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보면 색깔을 떠올립니다. 일례로 3, 4, 5는 원색의 노랑, 빨강, 파랑이고요, 13은 흰색과 노란색이 겹쳐진 바나나 같은 이미지고요, 24는 초록색과 수박색이 합쳐진 ‘청치마에 다홍저고리’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그냥 4와 24의 4의 느낌이 같지는 않아요.”
공감각 경험자를 찾는다는 동아사이언스 홈페이지 기사를 보고 이메일을 보내게 됐다는 KAIST 1학년 이현민 씨가 자신의 공감각 경험을 표현한 글이다. 공감각 연구자인 연세대 김채연 교수는 이씨의 메일을 보고 “색-자소 공감각 경험자가 확실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5월 17일 오전 기자는 이씨와 함께 김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최근 귀국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감각 연구를 준비하고 있는 김 교수는 설레는 표정으로 이씨를 맞았다. 진짜 공감각자인지 알아볼 수 있는 테스트를 몇 가지 한 뒤 김 교수는 “그동안 궁금했던 게 있었는데 이제 답을 알 수 있겠다”며 기뻐했다. 영어는 알파벳에서 색을 보는데 한글의 경우 자음, 모음 단위로 색을 보는지 글자 단위로 보는지가 늘 궁금했다고.
“음…, 글자에서 색을 보지만 자음이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모음은 대체로 무채색으로 보여요.”
예를 들어 ‘각’ 자의 경우 ‘ㄱ’은 빨간색으로, ‘ㅏ’는 옅은 회색으로 보인다고. 또 모음은 자음의 영향을 받아 ‘란’의 ‘ㅏ’는 녹색인 ‘ㄹ’ 영향으로 올리브 그린의 색조를 띤 회색으로 보인다.
“언제부터 공감각을 느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요. 중학생 때 무심코 언니한테 얘기했었는데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더라고요.” 이씨는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의 경험이 단순한 상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니터의 숫자를 보고 색을 말해보세요.” 이씨는 노란색으로 쓴 ‘3’을 보고는 바로 “노란색”이라고 대답했지만 파란색으로 쓴 ‘4’를 보더니 한참만에야 “파-란-색”이라고 말했다.
“노란색으로 보이는 ‘3’이 노란색으로 써 있으므로 금방 얘기하지만 빨간색으로 보이는 ‘4’가 파란색으로 써 있기 때문에 망설이게 되는 겁니다. 색-자소 공감각자가 보이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김 교수는 공감각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지각’되는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한국과학영재학교를 졸업하고 올해 KAIST에 입학한 이씨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림을 제대로 배워보라는 선생님 권유로 미술학원도 다녔지만 수학, 과학도 잘 했던 이씨는 과학영재학교를 가게 된 것. 그런데 KAIST에 와서 다시 마음을 바꿨다. 2학년 올라갈 때 학과를 정하는데,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대학에 들어와 홍보동아리인 ‘카이누리’에 가입한 이씨는 KAIST가 계간으로 발행하는 소식지 ‘KAIST 비전’ 여름호에 일러스트를 그리기도 했다. 김 교수는 “유명한 예술가나 과학자 가운데 공감각 경험자가 많다”며 “공감각이 창의력이나 예술성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호호, 그런가요. 아무튼 제가 경험하는 현상이 요즘 한창 연구되는 분야라니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김 교수님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게요. 머리에 전극을 연결해서 하는 실험은 없나요?”
국내 최초의 공감각 피험자인 이씨의 적극적인 태도에 김 교수는 활짝 웃었다. 이씨를 시작으로 다양한 현상의 공감각 체험자들이 찾아와 한국인 공감각 연구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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