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아웃브레이크’(Outbreak, 1995년 개봉)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새로운 전염병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위기상황(팬데믹)을 그린다. 이 전염병은 전염성과 독성이 매우 강해 미국 정부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염병 발생 지역을 외부와 완전히 차단한다. 그 뒤 이 질병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 고성능 폭탄을 떨어트려 도시를 모두 파괴하는 계획을 세운다.
이때 샘 다니엘스(더스틴 호프만 분)는 질병의 전파경로를 밝혀낸 뒤 환자, 환자와 접촉한 2차 감염자를 격리하고 방역조치를 취한다. 그 뒤 백신을 개발해 지역사회에서 전염병의 유행을 막는 데 성공한다. 결국 신종 전염병에서 인류를 구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역학조사와 이에 근거한 지역사회 격리조치와 빠른 백신 개발이었다. 이 영화에서 샘 다니엘스의 직업이 바로 전염병 확산을 막는 역학자(epidemiologist)다.
‘질병 잡는 탐정’, 역학자
날씨가 더워 음식이 잘 상하는 여름철이면 식중독이 발생해 당국이 역학조사를 한다는 뉴스를 자주 접할 수 있다. 최근 신종 인플루엔자A(H1N1)가 유행하며, 환자나 2차 감염자가 발견됐다는 뉴스에서도 역학조사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역학조사란 무엇이며 역학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전염병 유행의 원인과 확산 경로를 알아낼까.
역학조사는 어떤 질병이 유행할 때 감염 대상과 규모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밝혀 유행을 종식시키고 질병이 다시 유행하는 일을 막기 위해 수행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역학조사를 지휘하는 역학자는 일종의 탐정이다. 질병이 유행하는 현장에서 관찰된 모든 현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한 뒤 질병이 유행하는 원인, 전파양식을 분석하는 과정이 마치 범인을 잡는 과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병이 유행하는 원인을 밝히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해 작은 집단에서 발생한 식중독의 원인을 밝히는 일도 쉽지 않다. 이미 질병이 유행한 뒤 관찰된 현상에서 그 원인을 논리적으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역학자는 유행을 일으키는 각종 질병에 대해 깊이 이해할 뿐 아니라 고도의 논리적 사고력과 수학적 분석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역학자는 특별한 훈련과정을 거친다.
전염병 유행의 원인을 찾아라
역학조사는 논리적인 방법론으로 전염병 유행의 원인을 밝히는 체계적인 과정이다. 역학조사의 첫 번째 단계는 질병 발병이나 감염 위험이 있는 고위험군을 조사해 유행의 발생과 규모를 측정하는 일이다.
어떤 지역에서 식중독 환자가 발생했다고 하자. 우선 환자로 의심되는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의 발생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설사나 복통, 구토와 같이 식중독과 비슷한 질환을 보이는 환자가 생기면 이들이 동일질환(식중독인지 아닌지)이나 동일한 원인(같은 음식인지 아닌지)에 의한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질병이 동일 질환이나 원인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할 경우에도 서로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원인이 같다고 간주한다. 이때 의심되는 환자를 검사한 뒤 필요시 분석을 위해서 가검물과 같은 시료를 보관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환례를 정의하는 일이다. 환례는 환자들이 보이는 공통 증상을 정리한 목록으로, 역학조사 현장에서 직접 정한다. 환례를 정의할 때는 발열이나 구토, 설사 횟수, 혈변유무 등 가장 단순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하는 편이 좋다.
질병 특성 밝히는 유행곡선
두 번째 단계는 유행성 질환을 기술역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 질병을 시간, 공간, 인적 특성에 따라 나타내는 것이다. 시간에 따른 질병 유행의 특성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유행곡선’(epidemic curve)을 작성하면 된다. 유행곡선은 시간(날짜)을 X축으로 하고 환자수를 Y축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Y축에 들어가는 환자는 반드시 그 날 새로 발생한 환자를 적는다는 점이다.
유행곡선은 그 질병의 잠복기 분포와 같기 때문에 이를 분석하면 질병유행의 원인이 되는 공동 오염원에 노출된 시기인 ‘폭로일’을 추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파양식과 2, 3차 유행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형태의 유행곡선은 최고점이 한번 나타나는 ‘단일봉 형태’로 식중독 역학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식중독은 대부분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동시에 오염된 음식을 먹기(질병의 원인에 한 번 노출) 때문에 봉우리가 한 개인 형태가 많다.
오염된 음식을 먹은 뒤 가장 먼저 식중독이 발생한 사람은 질병의 최단 잠복기가 되고 가장 늦게 발생한 사람은 최장 잠복기에 해당한다. 만약 오염원에 한 번 노출된 게 아니라 반복 노출된 경우는 봉우리가 여러 개 나타나거나 하나의 봉우리가 나타나더라도 최단잠복기와 최장잠복기의 차이(잠복기의 분포)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크게 나타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가 가능한 세균성 이질과 같은 병원체라면 2차 감염 때문에 봉우리 수는 더 많아진다. 이럴 경우 접촉 전파의 특성도 알 수 있다. 2차 감염의 경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시간은 그 질병을 일으키는 균이나 바이러스의 세대기와 일치한다. 만약 인플루엔자처럼 호흡기로 전파되는 전염병이라면 유행곡선은 시간이 갈수록 일정한 간격으로 봉우리 높이가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역학조사 현장에서 관찰되는 역학곡선은 이런 현상들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복잡하게 나타나 해석에는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하다.
질병의 공간적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점지도를 작성한다. 점지도에서는 최초 감염원과 감염경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유행의 인적 특성에 따른 기술은 감염자의 성별, 연령별, 사용한 항생제별, 수술여부 등 환자의 특성에 따라 발병률을 계산해 특정 위험요인이나 고위험군을 찾는 것이다. 감염경로를 파악하거나 고위험군의 관리, 향후 전파 예방 등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용의자 나열과 같은 가설 설정
세 번째 단계는 질병 유행의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설정하는 것이다. 역학조사를 범인을 잡는 과정으로 본다면 가설설정은 용의자를 나열하는 것이다.
가설은 감염 집단의 특성, 질병 확산의 이유, 질병의 특성, 질병 확산 원인에서 질병발생까지의 추정시간 등을 포함하며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감염원과 감염경로에 대한 가설이다.
네 번째는 가설을 분석역학적 방법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분석역학이란 ‘환자-대조군연구기법’이나 ‘코호트연구기법’ 같은 전문적인 역학적 분석방법을 이용해 질병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다. 식중독 역학조사 결과표를 예로 들어보자. 표1은 한 집단급식소에서 100명 이상의 학생이 집단설사를 보여 역학조사한 결과다. 이 표에서 돼지고기볶음의 경우 비교위험도(특정 음식을 먹은 사람들의 잘병 발생률을 먹지 않은 사람들의 질병발생률로 나눈 수치로, 이 수치가 클수록 특정 음식이 질병 발생의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가 35.0으로 이 음식을 먹은 학생에서 무려 35배나 더 많은 환자가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돼지고기볶음이 식중독의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식중독의 경우 물이나 음식이 일으키기 때문에 음식물을 수거해 원인 조사를 하고 음식물을 폐기하면 유행이 바로 종식된다. 그러나 신종 인플루엔자처럼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될 경우 접촉자 추척 과정을 거쳐서 감염원과 전파방식, 전파속도, 전파차단의 효과 등을 살펴야 한다. 그 뒤 확인된 감염자는 격리하고 감염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확인해 예방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때도 동일한 역학적 방법론을 사용한다. 마지막 단계는 질병 예방법과 질병 관리방법의 효과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만약 이런 노력 뒤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가설부터 다시 설정해야 한다. 이와 함께 관련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이나 관련 직종 종사자에게 역학 조사 결과를 전달해 질병을 예방한다. 식중독을 일으킨 음식물의 유통과정을 포함해 조리장비와 조리과정, 조리사에 대한 검사로 어느 단계에서 오염됐는지를 밝혀서 같은 질병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한 작업이다.
신종 인플루엔자와 역학자의 역할
4월 중순 멕시코와 미국에서 나타난 신종 인플루엔자A(H1N1) 환자가 5월 21일 현재 전 세계 41개 국에서 1만 1000명을 넘어섰고 우리나라에서도 3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 어디서 감염자가 들어올지 알 수 없고, 이들을 통해 지역사회에 신종 인플루엔자가 유행할 수 있다.
외국에서 질병이 들어오는 일을 차단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 검역소에서 역학조사관을 중심으로 발열환자를 파악하고 접촉자 검역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신종 인플루엔자는 발열증상이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바이러스를 전파하기 때문에 사스처럼 검역만으로 완전히 막는 일은 불가능하다.
신종 인플루엔자가 국내에 유입됐을 때 얼마나 많은 환자와 사망자가 발생할까. 항바이러스제와 백신은 얼마나 준비하고 누구에게 먼저 처방해야 할까. 신종 인플루엔자가 지역사회에 유행하는 일을 최소화시키려면 어떤 정책과 대응 방안이 필요할까.
이런 상황에서 질병모델링과 시뮬레이션은 신종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모델링은 수학적으로 바이러스의 전파, 확산 과정, 감염자 수 등을 예측하는 기법이며, 시뮬레이션은 이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실제 상황에 적용시킨 것이다. 모델링 기법으로 팬데믹에 의한 피해를 예측할 때는 바이러스의 감염력과 병원성 및 독성, 지역사회의 인구이동에 의한 접촉전파 특성, 바이러스의 잠복기와 감염기간 등의 데이터가 필요하며 상황에 따라 각각의 데이터에 가중치를 부여한다. 시뮬레이션에는 수십 개의 미분방정식을 푸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모델링 기법과 컴퓨터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모델링 기법은 2003년 사스(SARS)가 확산됐을 때 활용된 적이 있으며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확산방지와 방역정책결정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신종인플루엔자 유행확산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미국 질병관리본부에서 만든 ‘플루에이드’(FluAid)다. 이 프로그램은 1957년 대유행한 아시아 독감을 기준으로 만들었다. 2006년 필자가 연구책임자를 맡아 플루에이드를 이용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과 확산에 대한 모델링을 했다. 그 결과 신종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30%의 감염률을 보일 때 예상 사망자는 5만 4600명, 예상 입원자 23만 5600명으로 추정됐다. 이 수치는 현재 정부의 정책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5월 21일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지역사회에 유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감시체계를 강화하는 일이다. 감시체계는 의심 환자에 대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해 질병을 주기적으로 분석하고 유행 여부를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당국은 현재 병원을 중심으로 폐렴환자 감시체계와 감염관련 사망자 감시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이런 감시체계의 설계에서부터 자료의 수집과 분석, 유행을 발견해 조기에 진압하는 일 또한 역학자의 역할이다.
전염병이 확산되는 과정은 산불과 비슷하다. 조기 진화에 실패해 큰 불로 번지면 그 피해가 막대하다. 만약 신종 인플루엔자가 유행하면 역학자들은 체계적인 역학조사로 조기에 전염병의 유행원인과 전파경로를 파악하고 유행을 막을 방법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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