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마음도 나약한 아들 녀석을 잘 부탁하네.”
기원전 1250년 그리스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왕국과의 전쟁에 나서기 전, 자기 외아들 텔레마쿠스를 가장 믿을 만한 친구인 멘토에게 맡겼다. 훌륭한 철학자였던 멘토는 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20여 년간 텔레마쿠스를 정성껏 보살폈다. 엄한 아버지, 다정한 친구, 자상한 조언자, 따뜻한 교사가 돼준 멘토 덕분에 내성적인 소년 텔레마쿠스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뒤 신화 속 멘토는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조언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다 많은 사람과 마주치지만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멘토가 멘티(조언을 받는 사람)를 격려하며 이끌어주고 그의 실력과 잠재력을 개발해 성장시키는 지원활동이 바로 멘토링이다. 멘토링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소중한 만남인 셈이다.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뉴하트’를 보면 가슴은 뜨거운데 전문성이 부족한 이은성(지성 분)과 메마른 감정 때문에 뛰어난 실력이 빛바래 버리는 남혜석(김민정 분)이 한 대학병원 흉부외과 최강국(조재현 분) 과장을 만나 환자의 생명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실력 있고 훌륭한 의사로 거듭난다. 또 영화 ‘굿 윌 헌팅’에서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지 못하고 비뚤어져 버린 20살의 하버드대 청소부 윌 헌팅(맷 데이먼 분)이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 분) 심리학 교수를 만나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고 성장한다. 다양한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생생한 역사에서도 좋은 멘토와의 만남으로 훌륭하게 성장한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최초의 여성 수학박사 소냐의 두 남자
6살이 되도록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주위 물건을 집어던지는 야수 같은 아이가 있었다. 태어난 지 19개월 되던 때 열병을 앓으며 눈이 멀고 귀가 먹어 벙어리가 됐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앤 설리번 선생을 만나 교육을 받은 끝에 하버드대에 입학해 우등으로 졸업했다. 결국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회복지사업을 펼친 ‘빛의 천사’가 됐다. 그가 바로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로 유명한 헬렌 켈러다.
설리번 선생은 장애를 극복하려는 헬렌 켈러의 의지와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진실하게 가르쳤으며 헬렌 켈러는 끝없이 노력해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었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설리번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설리번 선생님을 보고 싶어요.” 이처럼 훌륭한 멘토와 만나 도움과 사랑을 받은 사람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여성인 러시아의 소피아 코발레프스키(일명 소냐)도 훌륭한 멘토를 만났다. 1870년 20세의 소냐는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인 바이어슈트라스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무작정 독일 베를린에 있던 그의 집을 방문했다. 더듬거리는 독일어로 개인교습을 받고 싶다고 말하자 바이어슈트라스는 소냐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어려운 문제를 냈다. 소냐는 당시 대학원생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고 4년간 1주일에 2번씩 개인교습을 받을 수 있었다. 바이어슈트라스의 도움과 격려 덕분에 소냐는 편미분방정식 이론을 비롯한 3편의 논문을 썼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소냐는 바이어슈트라스의 제자인 스톡홀름대 미타크 레플러 교수의 초청을 받아 세계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됐다. 레플러 교수가 소냐를 스톡홀름대 교수로 적극 추천했지만 처음에는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소냐는 한 학기 동안 강의를 잘하는 걸 확인받고서야 정식 교수로 임용됐다. 그 뒤 훌륭한 논문을 써 파리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유명한 보르댕상을 받았다. 그가 숱한 역경을 이기고 훌륭한 수학자로 성장하는 데 두 멘토의 역할이 컸다.
퀴리 가문, 과학 명가 이룬 비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멘토링을 통해 위인으로 우뚝 선 과학자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퀴리 일가(一家)다. 과학을 공부하는 전 세계 알파걸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훌륭한 멘토인 마리 퀴리는 멘토링으로 딸과 사위를 방사능 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로 키웠다.마리 퀴리는 인생과 과학연구의 동반자인 피에르 퀴리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지만, 3년 뒤 마차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마리 퀴리는 남편의 자리를 물려받아 소르본대의 첫 번째 여교수가 됐고 계속 연구에 몰두해 1911년 다시 노벨상을 받았다.
과학연구에 헌신하면서도 마리 퀴리는 두 딸 이렌느와 에브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소르본대 교수의 자녀와 한데 모아 품앗이로 가르쳤다. 이것이 마리 퀴리가 한 멘토링의 시작이다. 특히 과학에 열정과 재능을 보인 딸 이렌느에게 “프랑스의 장래를 위해 수학과 물리학을 최대한 열심히 연구하라”고 조언했다.
이렌느는 파리대에 설립된 마리 퀴리의 라듐연구소에 1918년부터 합류해 연구를 시작했고 연구조수로 들어온 프레데리크 졸리오를 만나 1926년에 결혼했다. 이미 퀴리 가문의 학문적 업적과 연구자로서의 열정에 감명을 받은 프레데리크는 부부의 성을 붙여 ‘졸리오-퀴리’라는 성을 사용했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1934년 알루미늄에 알파입자(헬륨원자핵)를 쏴 세계 최초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1년 뒤 ‘인공 방사선 원소의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비록 마리 퀴리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그가 지도했던 후학의 업적이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마리 퀴리의 멘토링은 학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X선 사진기로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는 적십자 활동에 이렌느를 데리고 다녔다. 이때 영향을 받은 이렌느는 남편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자신들의 방사능연구가 전쟁무기로 쓰이지 못하도록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과학발견이 평화적으로 이용되도록 정치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 가문의 멘토링은 계속됐다. 이렌느의 딸인 헬렌과 그 남편도 핵물리학자가 됐으며 그들의 아들, 즉 마리 퀴리의 외증손자도 천문학자의 길에 들어섰다. 마리 퀴리가 시작해 대를 이어 내려온 멘토링 덕분에 퀴리 가문은 과학의 명가(名家)를 이룬 셈이다.
“나는 (비틀린) 손으로 과학을 한다”
멘토링의 중요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를 같은 시대에 같은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지만 다른 평가를 받은 두 여성과학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X선을 이용해 페니실린, 비타민처럼 복잡한 거대분자의 구조를 알아내려고 연구한 도로시 호지킨과 X선으로 DNA의 구조를 밝혀내고자 노력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그 주인공들이다.
도로시 호지킨은 손가락 관절염이 심해 손이 비틀렸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고 “나는 손으로 과학을 한다”고 말하며 복잡한 X선 실험을 정교하게 해냈다. 결국 당시 가장 복잡한 분자구조를 가졌다고 알려진 비타민 B12의 구조를 완벽하게 밝혀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64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생명과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는 DNA구조 발견에 결정적인 실험단서를 얻고도 동료에게 자신의 연구결과를 빼앗겼다. 동료였던 모리스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DNA X선 회절 사진을 제임스 슨과 프랜시스 크릭에게 가져다 줬기 때문이다. 1962년 DNA 이중나선 구조 규명에 돌아간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는 슨, 크릭, 윌킨스만 있었다.
이 두 여성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멘토’에 있었다. 호지킨은 결정학 분야의 권위자인 존 버날이라는 훌륭한 멘토를 만나 성장했고 과학계 동료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운 반면, 프랭클린은 세계 최고의 DNA X선 회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실력과 연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지만 자신의 연구결과를 펼칠 통로를 쉽게 찾지 못했다. 프랭클린이 자신의 날개를 힘껏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줄 멘토를 만났더라면, 우리는 그를 훌륭한 노벨상 수상자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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