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을 내는 미생물을 만들려면 유전자 부품번호 T-123과 SR-2가 필요합니다.”
2025년 수원. 세계적인 주문형 미생물 설계회사인 ‘신소믹스’(Synthomics)의 유전자회로설계부 회의실에서 10여명의 연구원이 복잡한 회로도와 유전코드를 둘러싸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중국의 한 염료회사가 의뢰한 한국의 전통 천연염료인 쪽빛염료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미생물을 만들기 위해 유전자를 설계하고 있는 것. 이외에도 중국 사막지대에서도 잘 자라는 고성장 식물을 만들기 위해 가뭄에도 잘 자라게 하는 유전자부품을 이용해 유전자 회로를 만들 예정이다.
합성생물학 기술이 꿈꾸는 가까운 미래를 가상으로 꾸며봤다. 여러 가지 전자부품을 이용해 회로를 만들 듯 원하는 기능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를 마음대로 디자인하는 시대가 과연 올까.
생체시계 조절하는 ‘스위치’를 설계하다
미국의 제임스 왓슨과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은 1953년 네이처에 발표한 ‘핵산의 분자구조, 디옥시리보핵산의 구조’라는 논문에서 생명의 비밀이 DNA라는 분자의 이중나선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혔다.
그 뒤 과학자들은 생명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는 방법을 찾았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생명체의 다양한 생명현상은 세포핵의 염색체에 들어있는 구조유전자와 조절유전자, 그리고 조절유전자와 상호작용을 하는 조절인자에 의해 일어난다. 이들 유전자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다양한 단백질을 만든다.
구조유전자는 생명체에서 다양한 기능을 하는 단백질을 만드는데 필요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조절유전자는 조절인자와 상호작용하면서 구조유전자의 작동스위치를 켰다껐다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과정을 ‘유전자발현’이라고 하며 조절유전자와 조절인자 사이에 이뤄지는 상호작용을 ‘발현조절’이라고 한다. 이들 유전자는 수없이 다양한 조합을 이루며 면역이나 노화 같은 ‘생체조절 메커니즘’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생체조절 메커니즘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생명과학자들은 유전자발현 현상을 전자공학에 빗대어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특정 기능을 담당하는 유전자를 트랜지스터나 저항 같은 전자부품으로, 그리고 이들 유전자가 만드는 생체조절 메커니즘을 그래픽카드나 사운드카드처럼 독립된 기능을 하는 전자회로로 본다는 뜻이다.
만약 생명체의 수많은 유전자들의 기능을 알아낸다면 이들 유전자를 부품 삼아 원하는 기능을 가진 생명체를 설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전자공학자가 다양한 전자제품의 회로를 설계하듯 말이다.
생명공학자들의 이런 꿈같은 기대는 21세기를 맞으며 ‘유전자 회로’(genetic circuit)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됐다. 2000년 미국 프린스턴대의 스태니슬라스 리블러 교수팀은 세계 최초로 유전자 발현 조절메커니즘을 인위적으로 설계한 ‘진동유전자회로’(Oscillatory genetic circuit)를 만들어 네이처에 발표했다.
대부분 생명체는 시간에 따라 생리활동이나 생체대사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생체시계’(Circadian Oscillator) 조절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식물이 아침에 꽃잎을 폈다가 저녁에 오므리는 현상이나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을 피우는 시기를 조절하는 일, 그리고 사람이 일정한 수면주기 때문에 생기는 시차는 모두 생체시계와 관련된다.
리블러 교수는 몇 가지 조절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조합해 ‘리프레실레이터’(repressilator)라는 인공생체시계회로를 만들었다. ‘억제진동자’라는 뜻의 이 유전자회로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의 스위치인 프로모터(promoter)와 이를 억제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여러 개를 이어 붙여 만든다.
이들 유전자는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단백질을 만드는 다른 유전자를 억제해 생체시계 역할을 한다. 이 유전자 모듈을 특정 기능을 하는 단백질 유전자에 붙여도 작동하도록 표준화한다면 어떤 유전회로에도 사용할 수 있는 스위치가 되는 셈이다.
뭉치면 빛나는 대장균의 ‘유전자 회로’
생명공학자들은 유전자와 단백질 사이의 메커니즘을 이용해 새로운 유전자 회로를 설계하는 매력에 푹 빠졌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하나의 세포 안에서 이뤄지는 유전자와 단백질 사이의 작용을 조절하는 수준을 넘어 세포들 사이에서 신호를 전달하는 유전자회로를 만드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생물은 시간에 따라 세포의 항상성을 스스로 조절하는 메커니즘뿐만 아니라 주변에 같은 종류의 미생물이 있는지 알아내 서로 증식을 촉진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만성폐질환을 유발하는 슈도모나스 균이다.
이 병에 걸리면 몸속에 병원균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는데 병원균이 서로의 증식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미생물의 이런 조절 메커니즘을 ‘정족수 인식’이라고 하는데, 충치 같은 치과질환을 일으키는 병원균이나 송유관이나 수도관을 오염시키는 미생물도 같은 특징이 있다.
200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의 제임스 리아오 교수팀은 ‘인공 정족수 인식회로’를 만들어 이런 생체조절 메커니즘이 없는 대장균에 주입한 뒤 이 유전자회로가 잘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리아오 교수는 대장균의 대사산물인 아세트산을 대장균이 서로를 인식하게 하는 신호 물질로 이용했다. 그리고 대장균이 많이 모일수록 증식 속도가 빨라지게 하는 대신 서로의 아세트산에 반응해 빛을 내도록 했다.
그가 이런 유전자회로를 만드는데 사용한 주요 부품은 무엇일까. 아세트산의 농도가 높아질수록 특정 효소를 많이 만들게 하는 유전자와 이 효소에 반응해 형광물질을 만드는 유전자, 바로 이 2가지 유전자가 그가 사용한 주요 부품이다.
대장균 세포가 많이 모일수록 이들이 내놓는 아세트산의 농도가 높아지고, 그럴수록 아세트산에 반응해 형광물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활발하게 작동해 마치 대장균끼리 모여서 잔치를 벌이듯 빛을 낸다.
리블러 교수와 리아오 교수의 연구는 유전자의 발현 형태를 인위적으로 설계해 실험실에서 구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생명공학자들은 이런 기능을 하는 유전자회로를 다른 유전자회로와 조합해 마치 부품처럼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생명회로 디자이너’ 등장할까?
2003년에 미국 MIT의 생물학과와 전기컴퓨터공학과 연구원들은 ‘합성생물학실험’이라는 수업을 개설했다. 이 수업에서 이들은 각종 유전자 부품을 조립해 새로운 생물 시스템을 만든다는 의미에서 ‘생물벽돌’(BioBricks)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벽돌의 종류가 많을수록 지을 수 있는 집의 종류도 늘어나듯 기능별로 표준화된 유전자 부품들의 데이터베이스(카탈로그)를 만들면 다양한 생물체의 게놈을 디자인 할 수 있지 않을까.
MIT의 드류 엔디 교수는 이미 1000개가 넘는 유전자 부품을 기능별로 분류해 ‘표준 생물부품 등록부’라는 홈페이지(parts.mit.edu)에 정리해뒀다. 이 홈페이지에 가면 전기회로도의 부품 아이콘과 함께 정리된 다양한 유전자 부품의 목록을 볼 수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 ‘생명회로 디자이너’가 유망 직종으로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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