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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병원성의 비밀

고병원성은 증식 빠르고 비정상 면역반응 유발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창궐했을 때 미국의 한 병원 광경. 통로까지 침대를 놓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멕시코에서 수백 명이 죽었다고 알려지면서 “무시무시한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나타났다”며 다들 경악했다. 하지만 그 뒤 사망자 대다수가 허수로 밝혀지고 감염자에 비해 사망자 비율이 아주 높지는 않다는 게 알려지면서 한시름 놓는 분위기다. 물론 주춤하던 바이러스가 다시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각국은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거의 해를 거르지 않고 나타난다. 그런데도 고병원성이 아닌 걸로 밝혀진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경각심이 여전히 높은 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별종’이기 때문이다.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는 말도 있으니까. 만약에 신종 바이러스가 감염자의 60%가 사망하는 조류 독감(AI) 바이러스처럼 고병원성이었다면 지금쯤 전 세계는 패닉에 빠져있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부분도 혹시 신종 바이러스와 AI 바이러스가 합쳐져 신종 바이러스의 전파력과 AI의 고병원성을 갖춘 ‘괴물’이 나타날까하는 점이다. 아무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전파력보다는 고병원성 여부다. 주로 겨울에 걸리는 독감으로 매년 25만~50만 명이 죽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다들 무심하다. 수억 명이 감염되니 치사율은 0.1%가 안 되고 사망자의 90%이상은 면역력이 약한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리나 닭이 AI에 걸렸다는 뉴스가 나오면 통닭집이나 오리구이집이 텅텅 빈다. 사람한테는 옮을 가능성도 거의 없는데. 작년에 전 세계에서 AI로 죽은 사람이 몇 명일까? 33명이다.

문제는 작년에 AI에 걸린 사람도 44명뿐이라는 점이다. 내가 걸릴 확률은 거의 없지만 걸렸다하면 죽을 확률이 더 높으니 겁이 날만 하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유형에 따라 병원성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서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최근 수년 사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연구자들은 꽤 많은 사실을 밝혀냈다.


80년 만에 실체 드러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등장할 때마다 늘 비교가 되는 대상이 1918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다. 1918~1919년 겨울에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당시 세계인구의 30%인 5억 명이 감염됐고 5000만 명이 목숨을 잃어 치사율이 10%에 이른다. 스페인 독감은 치사율도 높지만 그 패턴도 특이하다. 보통 독감은 면역력이 약한 아기나 노인들이 주로 사망하기 때문에 나이(x축)에 따른 치사율(y축) 그래프가 U자형이다. 그런데 스페인 독감의 그래프는 W형태다. 면역력이 가장 왕성한 20~30대에서 오히려 치사율이 높았던 것이다.

신종 인플루엔자도 이와 비슷한 사망자 분포 패턴을 보인다. 노인보다는 젊은이들이 많이 희생됐다. 물론 사망자 수가 통계를 낼 수준이 아니고 병원성은 훨씬 약하다. 미국 워싱턴대의 역학자 이라 롱기니 교수는 “현재로서는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가장 위험한 계절성 바이러스와 가장 온순한 팬데믹 바이러스의 경계선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감염성과 병원성이 다 높아 최악의 팬데믹을 일으킨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설로 남아있었다. 이 바이러스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5년 미국군 병리학 연구소의 제프리 토벤버거 박사가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연구소에는 질병으로 사망한 군인들의 조직 표본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토벤버거 박사는 이곳에 1918년 독감으로 사망한 사람의 표본이 있다면 조직 안에 바이러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토벤버거 박사팀은 다행히 표본을 찾았고 PCR 로 바이러스의 DNA를 증폭해 염기서열을 밝혀 첫 결과를 1997년 3월 21일자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2005년 과학자들은 현대분자생물학의 기술을 동원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시험관에서 부활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바이러스가 고병원성인 이유를 밝히는 실험에 착수했다. 물론 사람이 아니라 실험동물인 생쥐가 희생양이 됐다. 연구자들은 생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 한쪽은 평범한 독감 바이러스를, 한쪽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감염시키고 어떻게 되는지 관찰했다.

2006년 10월 5일자 ‘네이처’에 실린 논문을 보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가 정말 끔찍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생쥐들은 대부분 5일 만에 죽었는데(평범한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된 쪽은 살아남았다) 허파 조직을 검사해보면 1918년 당시 독감으로 죽은 사람들의 부검 결과를 묘사한 기록과 비슷하다.

2007년에는 사람과 좀 더 가까운 원숭이를 대상으로 비교 실험한 결과가 발표됐는데(‘네이처’ 1월 18일자) 생쥐 때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두 경우에서 과학자들이 알아낸 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증식 속도가 아주 빠르다는 것과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숙주(쥐와 원숭이)의 면역계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먼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 나타나는 숙주의 정상적인 면역반응을 살펴보자.

 


사이토카인 폭풍으로 자멸

비교적 건강한 사람이 독감에 걸리면 하루 이틀 앓아눕더라도 곧 훌훌 털고 일어난다. 독감은 감기보다 조금 ‘독한’ 호흡기 질환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인체의 정교한 면역계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결과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호흡기의 세포 안에 들어오면 바이러스 캡슐이 깨지면서 내부 유전자인 RNA 8조각이 세포핵으로 이동해 mRNA를 만들고(전사), mRNA는 다시 세포핵 밖으로 나가 숙주 리보솜에 슬쩍 끼어들어가 바이러스 단백질을 만든다. 그 뒤 복제된 유전자와 단백질이 합쳐져 바이러스 수백 마리로 증폭해 세포를 떠나 다른 건강한 세포를 찾아간다.

물론 숙주(인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다. 일단 바이러스가 침투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세포에는 바이러스의 RNA를 구분해내는 RIG-I라는 분자가 있다) 사이토카인이라는 다양한 신호분자를 내보내 소탕작전에 들어간다. 혈관을 타고 뇌에 도달한 사이토카인은 시상하부를 자극해 몸에 열을 내고 염증반응을 일으킨다. 미생물은 열에 약하기 때문이다. 감염된 세포는 바이러스 복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바이러스의 RNA를 자르거나 mRNA가 바이러스의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을 방해한다.

바이러스가 침투했다는 신호를 받은 면역계는 먼저 자연살해(NK)세포라는 기동대를 급파한다. 염증반응으로 느슨해진 감염 부위 혈관 틈으로 빠져 나온 자연살해세포는 감염된 세포에 붙어 작은 구멍을 내고 그랜자임이라는 단백질을 주입한다. 그랜자임은 세포에 있는 캐스페이즈라는 효소를 활성화시키는데 이 효소는 세포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만든다. 그 뒤 세포독성T림프구(CTL), 대식세포, 호중구 같은 다양한 면역세포가 감염 부위로 몰려와 비슷한 역할을 해낸다. 이런 과정을 선천면역이라 부른다.



한편 선천면역계가 싸우고 있는 동안 바이러스 단백질(항원)을 인식하는 항체를 만드는 B 림프구가 선별돼 한 1주일 쯤 지나면 본격적으로 항체를 생산한다. 이걸 적응면역이라고 부른다. 바이러스는 항체에 가장 취약하다. 캡슐 주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으면 꼼짝도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건강한 사람은 선천면역만으로도 웬만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퇴치할 수 있다. 뒤늦게 도착한 항체는 남아있는 패잔병을 청소하는 정도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선천면역 기능이 떨어지기 때문에 백신을 맞아 항체를 만들 세포를 준비시킨다. 그 결과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선천면역과 적응면역이 공동 전선을 펴 일찌감치 쫓아버리니 증상도 거의 없다.

그런데 1918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이런 면역계의 정교한 신호를 교란해 결국은 숙주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보통 선천면역반응을 유발하는 사이토카인은 감염 초기 며칠 동안만 분비돼야 하는데 원숭이 실험 결과 1주일이 지나도 사이토카인 유전자 발현이 높은 상태로 유지됐다. 결국 감염 부위에 수많은 면역세포가 몰리면서 염증이 심해지고 혈관이 너무 느슨해져 백혈구뿐 아니라 혈액도 새나오면서 허파조직에 피가 고이게 된다. 이런 상황이 악화되면 결국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게 된다.

“이런 현상을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이라고 부릅니다. 빈대 잡으려다 집을 태우는 격이지요.”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의 설명이다. 사이토카인 폭풍이란 용어는 1993년 이식된 장기에 대한 거부반응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 쓰였다. 환자는 고열과 심한 피로감, 구토 증상을 보이고 환부는 붓고 벌게진다. 면역계가 지나치게 활성화돼 염증반응에 관여하는 사이토카인, 활성산소, 응집소 등 150가지가 넘는 분자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면서 환부로 면역세포들이 총동원된다. 그 결과 우리 몸까지 망가지는 것. 그 뒤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말라리아나 고병원성 인플루엔자 감염에 따른 증상도 사이토카인 폭풍의 결과임이 밝혀졌다.

김 교수는 “면역기능이 왕성한 젊은 사람들은 사이토카인 폭풍 반응도 그만큼 격렬하다”며 “스페인 독감 사망자 가운데 젊은이가 많은 이유”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비정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고병원성 바이러스의 또 다른 특징인 놀라운 증식속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실마리가 밝혀졌다. 원숭이 실험을 진행한 일본 도쿄대 미생물학·면역학과 가와오카 요시히 교수팀은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발현돼 세포의 항바이러스 반응을 유발하는 유전자인 DDX58과 IFIH1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때는 발현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NS유전자의 산물인 NS1 단백질은 이 기능을 방해하는데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경우 이런 작용이 훨씬 강하다는 것.



최근 가와오카 교수팀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RNA중합효소의 복제효율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밝혀 1월 13일자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PA, PB1, PB2라는 세 단백질이 복합체를 이뤄 RNA게놈을 복제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라도 평범한 독감 바이러스의 것으로 바꾸면 복제효율이 뚝 떨어진다. 결국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RNA게놈 8개가 높은 감염성과 병원성을 나타낼 수 있게 이상적으로 조합된 산물인 셈이다.



AI 바이러스 치사율 61%의 비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한 1997년, 홍콩에서 18명이 괴질에 걸려 그 가운데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인은 놀랍게도 H5N1형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 감염으로 밝혀졌다.

이전까지는 H5N1형은 사람을 감염시킬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홍콩 당국이 조류 수백 만 마리를 폐사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고 사람 사이에 감염사례는 밝혀지지 않음에 따라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년 수십 건이 보고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420명이 감염돼 257명이 사망해 치사율이 61%나 된다.

AI 바이러스에 감염돼 나타나는 증상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그 정도가 더 심하다.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복제해 수를 늘리고 인체는 급격한 면역반응, 즉 사이토카인 폭풍을 일으킨다. 그 결과 폐조직이 망가지면서 폐렴이 심해져 사망한다. 특이한 점은 AI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부위가 허파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장기로도 퍼져나간다는 점. 왜 그럴까?

“원래 AI 바이러스는 철새의 소화기에 주로 살고 있습니다. 철새가 이동하면서 흘린 배설물을 통해 가금류가 감염되는 이유죠.”



김우주 교수는 그 비밀이 AI 바이러스의 표면단백질 헤마글루티닌(HA)에 있다고 설명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숙주의 어떤 장기에서 사는지는 표면단백질인 HA의 구조에 달려있다. HA는 하나의 유전자지만 아미노산 사슬로 번역된 뒤 사슬이 둘로 잘라져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HA1과 HA2가 만나 정교한 결합을 해야 정상적인 표면단백질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이 부분을 자를 효소가 없기 때문에 숙주세포의 효소가 이 일을 맡고 있다.

계절성 인플루엔자 같은 H1형 바이러스의 HA는 허파조직에서만 발현하는 트립타제 클라라(tryptase clara)라는 효소만이 자를 수 있다. 독감의 감염부위가 폐에 국한된 이유다. 그런데 고병원성 H5형 바이러스의 HA는 이 부분의 아미노산 염기서열이 바뀌어 있고 그 결과 숙주의 몸 대부분에서 발현하는 푸린(furin)이란 효소에 의해서도 잘 잘린다. AI 바이러스가 전신으로 퍼지는 이유다.

고병원성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 많은 사실이 밝혀졌지만 아직까지 그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국립과학원회보’ 3월 3일자에 AI 바이러스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고병원성을 비교한 논문을 발표한 미국 워싱턴대 비교의학과 캐롤 바스킨 박사는 논문 서두에서 “우리는 이들 바이러스가 인체에서 높은 치사율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했다.

지금까지 연구결과 평범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전염성과 병원성이 높은 바이러스로 바뀌는 데는 그렇게 많은 변이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우주 교수는 “1918~1919년 겨울 창궐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도 사실 1918년 봄 잠시 유행했다가 사라진 뒤 괴물로 변신해 재등장한 걸로 보인다”며 “이번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이미 높은 전염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비슷한 과정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증상이 심각하지 않은 환자들은 항바이러스제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호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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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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