것은 이 같은 증상의 주된 이유가 의사나 간호사, 혹은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병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가운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흰색은 깨끗한 이미지는 줄 수 있지만 따뜻함이 전혀 없는 색이다. 흰색의 진료복이 환자들에게 주는 정신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병실도 일률적으로 흰색으로 칠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병원에서만 이러한 색채 심리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괴팅건 와돌프 학교의 학생들은 매년 빨강, 핑크, 주황색 등 벽에 다른 색을 칠한 교실에서 공부한다. 교실뿐만 아니라 휴게실, 주방, 수공예실에도 알록달록한 색이 칠해져 있다. 그 결과 어린이들의 창의력과 집중력, 활동성이 높아졌다.

우린 일상적인 일을 수행하면서도 색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미국 휴스턴대의 심리학자 마이클 골드스타인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빨간 빛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에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느낀다. 반대로 초록색이나 파란색의 빛을 받을 때는 시간이 빨리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차가운 색은 사무실이나 공장 같이 일상적이거나 단조로운 일을 하는 장소에 적합하고, 따뜻한 색은 거실이나 식당, 호텔의 휴게실처럼 시간이 더디게 가는 편이 더 유쾌한 장소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난폭한 죄수, 핑크색 감방 가면 진정

또 다른 실험도 있다. 197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있는 한 교도소에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수감자들을 위해 ‘핑크색 감방’을 설치했다. 수감자가 규율을 어기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또는 다른 이유로 징계가 필요할 때 적어도 30분 동안 이 감방에 수감했다. 이 방에 들어선 수감자들은 10여 분이 지나자 적대감, 공격적 행동 그리고 일반적인 폭력 성향이 약화됐다. 이 실험을 한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연구팀은 핑크색이 사람의 에너지를 서서히 약화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설명했다. 핵심은 심장 박동의 급격한 상승을 억제하는 핑크색의 효과에 있다.

하지만 색이 항상 치료의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듯이 색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 1997년 말, 일본에서 텔레비전으로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을 보던 어린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작을 일으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파랗고 빨간 광선이 약 10초간 번갈아가며 화면에서 작렬하는 장면을 본 어린이 수백 명이 해를 입었다. 이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격렬하게 깜빡이는 색광(色光)이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반응을 내놓았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만드는 데에도 재료, 양념만큼 색이 중요하다. 백열 전구의 빛은 음식을 맛있어 보이게 하며, 촛불의 따뜻한 색감 역시 요리의 식감을 높이는 일등공신이다. 식탁보도 청색보다는 오렌지 같은 주황색 계통을 쓰는 것이 좋다. 주황색은 자율신경을 활성화하기 때문에 식사가 맛있어진다.

이처럼 색은 시간 흐름에 대한 감각을 헝클어 버리기도 하고, 으르렁거리는 맹수 같은 사람을 온순한 양처럼 만들기도 하며, 식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업무효율을 높이고 질병을 치료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힘을 갖고 있다. 요즘 색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심리적인 차원을 넘어 기업의 상품 전략이나 범죄 억제 등 생활 속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종희 교수는 실내 계획, 실내 코디네이션, 실내 환경 행태를 연구 분야로 삼고 있으며, 색채의 생물학적 활용에 관해 관심이 있다. 현재 서일대 실내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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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이종희 서일대 실내디자인과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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