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와~ 이거 정말 스릴 있다.”

한 명을 아웃시킬 수 있는 ‘데쓰노트(Deathnote)’를 손에 쥔 연기자가 연신 싱글거린다. 데쓰노트에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은 무조건 아웃된다. 묘한 흥분이 일어난다. 또다른 연기자는 다른 멤버들의 능력을 모두 알고 있다. 이를 간파한 다른 연기자가 은근슬쩍 다른 멤버들의 능력이 무엇인
지 유도 심문했다. 눈짓만으로 동맹이 이뤄지는가 하면 금세 그 동맹이 다른 능력을 지닌 연기자에 의해 깨진다.

이 장면은 지난해 말 방영된 한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준비한 ‘초능력자 편’에서 제작진은 서바이벌 게임에 초능력이라는 요소를 도입했다. 시간 되돌리기, 주변 꿰뚫어 보기, 분신, 데쓰노트, 공간 지배, 불사조, 능력 꿰뚫어보기의 7개 초능력 중 하나를 갖게 된 연기자들의 한판 승부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10% 초반대였던 평소 시청률이 17%를 넘었다.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것은 ‘대체현실게임(Alternative Reality Game)’이라는 장르다. 참여자는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를 넘나든다. 여기에 미디어와 게임 요소가 더해진다. 게임의 미션을 현실에서 수행하도록 하고 적절한 보상을 제시한다. 유치한 설정이지만 이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평
소보다 높았던 것은 대체현실게임 덕분이다. 최근 스웨덴에서는 재미있는 실험이 진행됐다. 제한속도가 시속 30km인 도로에 과속단속 카메라를 설치한 뒤 속도를 위반한 사람들이 낸 벌금을 속도를 지킨 사람들에게 복권으로 줬다.

캠페인이 진행된 3일간 카메라가 설치된 지점을 지나간 차량은 총 2만 4857대. 처음엔 어리둥절했던 주민들이 복권을 실제로 받자 경쟁적으로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다. 캠페인 전에 차량의 평균속도는 시속 32km였지만 캠페인 동안에는 시속 25km로 22%나 감소했다.






재미를 바탕으로 한 약간의 경쟁과 복권이라는 보상이 담고 있는 게임 요소는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켰다. 이처럼 이미 우리는 게임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게임에 내재된 무엇이 우리 행동을 바꾸고 있는 것일까. 현실이 게임이 되고 게임이 현실이 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게임은 현실 속으로 들어와 있다. 정확히 말해 게임을 만들 때 꼭 필요한 게임 디자인 요소가 일상 생활에서 구현되고 있다. 좀 더 박진감 있게 보여주기 위해 신입 은행원의 하루 일상으로 이를 소개한다. 출근·업무·여가로 구성한 신입 은행원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모든 소재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닛산 친환경 자동차 ‘랜드 글라이더’는 실제로 에코 드라이브 경쟁 시스템을 갖췄다. ‘업무’ 부분에 등장하는 게임은 실제로 하나은행이 직원 교육용으로 개발한 게임 ‘팍스하나’를 바탕으로 꾸몄다. ‘여가’ 부분의 ‘나이키플러스’는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만든 달리기 운동 파트너다. ‘와일드라이프레퓨지’ ‘시티빌’은 많은 이들이 현재 즐기고 있는 게임이다. 에피소드에서 허구는 등장인물인 김가상씨와 여러 상황들 뿐이다.

[닛산의 친환경 컨셉트카는 에코드라이빙 경쟁 시스템을 갖춰 운전자들 사이의 연료절약 경쟁을 부추긴다.]

신입 은행원, 2012년 1월 16일 하루 종일 게임만 하다

Scene 1 >;>;>; 출근

은행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김가상씨는 닛산이 내놓은 친환경 자동차 ‘랜드 글라이더’를 구입했다. 그가 이 자동차를 선택한 것은 연료를 더 절약할 것 같아서다.

랜드 글라이더에는 연비를 높이기 위해 ‘에코 드라이브’ 유도 시스템이 적용됐다. 여기까지는 여느 친환경 자동차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주변 운전자와 ‘친환경 운전’을 경쟁하는 기능을 본 순간 가상씨는 망설이지 않았다. 게임처럼 경쟁이 이뤄지면 자연스럽게 연비가 좋아지고 기름값을 아낄 수 있다는 게 가상씨의 속내다.

한파가 몰아친 날, 랜드 글라이더를 몰고 출근하는 가상씨는 히터를 틀어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차량 내부가 무척 추웠지만 에코 드라이브 경쟁 화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며칠 동안 ‘골드’ 등급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챔피언 등급의 운전자는 같은 양의 연료로 10km를 달렸다. 가상씨는 8km밖에 달리지 못했다. 여기서 히터를 틀게 되면 경쟁에서 뒤쳐진다.

차를 몰면서 가상씨는 날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자들과 게임을 하고 있다. 챔피언 등급에 끼려면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지만 경쟁 자체가 재미있다. 게임을 통해 연료비도 절약하고 대기 오염도 줄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가.

Scene 2 >;>;>; 업무

은행에 도착한 가상씨는 컴퓨터를 켠다. 그는 요즘 차세대 금융 시스템을 교육받고 있다. 그런데 교육이 너무 재미있다. 게임 형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먼저 모든 직원을 몇백 개의 팀으로 구성한다. 직원들은 매일 게임에 접속해 문제를 푼다. 여기서 얻은 점수로 팀이 경쟁을 펼친다. 사원들은 자연스럽게 차세대 금융 시스템을 이해하게 된다.

오늘도 가상씨는 게임에 접속했다. 저녁에 지점장이 게임에 유용한 아이템을 성과별로 나눠주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한다. 앗, 그런데 난관에 봉착했다. 미션을 깨기 위한 아이템이 부족한 것이다. 가상씨는 주위를 둘러보다 평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과장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과장님, 저 무기 아이템 4개가 모자란데, 혹시 도움 주실 수 있어요?”

답이 왔다. “가상씨, 업무도 하고 교육도 받느라 힘들지? 아이템은 보냈으니 확인해 보고, 내일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과장에게 받은 아이템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등급을 올린 가상씨는 내일 점심까지 얻어먹게 돼 연신 싱글벙글이다. 이 날 배운 금융 시나리오는 한 달 뒤에 할 업
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Scene 3 >;>;>; 여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가상씨. 피곤했지만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꾸준히 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하루 정도는 건너 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하루도 운동을 거를 수 없다. ‘나이키플러스’를 구매한 다음부터다.

나이키플러스는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코치다. 나이키플러스 마크가 붙은 러닝화와 수신기 역할을 하는 아이폰(아이팟), 센서만 갖추면 준비 끝이다. 먼저 센서를 신발 깔창 밑에 넣고 아이폰을 팔에 붙인 채 달리기를 한다. 아이폰으로 나이키플러스 홈페이지에 로그
인 하면 가상씨의 운동 기록이 자동으로 나타난다. 운동량과 기록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가상씨는 아직 초록색 등급이다. 이 프로그램은 커뮤니티에 가입한 다른 사람들과 운동량을 경쟁하도록 해준다.

가상씨는 며칠 전 커뮤니티 회원들의 사진에서 눈에 띄는 여성 회원을 발견했다. GPS 기능을 켰더니 가상씨와 그녀는 비슷한 코스를 달렸다. 왠지 모를 경쟁심과 그녀에 대한 호기심은 나이키플러스가 가져다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 가상씨는 PC를 켰다. 요즘 흥미삼아 하고 있는 게임 ‘와일드라이프레퓨지’와 ‘시티빌’에 접속했다. 단순해 보이는 소셜게임이지만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게임 내 친구가 많을수록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은 구조이기 때문이다. 게임 덕분에 자주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와도 요즘 연락을 주고받는다.

가상씨는 게임을 하면서 게임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적 시각이 못마땅하다. 와일드라이프레퓨지는 아이템을 구매하면 수익의 절반을 사회단체에 기부한다. 시티빌에서는 2011년 봄 일본에서 최악의 지진해일(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유저들이 적극적으로 모금을 벌였다. 가상씨는 이런 경험을 통해 게임이 오히려 사회 참여를 도울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고 보니 가상씨는 오늘 하루 종일 게임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엇~ 그러고 보니 출퇴근도, 업무도, 여가 활동도 모두 ‘게임스러웠다’. 그래도 삶이 예전보다 더 즐겁고 보람 있다는 느낌이다. 경쟁을 통해 효율과 성취감을 높였고 도전하는 재미도 맛봤고 사회 참여의 뿌듯함도 만끽했다. 모든 것이 게임 덕분인 것 같다. 도대체 게임 속의 어떤 메커니즘이 그의 행동을 바꿨을까.




페이스북이 성공한 이유

BJ 포그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의 행동모델 이론은 가상씨의 궁금증을 잘 설명해 준다. 포그 교수는 “사람의 행동을 긍정적이고 자연스럽게 유발하는 데는 3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동기, 능력, 도화선이 동시에 결합돼야 한다”고 말한다. 동기는 즐거움과 희망, 사회적 수용도로 나뉘며 능
력은 시간, 돈, 육체적 노력, 사회적 일탈 등으로 구성된다. 도화선은 기폭제, 신호다. 진짜 게임 또는 게임 요소가 포함된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성취감과 도전, 뿌듯함을 무의식적으로 더 많이 그리고 쉽게 느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특정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닛산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다른 운전자들과의 경쟁시스템에서 즐거움과 사회적 수용도라는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 자동차 구입 대금은 구매할 수 있는 능력, 친환경 자동차 구매는 최종적으로 닛산 랜드 글라이더를 선택하게 만드는 도화선이다. 이 자동차를 선택한 가상씨는 경쟁, 레벨 업, 보상(연료비 절감) 등 게임적 요소가 디자인된 운전이 늘 즐겁다.

포그 교수는 “대다수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고 태생적으로 게으르다”며 “인간의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요소를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언가를 가르쳐서 억지로 행동으로 이끌기보다는 단순함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행동을 유발하는 데 탁월한 단순함을 보여줬다. 페이스북에 처음 접속하면 기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더 많은 친구들과 연락하라(Connect to more Friends)’와 같은 문구가 없다. 대신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는 문구가 나온다.

연락이라는 행위는 적극적인 유저가 아니라면 쉽게 하기 힘들다. 반면 페이스북에서 아는 사람을 찾아보는 행위는 접근하기 쉽다. 이는 결국 소극적인 유저들을 로그인하게 만드는 동시에 많은 친구들을 찾아보는 페이지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페이스북에 매일매일 접속하는 무서운 습관을 아주 단순한 도화선이 만들어낸 것이다. 포그는 페이스북의 성공에는 게임적 디자인이 숨어 있다고 설명한다.



이밖에도 게임 디자인의 현실 성공 사례는 찾아보기 쉽다. 지난해 말 스타벅스코리아는 연말 사은품 ‘다이어리’ 하나로 무려 164억 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크리스마스 음료 3잔을 포함해 17잔을 마시면 다이어리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통해서다. 증정된 다이어리는 약 30만 개. 이를 음료 값으로 환산하면 약 160억 원이다.

음료 17잔을 먹고 다이어리를 받으려면 약 5만 원 넘게 지출해야 한다. 더군다나 3잔을 의무적으로 먹어야 하는 크리스마스 음료는 약 5000원 가량으로 일반 음료보다 비싸다. 그냥 다이어리 값인 1만 7000원을 내는 게 훨씬 싸다. 하지만 판매된 다이어리는 약 3만 개로 증정된 다이어
리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행동모델 이론을 대입하면 이렇다. 이벤트 기간 동안 커피 한잔만 먹어도 제공받
는 이벤트 쿠폰 한 장은 단순한 도화선 역할을 한다. 페이스북의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와 같은 맥락이다. 이벤트 다이어리라는 보상은 평소에 먹지 않는 비싼 크리스마스 음료의 구매 행위를 유발한다. 포그 교수는 “만일 어떤 사람에게 건강을 보상으로 제시하고 하루에 10분간 걷기 운동을 하는 도화선을 줬다면 그 사람은 조만간 워킹화를 살지도 모른다”며 “신발을 사도록 설득하는 대신 유도하는 도화선이 바로 행동모델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이해하고 특정 행동을 유발하는 데 필요한 갖가지 장치들은 이미 게임 디자인이라는 형태로 현실에 깊숙이 들어왔다. 게임이 지배하는 현실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까.


‘버리는(Disposable)’ 기술이 바꾸는 미래

‘게임의 기술(The Art of Game Design)’ 저자인 제시 셸은 약 1년 반 전 ‘게임포칼립스(Game + apocalypse)’라는 용어를 소개한 강연에서 “게임이 현실로 침투하는 경향이 점점 심해질 것이라며 미래에 우리의 현실 생활이 게임처럼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 그대로 ‘게임으로 인한 종말
(Gamepocalypse)’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개념이 이른바 ‘버리는 또는 일회용 기술(Disposable Technology)’이다. 무선 네트워크가 대중화되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물건에 센서가 달려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이런 세상이 오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게임처럼 바뀐다는 게 셸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센서가 달린 칫솔로 이를 잘 닦으면 자동으로 포인트가 적립돼 칫솔을 교환하는 데 쓸 수 있다. 하루에 세 번, 3분간 양치질을 한 사람에게 포인트를 더 주는 방식도 가능하다.

미국에서 설립된 벤처 ‘그린구스(www.greengoose.com)’는 정확히 셸의 비전을 실현하는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작은 변화가 삶을 즐겁게 만든다’는 비전을 내세운 그린구스는 가정 내 무선 공유기에 작은 녹색 수신기를 달아 스마트폰 앱이나 칫솔, 장난감 등의 센서와 정보를 교환한다. 밤에 양치질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센서가 달린 칫솔을 주고 양치질한 정보를 모아 보상해 준다. 양치질을 시키기 위해 아이와 싸울 필요가 없어진다.

종말이라는 무시무시한 의미가 붙었지만 게임포칼립스의 미래는 오히려 긍정적이다. 과학기술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었다면 게임 요소와 결합한 과학기술, 게임 디자인은 편리함에 가치를 더하고 있다. 현실에서 풀리지 않는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지금부터는 게임을 십분 활용하자. 그 첫걸음의 주인공은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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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게임이 현실인가 현실이 게임인가
PART1. 내가 아직도 게임기로 보이니?
PART2. 게임, 현실을 침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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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과학동아 정보

  • 김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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