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반, 유럽의 경제대국이던 네덜란드에 광기 어린 투기 열풍이 불어 닥친다. 투기 대상은 바로 튤립. 수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중앙 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에서 자라다 16세기 후반 유럽에 전해진 이 동양의 꽃에 혼을 빼앗겼다. 귀한 튤립 한 뿌리의 가격은 당시 노동자 한 해 임금의 20배에 이를 정도였다. 역사는 이를 ‘튤립 열풍’(Tulip Fever)으로 기록한다. 튤립 열풍이 가라앉은 뒤 네덜란드 경제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흥미로운 건 한 나라의 경제를 뒤흔든 투기 대상이 오늘날 기준으로는 의아스럽기까지 한 ‘튤립’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튤립은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구경하지 못한 압도적인 색(色)을 선보였다. 빨간색, 노란색은 물론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파스텔 색조를 띤 튤립은 네덜란드인들의 지갑을 열게 하기에 충분했다.
튤립 열풍 때만큼은 아니지만 현재도 색은 소비자를 끌어당기는 중요한 수단이다. 색이 인간에게 미치는 심리 현상을 분석하는 일이 기업이 매출을 높이는 데 필요한 전략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색은 최근 간접적인 치료 과정에도 활용되고 있다. 소아 병동에 입원한 어린이의 심리를 안정시키고 난동을 부리는 죄수의 분노를 잦아들게 하는 데 색이 톡톡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색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현상에 다가가 보자.
피겨 스타 김연아 선수의 인기가 연일 상종가다. 올해 3월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기점으로 폭발한 그의 인기는 현재까지도 잦아들 줄 모르고 있다.
스포츠 스타가 대중의 주목을 받은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인기 있는 이유에는 남다른 구석이 있다. 뛰어난 경기력에 더한 특유의 ‘활력’이 그것이다. 연예 프로그램에 출연해 베테랑 개그맨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갈라쇼에서 귀에 익은 팝송에 맞춰 매혹적인 춤사위를 보여 준 생기 가득한 젊은이는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김연아가 단기간에 CF 스타로 발돋움한 것도 ‘젊음’ ‘활력’ ‘신선함’ 이라는 그의 이미지가 광고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색(色)이 광고모델 김연아를 띄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밝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에어컨 광고에 등장한 김연아는 말 그대로 장안의 화제가 됐다. 파란색이 주는 시원하면서도 신선한 이미지가 김연아와 딱 맞아떨어진 때문이다. 해당 에어컨의 판매량은 올해 1월 15일부터 3월 31일까지 매주 1.5배씩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눈길을 끄는 건 광고업계 종사자들의 경험치 축적으로 여겨질 법한 이 같은 결과가 사실은 상당히 세밀한 과학적 분석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갈래는 크게 심리학적 분석과 기호학적 분석으로 나뉜다.
심리학적 분석은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찰스 오스굿이 내놓은 ‘의미 분별 척도법’이 대표적이다. 서로 상반된 의미의 형용사를 짝지어 응답자에게 각 단어 사이의 연관성을 평가하도록 한다. 응답 칸은 모두 7개다. 연관성에 따른 긍정과 부정 수준에 따라 ‘보통’을 중심으로 ‘약간 그렇다(약간 아니다), 많이 그렇다(많이 아니다). 매우 그렇다(매우 아니다)’라는 응답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의미 분별 척도법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 컬러 이미지 분석 좌표다. ‘동적인(dynamic)-정적인(static)’을 수평축으로, ‘부드러운(soft)-딱딱한(hard)’을 수직축으로 하는 좌표 위에 각 색의 이미지를 배치한다.
이 좌표에 따르면 밝고 차분한 색조는 1사분면, 밝고 선명한 색조는 2사분면, 어둡고 선명한 색조는 3사분면, 어둡고 차분한 색조는 4사분면에 배치돼 있다.
기호학에서도 색채 마케팅은 연구 대상이다.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1차 언어체와 1차 언어체에서 비롯된 속뜻을 의미하는 2차 언어체가 논의의 핵심이다. 쉽게 말하면 기표는 사물의 이름, 기의는 의미다. 2차 언어체는 사회 문화적인 상황에서 비롯되는 은유다. 예를 들어 진녹색은 기표, 여기서 비롯된 기의는 푸르름과 생명이라면 2차 언어체는 친환경 자연주의, 인간 사랑, 공익과 진실 추구가 된다.
심리학과 기호학적 분석을 거친 색채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개인적 직감에 의존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힘을 갖기 마련이다. 사람의 잘못된 ‘감’이 만들 수 있는 위험 부담을 줄이고 안정적으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인 것이다.
본격 점화된 색채 마케팅 시대에 이 같은 분석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자.
제품 이미지 절반 이상 색이 결정
한국에서 색채가 마케팅 수단이 된 것은 20년 전의 일이다. 외국에서는 만년필로 유명한 파커사가 1920년대 여성을 겨냥한 빨간색 만년필을 내놓으면서 색채 마케팅이 시작됐지만 한국은 이보다 훨씬 늦게 그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한국이 색채 마케팅에 뒤늦게 뛰어든 것은 1970년대까지 가난을 벗어나는 게 지상과제였던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한국 입장에서는 색채 마케팅이라는 고급화된 작업에 쏟을 여력이 없었다. 제대로 된 기능과 성능을 갖춘 제품을 생산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광고의 중요한 축이 된 컬러 텔레비전 시대가 선진국보다 20년 이상 뒤쳐진 1980년대에 열린 점도 한국에서 색채 마케팅 시대 개막이 늦어진 이유다.
색채 마케팅이 가능한 이유는 오감 중 시각이 갖는 중요성에서 찾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상품을 살 때 시각(87%)을 통해 얻는 정보의 비율이 청각(7%), 촉각(3%), 후각(2%), 미각(1%)을 크게 압도한다고 분석한다.
여주대 광고홍보디자인과 손상희 겸임교수는 2002년 펴낸 ‘감성 디자인에서 색채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에서 사람은 상품을 바라볼 때 형태보다는 색을 먼저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제품 디자인 중에서도 모양보다는 색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얘기다. 손 교수는 “색채는 시각 이미지 중에서 사물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며, 제품 이미지를 만드는 요소 가운데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색을 통한 마케팅이 과학적 산물이라는 분석은 최근에도 나왔다. 올해 2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줄리엣 주 연구팀은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충치 예방처럼 무언가를 ‘회피’해야 한다면 빨간색을, 치아 미백처럼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면 파란색을 광고에 많이 노출시켜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 연구는 대학생 6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연구팀에 따르면 실험자가 빨간색에 노출됐을 때는 파란색에 노출됐을 때보다 ‘오탈자 교정’ 같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업무의 수행 능력이 31% 높아졌다. 이에 비해 파란색에 노출되면 빨간색에 노출됐을 때보다 ‘벽돌 쌓아 집짓기’처럼 창의적 사고력이 필요한 일을 해내는 능력이 2배 상승했다.
연구팀은 “소방차처럼 ‘경계’의 이미지와 버무려져 있는 빨간색은 주의력을 기울여 무언가를 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반면 하늘, 바다 같은 ‘수용’ 이미지와 결합돼 있는 파란색은 창의력을 안정적으로 강화하는 효과를 낸다”고 설명했다. 이를 종합하면 같은 치약이라도 광고에 어떤 색을 많이 쓰느냐에 따라 충치를 예방하는 치약과 치아 미백을 강화하는 치약으로 소비자에게는 따로 인식된다는 얘기다.
왕후 이미지에 ‘적극성’ 품은 빨간색이 ‘딱’
색채가 광고에 어떻게 활용됐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색을 통한 마케팅이 갖는 힘을 더욱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빨간색을 대거 활용한 소망화장품의 다나한 광고가 대표적이다. 빨간색은 정열, 에너지, 투쟁, 사랑, 열광 등을 상징한다는 게 색채학계의 시각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이 CF에서 인기 탤런트 구혜선은 위엄 있는 왕후로 분해 시녀들을 압도하는 모습이 부각되는데 이 과정에서 빨간색의 기능이 적지 않다.
학계에서는 채도가 가장 높은 빨간색이 적극성, 공격성 등 ‘주장’의 이미지를 지닌 것으로 해석한다. 분노 등의 감정과도 연관시킨다. 왕궁에 서 있는 구혜선의 의복, 어투, 표정이 빨간색과 만나 카리스마를 배가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빨간색의 강렬함은 세계적인 음료회사 코카콜라의 로고에서 두드러진다. 콜라의 짜릿한 맛을 강조하는 코카콜라의 텔레비전 광고는 에너지 넘치는 운동 장면과 결합하면서 소비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다.
2000년대 초반, 트랜스젠더 하리수를 일약 섹시스타덤에 올린 ‘빨간통 패니아’ 광고 또한 빨간색이 주는 효과를 십분 발휘한 사례다. 광고에서 도발적인 느낌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하리수는 정열적인 빨간색의 이미지를 제품에 덧씌우며 자신과 제품의 인지도를 급상승시켰다.
노란색에 대한 색채학계의 대체적 평가는 가장 밝고 따뜻한 느낌이라는 데 모아진다. 세계적인 필름회사 코닥 로고에 등장하는 노란색이 이 같은 느낌을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가족, 친구와 추억의 흔적을 남기는 사진의 기능과 노란색의 이미지를 중첩시킨 전략의 결과라는 얘기다.
10여 년 전 출시돼 ‘엽기 콜라’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콤비 옐로콜라 역시 노란색의 장점을 잘 활용한 사례다. 코카콜라, 펩시콜라의 아성에 도전했던 국산 콜라가 줄줄이 고배를 마신 상황에서 젊은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색채마케팅 전략으로 추진됐던 노란색 콜라는 단기간에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젊은 여성이 주로 많이 먹는 과립형 비타민C인 레모나가 노란색 제품 도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이런 분석과 맥을 같이 한다. 생기발랄한 여성이 대거 등장하며 따뜻한 햇살과 노란색 의상이 나타나는 광고를 본 소비자들은 ‘밝다’라는 공통된 느낌을 갖기 마련이다.
빨간색과 노란색을 섞어 만든 색인 주황색은 빨간색의 열정과 노란색의 따뜻한 이미지를 모두 갖는다. 발랄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캐주얼 의복을 비롯한 젊은이 대상의 제품에 많이 활용된다.
특히 주황색은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기 때문에 식음료 업계에서 주황색을 활용하는 일이 잦다. 썬키스트 광고가 대표적이다. 오렌지의 주황색을 화면 가득히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녹색이 ‘건강 음료’ 콩 상징
이 밖에 녹색은 자연과 순수를 상징하는 색으로서 선호도가 높다.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차용하고자 하는 CF에 녹색이 사용되는 이유다. 베지밀이 대표적이다. 로고 대부분에 녹색을 써 자연과 건강을 상징했다. 2000년대부터 출시한 ‘녹차 베지밀’은 이 같은 녹색 마케팅의 경향을 강화했다.
보라색은 희소성 있는 지위를 상징하는 색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연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색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됐다. 서양에서는 고위 종교 지도자들의 복색으로 쓰였다. 지금은 VIP 고객을 위한 고연회비 신용카드나 격조 높은 화장품의 포장 색상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검정색 또한 주목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검정색은 죽음을 암시했기 때문에 일상에선 그다지 널리 활용되지 못했지만 최근엔 우아함이나 세련됨을 강조하는 제품에 대거 쓰이고 있다. 그 진가가 발휘되고 있는 곳이 휴대전화 시장이다.
LG전자 초콜릿폰이 2005년 출시된 뒤 전세계적으로 1500만 대 이상 팔리는 기염을 토하면서 블랙 마케팅 열풍은 휴대전화 업계에 꾸준히 불고 있다. 초콜릿폰의 색채를 바탕으로 한 샤인폰은 지난달 1300만 대 판매고를 올리면서 그치지 않는 ‘블랙’의 위력을 입증하고 있다.
마케팅 전선에서 색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연구와 고객 맞춤형 광고를 위한 노력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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