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공생명을 창조하고 있다.”
2007년 10월 6일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인간 유전체 해독에 앞장섰던 미국 크레이그 벤터 연구소(CVI)의 과학자인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합성염색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보도하면서 자극적인 문구를 기사의 제목으로 내걸었다.
인간이 만든 최초의 새로운 생명체가 수주 이내에 탄생할 예정이라는 가디언의 보도에 인터넷 게시판은 인공생명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벤터 박사는 어떤 연구를 해 왔으며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뜨거운 논쟁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합성세포 만드는 첫 단추 끼운 크레이그 벤터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생명에 대해 이해가 깊어졌지만, 과학자들은 아직도 가장 간단한 세균에 대해서조차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지금까지 생물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생물체인 대장균에는 약 4400개의 유전자가 있는데, 이 가운데 기능을 확실히 아는 유전자는 대략 50%에 불과하다.
속을 알 수 없는 ‘블랙박스’를 그대로 남겨둔 채 연구를 하면 유전자의 기능을 잘못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생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유전자, 즉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최소한의 유전자만을 지닌 세포를 컴퓨터의 메인보드처럼 활용하는 일이다.
이런 유전자들의 조합을 ‘최소유전체’(minimal genome)라고 하고, 최소유전체로 만든 세포를 ‘최소세포’(minimal cell)라고 한다. 최소유전체에 대한 연구는 생명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합성생명체를 만들기 위해 설계한 유전자회로를 시험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준다.
벤터 박사의 목표는 생명체의 최소유전체를 알아내 이를 인공적으로 합성한 뒤, 다른 세포에 이식해 생명의 가장 간단한 골격으로 이뤄진 ‘합성최소세포’를 만드는데 있다. 그는 먼저 마이코플라스마 게니탈리움(Mycoplasma genitalium)이라는 미생물이 생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유전자 조합을 알아냈다.
벤터 박사가 이 미생물의 최소유전체를 가려내는데 사용한 방법은 ‘전역 트랜스포존 돌연변이유도법’(global transposon mutagenesis)이다. 생존에 치명적인 트랜스포존 돌연변이를 유전자 전체에 발생시킨 뒤 살아남은 게니탈리움의 유전자에서 최소유전체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게니탈리움의 유전체 전체를 대상으로 *트랜스포존 돌연변이를 무작위로 발생시킨다. 그러면 트랜스포존이 필수 유전자에 삽입된 게니탈리움은 죽고, 비필수 유전자에 삽입된 게니탈리움은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살아남은 돌연변이체들에서 트랜스포존이 삽입돼 있는 유전자를 찾아내 전체 유전자에서 이들을 제외하면 필수유전자의 조합을 찾을 수 있다.
벤터 박사는 이 방법으로 2006년 마이코플라즈마 게니탈리움에 존재하는 525개의 유전자(482개의 단백질유전자와 43개의 RNA유전자)가운데 387개의 단백질유전자와 43개의 RNA유전자를 필수유전자로 골라냈다. 그리고 이 연구결과에 2007년 ‘최소세균유전체’(minimal bacterial genome)라는 제목을 달아 미국 특허청과 세계지적재산권기구에 특허를 신청했다.
유전체 이식으로 ‘종’을 바꾸다
최근 유전공학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변형시키거나 자연에 존재하는 유전자를 다른 생명체에 이식하는 방법으로 발광물고기나 복제양 같은 ‘변형된 생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유전자 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 경우는 아직 없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인공으로 합성한 유전체를 막으로 둘러싸고 여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면 이런 일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이때 가장 중요한 일은 생명의 설계도면인 커다란 유전체 DNA를 어떻게 합성하고 이를 어떻게 손상 없이 다룰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벤터 박사는 가디언의 보도가 나가기 두 달 전인 2007년 8월 3일 사이언스지에 마이코플라스마 마이코이데스(Mycoplasma mycoides)라는 미생물의 유전체 DNA를 분리해 마이코플라스마 카프리콜럼(Mycoplasma capricolum)이라는 미생물 세포에 이식해 종을 변환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즉 A종의 세포에 B종의 유전체를 이식하면 A종이 B종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다. 비록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미생물에서 유전체 DNA를 분리해 사용한 실험이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세균의 유전체 같은 커다란 크기의 DNA를 세포를 손상시키지 않고 발현시켰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달리 얘기하면 ‘합성최소세포’를 만드는 중간 단계를 완성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벤터 박사의 연구흐름을 되짚어보면 그가 앞으로 시도할 연구의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이코플라스마 게니탈리움의 연구에서 밝혀낸 필수유전자 정보를 활용해 최소유전체의 DNA를 설계하고 인공적으로 합성한 다음, 유전체이식 기술로 이 합성 DNA를 마이코플라스마 카프리콜럼 세포에 이식하는 일이다.
게니탈리움의 필수유전자가 무엇인지 이미 밝혀냈고 유전체이식 기술도 확립했기 때문에 남은 과제는 완전한 최소유전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일이다. 벤터 박사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라보라토리움의 최소유전체 DNA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벤터 박사는 이미 2003년에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 ΦX174의 유전체 DNA(약 5.4kb)를 2주 만에 합성하는데 성공한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보다 약 100배나 긴 DNA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합성한 최소유전체를 이용해 몇 주안에 합성세포를 만들겠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탄생할 새로운 종의 세포는 ‘실험실에서 만든 마이코플라스마’라는 뜻의 ‘마이코플라스마 라보라토리움’(Mycoplasma laboratorium)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합성세포 기술로 지구온난화 막을 터
벤터 박사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몇 주안에 합성세포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그뒤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최소유전체 DNA를 아직 합성하지 못했거나 최소유전체를 합성했지만 유전자 서열을 잘못 설계해 살아있는 합성세포를 만드는데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주 작은 문제를 해결하느라 조금 지체하고 있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벤터 박사는 합성최소세포를 만드는데 성공하면 이산화탄소를 다량 흡수해 부탄이나 프로판 같은 연료를 생산하는 균주를 만들어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과학자들은 일부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그에게 공감하고 있다.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유전자만 갖춰 세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크게 줄이고, 원하는 물질을 대량으로 빠르게 생산하도록 합성최소세포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마이코플라스마에 기반을 둔 현재 유전체 설계 수준을 뛰어 넘어 다양한 유전체를 설계하고 이를 구현해 낼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여하튼 벤터 박사의 합성유전체와 반(半)합성세포 연구가 인간이 새로운 세포를 합성하는 ‘생명 2.0’ 시대를 한층 앞당기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트랜스포존*
염색체상의 어떤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DNA 단위. 유전자 사이를 건너다닐 수 있기 때문에 ‘점핑유전자’(jumping gene)라고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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