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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우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우에선
분수(噴水)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김광균, ‘외인촌’(外人村)
‘글자에서 색을 보고 커피향이 매끄럽게 느껴진다고?’
공감각 경험자들이 느끼는 세계를 묘사하는 글을 읽는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슬쩍 약이 오른다. 게다가 최근 엄밀하게 진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3명에 1명꼴로 어떤 식으로든 공감각을 경험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 모두 태어났을 때는 공감각의 세계에 살았음을 시사하는 연구결과가 있다. 게다가 우리의 언어 속에는 공감각의 자취가 깊이 새겨져 있다.
신생아가 6개월 된 아기보다 나아
아이가 태어난 뒤 한동안은 공감각적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 다프네 마우어 박사팀은 깜깜한 곳에서 생후 두세 달 된 아기에게 공을 줘 만지게 했다. 공을 회수하고 불을 켠 뒤 한 손에는 공을, 다른 손에는 정육면체를 잡고 보여줬다. 이때 아이는 좀 전에 갖고 놀았던 공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만져보면 모양을 추측할 수 있는 거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을 위해 연구자들은 생후 6개월 된 아이에게 같은 실험을 했다. 그러자 아이의 눈이 공과 정육면체를 바라보는 시간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1살짜리 아이는 두세 달 된 아기처럼 공을 더 오래 봤다. 물건을 만져서 모양을 추측하는 능력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한편 두세 달 된 아기는 아직 감각이 융합돼 있기 때문에 촉각으로도 시각 정보를 얻는다고 연구자들은 해석했다. 생후 6개월 된 아기는 신생아의 공감각 능력은 잃고 아직 촉각정보에서 시각정보를 추측하는 능력을 얻지 못한 과도기라서 지각 능력이 가장 떨어진 셈이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심리학과 빌라야누어 라마찬드란 교수는 아기가 자라며 공감각을 잃는 것은 여러 감각 경로가 연결돼 있는 신생아의 뇌신경세포가 ‘가지치기’를 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이런 과정은 생후 1년 정도면 어느 정도 완성된다는 뜻이다. 공감각 경험자는 이런 가지치기가 완벽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인 셈이다. 라마찬드란 교수는 이런 가지치기를 방해하는 ‘공감각 유전자’가 있어 뇌의 특정 부위에서 발현되면 특정한 형태의 공감각이 생긴다고 추측했다. 아직 공감각 유전자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게 가지치기가 됐음에도 여전히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 감각이 남아 있다. 후각과 미각이 그 주인공. 아침에 커피 메이커로 커피를 내리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끓는 물이 커피 가루가 담겨 있는 필터를 통과하면 갈색의 커피가 흘러나온다. 이때 우리 코는 주위로 퍼져 나가는 커피 향을 맡으며 벌름거린다. 그러나 향을 맡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반대로 감기로 코가 막혔을 때 커피를 마시면 쓴 액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평소 커피를 마실 때 감미로운 커피 향과 쓴맛을 명확히 나눠 느낄까. 흥미롭게도 우리는 감기에 걸려 냄새를 잘 못 맡을 때 음식을 먹으며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고 한탄한다.
모양과 소리를 연결한다?
아래의 그림을 보자. 왼쪽은 곡선으로 그린 도형이고 오른쪽은 직선으로 그린 도형이다. 이 도형 가운데 하나는 ‘타케테’이고 나머지는 ‘말루마’다. 어느 쪽이 타케테이고 어느 쪽이 말루마일까.
194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 볼프강 쾰러는 사람들이 이 단어들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대부분 왼쪽 도형을 말루마로, 오른쪽을 타케테로 대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감각 경험자가 아니라도 사람들 대다수가 단어의 소리에 어울리는 도형의 모양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둥근 도형에 ‘타케테’라는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뇌의 왼쪽 각이랑(angular gyrus)이 손상된 사람들은 모양과 소리를 연결하지 못했다. 이들은 사람들이 왜 삐쭉삐쭉한 도형에 타케테라는 이름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속담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즉 ‘엎질러진 우유를 보고 울어봐야 소용이 없다’(It is no use crying over split milk.)는 문장을 읽고 나서 전후 문맥을 고려해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 노트북을 잃어버려 상심한 친구를 위로하다 왜 갑자기 ‘우유’ 얘기를 하는지 어리둥절해 한다.
각이랑은 측두엽, 두정엽, 후두엽이 접합된 지점이다. 좌뇌의 각이랑은 촉각(왼쪽 두정엽), 청각(왼쪽 측두엽), 시각(왼쪽 후두엽)의 정보가 교차하면서 추상적인 개념을 형성하는 부분이다. 한편 우뇌의 각이랑은 오른쪽 두정엽이 주로 담당하는 공간적 배치를 지각하는 데 관여한다.
따라서 왼쪽 각이랑은 공감각적 은유에 관여하고 오른쪽 각이랑은 공간적 방향성과 관련된 은유를 이해하는 데 작용한다.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 사람도 이제 내리막길이야.” 같은 표현은 오른쪽 각이랑을 통해 해석된다. 인간의 뇌를 영장류나 그 밖의 다른 포유류와 비교해보면 각이랑이 매우 발달했다.
“그 사람 매너는 좋은데 너무 차가와. 촌스러워도 따뜻한 사람이 좋지.”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돼!”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감각 영역의 용어들이 혼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항온동물인 사람이 어떻게 ‘차갑거나 따뜻할 수’ 있으며 ‘달콤한’ 말은 도대체 몇 헤르츠란 말인가. 굳이 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이처럼 은유가 넘쳐 난다. 은유란 다른 것에서 비슷한 점을 간파하는 능력이다.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은 따뜻하고 포근한 잠자리에 들어갔을 때 기분과 공통된 그 무엇이 있다. “넌 정말 예쁜 것 같아!”라는 속삭임을 들었을 때와 혀끝에서 녹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은 어딘가 비슷하지 않은가.
창조적인 사람은 은유에 능해
캘리포니아대 라마찬드란 교수는 언어가 결국은 은유에서 비롯됐고 은유는 공감각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첼로의 음이 바이올린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진동수가 더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동수가 낮을 때 공기의 밀도가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덩치가 큰 동물의 소리가 낮고 작은 동물은 소리가 높기 때문에 우리는 낮은 소리를 무겁다고 느끼는 것이다. 소가 “찍찍”거리고 쥐가 “음매~”라고 소리낸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릴 것인가.
라마찬드란 교수는 “얼핏 봐서는 관계없는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이 은유와 창조성의 핵심”이라며 “창조적인 사람들은 단편적인 사실들을 하나로 통합하거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옮겨 가는 데 능숙하다”고 설명한다.
평범한 예술가와 위대한 예술가의 차이는 테크닉의 숙련도보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나 해석에 있다. 지난해 예술과 과학에서 공감각의 의미를 다룬 책 ‘숨겨진 감각’을 펴낸 네덜란드의 공감각 연구자 크레씨엔 반 캄펜은 “소위 ‘고지식한’ 사람들은 이런 연결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라며 “이런 정도가 심해 은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경이 바로 정신분열증”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각 경험자처럼 생생한 감각의 교차를 체험하지는 못하지만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공감각에 바탕을 둔 은유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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