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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야에서 프로로 20년 이상을 지내다 보면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비슷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잊을만 하면 한 번씩 국제학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는 학자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일본 국립천문대의 태디 코다마 박사이다. 태디는 나를 만날 때마다 반가워하다가도 바로 부끄러워 한다.
남반구에선 해가 동쪽으로 질까
태디와의 첫 만남은 1995년이었다. 당시 난 미국 예일대에서 박사과정 학생이었는데 졸업을 1년 앞두고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열린 국제학회에 참가했다. 백인이 아닌 사람이 세 사람 있었는데, 도쿄대 박사과정생이던 태디와 그의 지도교수 아리모토 박사, 그리고 나였다. 두어 살 아래로 보이는 태디와 나는 쉽게 친해졌다. 당시만 해도 워낙 현대천문학이 백인 중심으로 발달해온 터라, 동양인들끼리 만나는 일이 귀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만나고 헤어진 뒤 1년이 지난 여름, 둘 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우리는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또 다른 학회에서 만났다. 사실 아직도 서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꽤 친한척 같이 다녔다.
일반적으로 천문학계의 국제학회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5일간 열린다. 3일째 되는 날 오후엔 머리도 식힐 겸 주변 기관이나 명소를 탐방하곤 한다. 이번엔 30분쯤 떨어진 작은 마을 ‘팃빈빌라’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엔 호주의 국립전파망원경과 자연보호구역이 있다. 먼저 망원경의 위용을 감상한 후, 자연보호구역을 방문하였다.
대형버스 두 대에 나누어 도착한 우리에게 1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태디와 또 한 명의 젊은 덴마크 학자와 함께 돌아다녔다. 그 넓은 지역 곳곳에 캥거루, 코알라 등 다양한 동식물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런저런 초거대블랙홀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복잡한 내용을 토론하면서 시끄러운 오리들이 많이 있는 연못에서 한참을 떠들었나보다. 어. 시계를 보니, 버스에 돌아갈 시간이 벌써 지났는데 우리를 부른다던 나팔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주위엔 아무도 없고.
서둘러 주차장을 향해 가기로 했다. 꽤 먼길일 텐데. 서쪽으로 가야 해. 그래 서쪽. 모두 동의하였다. 그런데 어느 쪽이 서쪽이냐? 바보들아. 지금이 저녁이니, 저 하늘에 보이는 둥근 해를 향해 가면 되지 않겠니. 그래 그렇다. 그런데 갑자기 세 명의 천체물리학자에게 바보귀신이 씌웠나보다.
어. 그런데 여긴 호주잖아. 남반구인데, 해가 서쪽에서 지는 게 맞냐? 갑자기 뒤통수가 띵하다. 어, 그렇네. 그런데 저거 태양이 맞나? 너무 허연데 달 아냐 달? 어 그러네. 저게 달이면 우리가 저거 좇아가 봐야 소용없잖아. 방금 전까지 블랙홀 어쩌구 하던 한국, 일본, 덴마크를 ‘대표’하는 세 젊은 과학자가 하늘에 떡하니 떠있는 천체가 해인지 달인지 싸우고, 남반구에선 해가 어느 쪽으로 지는지 싸우고 있다니. 누가 틀리고 누가 맞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기억이 지워진 게 내 편리를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어차피 뭐에 홀린 상태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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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백에서 뱀 박사를 만나다
옥신각신 하는 중에 주차장에 도달했지만 모두 이미 떠나고 우리만 남겨졌다. 이미 만날 시간을 훌쩍 넘긴 버스가 우리를 버린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우리가 조금 늦었기로서니 어찌 우리를 그런 아웃백(호주 내륙에서 사막 중심으로 넓고 황량한 지역)에 격리시켜놓고 맘 편히 돌아갈 수가 있는가 말이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도시에서 십수 km 떨어져 있는 자연보호구역에서 야영을 할 판이다. 이젠 해인지 달인지 보이지도 않는다.
완전 포기하고 있던 그 때, 지프 트럭이 하나 지나가다 멈춘다. 너네 뭐야. 이래이래 저래저래 낙오됐다고 했더니, 자기가 그 지역 담당자란다. 진한 호주 사투리를 써서 잘 알아듣진 못했는데, 화가 단단히 났다. 이게 밤엔 얼마나 위험한 지역인줄 아냐. 대부분의 동물이 야행성이라 밤에 나오고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공격할 수 있다. 여기선 비명을 질러도 듣고와 줄 사람도 없다 등등.
그는 우선 우리를 직원 숙소로 ‘끌고’ 갔다. 간단히 스프를 데워주더니 마음이 풀리나보다. 말을 하기 시작한다. 자기는 뱀을 연구하는 연구원이란다. 명함을 보니 그도 박사다. 그곳에서 자기가 연구하는 뱀 얘기를 한참 하더니, 자기 일을 좋아하는 보통의 학자가 다 그렇듯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 뱀이라는데 듣는 우리는 오싹하다. 연구동으로 가잔다. 그곳에서 그가 연구하는 각종 뱀을 구경시켜주었다. 그리고 지프에 우리를 태우고 그 지역을 다니며 야간에 나오는 다양한 동물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곤 언제 그리 화가 났었냐는 듯, 우리에게 열쇠고리 하나씩 선물로 주면서 캔버라까지 차로 바래다주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회에 참석하고 폐회만찬에 가 앉아 있었다. 한참 밥 잘 먹고 분위기 좋은데 학회장이 공지가 있단다. 주목. 이석영, 태디 코다마, 덴마크 사람(이름이 기억 안 난다), 잠깐 일어나 보세요. 서로 다른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우리는 어리둥절하며 일어났다. 여러분~ 이 세 박사님들이 어제 팃빈빌라 자연보호구역에서 낙오된 분들입니다. 200명 좌중이 한 바탕 웃고, 우리는 쥐구멍을 찾고. 우리가 헤매고 있을 때 해와 달, 남반구와 북반구에 대해 혼동했다는 얘긴 꺼낼 수도 없었다. 그 얘기 없이도 이미 우린 ‘스타’였다.
그 후로 종종 태디를 만난다. 다음 달에도 만날 예정이고. 그럼 우린 씩 웃는다. 말은 필요없다. 웃음 속에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난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