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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꿈을 위해 혹독한 우주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곳이 바로 미국항공우주국(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입니다.
NASA가 그동안 이룬 업적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립된 지 11년 만인 1969년 아폴로 계획으로 달 착륙에 성공했고, 케네디 우주센터에서는 우주왕복선을 여러 차례 발사해, 세계 여러 나라와 함께 건설하고 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우주인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직접 가지 못하는 곳에 대한 탐사도 계속됩니다. 보이저 탐사선은 이미 태양계 저 끝에 닿았으며 허블우주망원경은 지구 궤도를 돌며 우주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문에 답을 찾고 있습니다. 또 피닉스 같은 탐사로봇은 사람을 대신해 화성에서 부지런히 탐사를 하고 있습니다.
항공 분야에서 이룬 업적도 놀라울 뿐입니다. 민간 여객기와 고성능 전투기에 들어간 거의 모든 기술이 NASA의 연구로 이뤄졌습니다. 초음속의 벽을 최초로 깬 비행기를 개발한 곳도, 음속의 10배로 나는 비행기를 처음 만든 곳도 NASA입니다.
1958년 설립된 NASA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NASA의 항공부문 총책임자로서 50주년을 맞는 감회는 남다릅니다. NASA가 가장 혹독한 우주라는 환경에서 극도의 위험을 이겨내며 꿈으로만 여겼던 일들을 하나씩 이뤄낸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또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NASA가 성장할 수 있었던 ‘시크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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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꾸준히 기술 축적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NASA는 공식적으로 올해 50주년을 맞았지만, 사실 그 뿌리는 100년에 가깝습니다. 1915년 미국 정부는 새로이 움트기 시작한 항공 산업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미국항공자문위원회(NACA)라는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NACA는 40여 년 동안 항공 기술 연구에 지속적으로 지원한 결과 많은 기술을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1958년 NACA는 새로 만들어진 NASA로 통합돼 미국항공우주산업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NASA는 이미 100년 전에 항공우주 분야에 대한 선견지명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이런 노력 끝에 8000명의 직원과 연구소 3개, 그리고 1억 달러의 1년 예산으로 시작한 NASA는 현재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미국 전역에 10개의 연구센터(우주센터)에 1만 8000명의 직원이 1년에 170억 달러(약 2조 원)의 예산을 쓰는 기관으로 성장했습니다.
둘째, 고급 인력 유치와 관리입니다. NASA는 처음 설립됐을 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이었던 독일의 과학자들을 적극 유치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입니다. 그는 명실 공히 미국 로켓 개발과 우주 시대를 연 가장 중요한 과학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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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변의 많은 동료들은 NASA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아폴로 13’이라는 영화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만큼 NASA 직원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지식과 기술을 돈만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실패에서 배울 점을 찾아내 교훈으로 삼은 뒤 다시 일어서는 진취성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NASA는 크고 작은 사고를 수차례 겪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사고는 우주왕복선이 두 번이나 폭발한 사고일 것입니다. 2003년 2월 1일 아침 컬럼비아호가 귀환 도중 공중에서 무수한 조각으로 분해돼 떨어진 날, 저는 당시 근무지였던 글렌연구센터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눈발이 흩날리는 창 밖으로 NASA 직원이 사망한 우주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성조기를 반기로 내리는 모습을 보며, NASA가 이번에도 다시 일어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보통 이런 대형 사고가 한 번만 발생해도 모든 계획이 중단돼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NASA는 사고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2년 반 동안 원인을 철저히 파악하고 문제점을 보완한 뒤, 2005년 7월 26일 디스커버리호를 발사하며 다시 우주로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우리나라가 해야 할 일은?
한국은 더 이상 항공우주 분야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이미 연습용 전투기 T-50을 개발·제작했으며, 인공위성도 여러 대 갖고 있습니다. 또 올해 최초 우주인을 배출했고, 전남 고흥 외나로도에는 로켓을 발사하는 우주센터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또 NASA와 달 탐사와 달기지 개발에 참여한다는 협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선진국에 비해 우주경쟁에 늦게 뛰어든 나라입니다. 한국이 선진국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가 많이 갖고 있고, 잘하는 일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지금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 낼 동안 먼저 출발한 다른 나라들은 다시 저만치 앞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교육열 덕분에 이미 여러 기술 분야에 고급 인력이 많이 있습니다. 고급 인력을 키울 줄 아는 경험과 높은 교육열을 이용해 항공우주 산업에 필요한 과학기술 고급인력을 양성해야 합니다.
또한 우주 분야에서는 후발국인 만큼 모든 것에서 앞서 가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전자, 통신 산업의 앞선 기술을 우주산업에 접목시킬 분야를 잘 선택해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영어로는 이런 작전을 ‘니치 마켓’(niche market)을 찾는다고 합니다. 한국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니치 마켓을 찾아 그 분야에서 최고가 돼야 합니다.
50주년을 맞는 NASA를 곁에서 지켜보며 NASA가 항공우주 분야에서 어떻게 세계 제일의 연구기관이 될 수 있었는지 다시 생각합시다. 그리고 좋은 점은 배우고 응용하고, 우리의 강점과 특성을 살려서, 앞으로 20년, 30년 뒤에는 다른 나라가 한국의 우주 기술 없이는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될 멋진 미래를 그립시다.
흑백 TV로 달 착륙 보던 꼬마, NASA ‘넘버3’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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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NASA의 총책임자인 마이클 그리핀 국장은 신재원 박사를 NASA의 4개 연구부문 가운데 하나인 항공연구부문을 책임지는 국장보로 임명했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간 유학생 출신 한국인이 NASA에 입사한지 19년 만에 국장과 부국장에 이은 ‘NASA 넘버3’로 등극한 순간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흑백텔레비전에서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보고 NASA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된 신 박사는 항공우주 분야에 큰 관심을 갖고 연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자신이 NASA에 들어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대학 재학 시절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그저 나중에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은 꿈이 있었죠. 3학년 때 입대 신체검사에서 시력이 너무 나빠 군복무 면제판정을 받고, 그 시간을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1982년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신 박사는 캘리포니아주립대에서 석사를, 버지니아공대에서 유체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89년 클리블랜드에 있는 NASA 글렌연구센터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항공기 날개와 엔진, 그리고 동체에 생기는 얼음이 항공기 안전에 미치는 영향과 이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연구했다. 동료 연구원들이 가끔 신 박사에게 “손에 간장이 묻었다”는 식의 인종차별적인 언행을 하기도 했지만, 신 박사는 오로지 실력으로 인정받겠다는 자세로 연구에 임했다.
그가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는 곧 찾아왔다. 1994년 겨울 시카고에 착륙하기 위해 공중에서 대기하던 아메리칸 이글사 소속 프로펠러 여객기가 추락해 7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
신 박사는 사고조사위원회의 일원으로 파견돼 항공기의 날개부분 결빙이 사고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일을 계기로 사고 기종과 비슷한 항공기 전체에 결빙 방지 조치가 취해졌고, 겨울철 항공기 사고율은 크게 줄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신 박사는 입사한 지 5년 만에 연구직에서 관리직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신 박사는 “관리직이 된 뒤 1년 동안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실력으로 얻은 자리였지만 소수인종 차별금지 정책으로 부당한 혜택을 받았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
“그때부터는 스스로를 어항에 있는 물고기라고 생각하고 일했습니다. 항상 일관성을 지키며 성실하게 일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죠. 그랬더니 NASA 안팎에서 저를 진심으로 따르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뒤 2004년 워싱턴 D.C.의 NASA 본부로 옮겨 온 뒤 항공연구 부문 부국장보로 재직하다 3년 6개월 만에 국장보로 승진했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있는 4개 NASA 연구센터(에임스, 드라이덴, 글렌, 랭글리)에서 미국의 민간 항공연구를 수행하는 NASA 연구기술직원 1300명과 계약직원 300명의 수장이 된 것이다. 그가 2008년 집행한 예산만 5억 달러(약 6000억 원)가 넘는다.
“지식과 능력은 새로운 도전이 없으면 스스로 향상되지 않습니다. 우주는 이 도전을 이끌어내는 최고의 훈련장입니다. 우주만큼 인류에게 큰 위험과 도전을 주는 환경은 없으니까요.”
신 박사는 “미국이나 러시아가 첨단 기술을 많이 보유한 이유도 우주개발을 지속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라며 “우주개발 후발국인 한국은 자체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을 찾아내고, 이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효과적으로 길러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 안형준 기자 but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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