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년전 제4빙하기가 끝날 무렵. 며칠을 굶은 원시인 ‘따따’ 앞에 난폭한 멧돼지가 나타났다. 따따는 순간 ‘싸울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교감신경계는 이미 에피네프린과 코르티솔 호르몬을 분비해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혈관을 수축시켜 근육에 산소를 공급했다. 노르에피네프린은 정신은 또렷하게, 시야는 좁게 만들어 멧돼지의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볼 수 있게 했다.
멧돼지가 체중을 뒷발로 옮기는 순간, 따따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급하게 도망치면서도 따따는 함정에 만들어 놓은 작은 표식을 찾았고, 그곳에 이른 순간 풀쩍 뛰어넘었다. 멧돼지는 깊은 함정에 빠졌고, 사냥은 대성공이었다.
현재, 새벽 두시가 지날 무렵. 시험이 내일로 다가온 고등학생 철수는 눈이 말똥말똥하다.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질 법한데 공부는 더 잘됐다. 에피네프린과 코르티솔 호르몬은 뇌에 대량의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했고, 노르에피네프린은 뇌를 깨어있게 했다. 철수는 이날 밤새 공부할 수 있었다.
42.195km를 쉬지 않고 뛰어야 하는 마라톤. 선수들은 2시간이 넘게 달리면서도 ‘2시간의 벽’을 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100년전에는 3시간이 마의 시간대였다. 1908년 미국의 존 헤이드 선수가 런던올림픽에서 2시간 55분 19초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3시간의 벽’을 넘었다. 그 뒤로 마라톤 선수들은 ‘2시간 30분의 벽’ ‘2시간 10분의 벽’을 넘었고, 2003년에는 케냐의 폴 터갓 선수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2시간 5분의 벽’을 넘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다. 극한 상황에서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강한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환경에 적응한 내면의 ‘힘’
캐나다의 내분비학자 한스 셀리에는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이를 설명했다. 셀리에 박사가 1936년 과학전문지 ‘네이처’에서 설명한 스트레스는 현재 신경정신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차이가 많다. 지금은 스트레스를 외부에서 가해지는 부정적인 자극이라고 표현하지만, 그는 스트레스를 외부자극에 대한 신체 내부의 ‘반응’이라고 정의했다. 특히 근육이 강화되는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물리학에서 스트레스는 어떤 물체에 가하는 외부의 힘을 뜻한다. 스펀지를 누르는 손가락 힘이나, 칼을 만들 때 쇠를 두드리는 망치의 힘이 모두 스트레스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는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서울대 생명과학부 김경진 교수는 “스트레스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라며 “스트레스는 위험이 닥쳤을 때 순간적으로 큰 힘이나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고, 전염병이 돌 때 자가치유능력이나 면역력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스트레스가 인간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례로는 전쟁을 들 수 있다. 전투 상황에서는 코르티솔 호르몬이 분비돼 근육이 긴장하고 감각기관이 예민해져 위험에 빨리 대처할 수 있게 돼 생존확률이 높아진다. 또 노르에피네프린 호르몬?이 분비되며 집중력이 높아지기도 한다.
김 교수는 “인간은 스트레스를 통해 극한 상황과 환경에 대처하고 적응해왔다”며 “환경에 적응하는 장기적인 신체변화를 진화라 한다면, 스트레스는 결과적으로 인간을 진화하게 한 내면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스트레스로 근육 키운다
운동선수는 훈련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이용한다. 경희대 스포츠의학과 저압저산소센터 남상석 박사는 “훈련 자체가 일종의 스트레스”라며 “근육을 단련하는 사람은 스트레스로 근육을 키우는 셈”이라고 말했다.
무거운 아령이나 역기를 들어 올린다고 근육이 강해지지는 않는다. 근육을 강하게 만들려면 근육이 견디는 힘보다 강한 힘을 지속적으로 줘 근섬유를 일부러 파열시켜야 한다.
남 박사는 “예를 들어, 5kg의 아령을 10~12번씩 세 번에 걸쳐 들어 올린 뒤 더 이상은 힘들어 들 수 없을 때 5kg이 자신의 근육이 견디는 힘이라 생각할 수 있다”며 “힘들다고 생각했을 때 근육을 사용하면 근섬유가 파괴된 뒤 더 굵고 튼튼한 근섬유가 재생돼 강한 근육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남 박사는 “시합 중에 스트레스 호르몬을 측정하기는 힘들지만 상대와 일대일로 겨루는 태권도나 권투 같은 종목에서도 스트레스는 적절한 긴장감을 유발해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노르에피네프린이 분비되면 선수의 시야가 좁아져 상대에게 오랫동안 집중할 수 있고, 에피네프린 호르몬?은 맞은 부위의 통증도 잘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나 군인만 스트레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스트레스로 능률을 높인다. 흔히 밤에 잠을 쫓기 위해서나 집중이 잘 안 될 때 커피를 마시는데 커피에 포함된 카페인 성분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한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스트레스센터 임성견 연구원은 “커피에 함유된 카페인 성분은 뇌를 각성 상태로 만들고 근육에 글리코겐 같은 영양분을 비축하는데, 스트레스 호르몬인 노르에피네프린과 코르티솔 호르몬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스트레스가 주는 적당한 긴장감은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중요한 시험이나 업무가 끝나고 덜컥 병에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갑자기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하이오주립대 의대 퍼다우스 대버 교수가 2005년 4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적당한 스트레스는 백혈구의 숫자를 늘려 면역 체계를 강화한다. 다만 장기간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르티솔 호르몬이 백혈구를 만드는 림프구의 분비를 감소시켜 면역기능을 떨어뜨린다.
스트레스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부모가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할 때는 물론, 그 반대의 상황에서도 스트레스는 힘이 된다. 지난 어버이날 15세 남학생이 전신에 화상을 입으면서도 화염에 휩싸인 건물 속에서 아버지를 업고 나와 목숨을 살렸다. 사랑의 힘이기도 하지만 부모가 위험에 처했다는 스트레스로 인해 강한 힘과 집중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슈퍼맨의 힘은 모든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는 슈퍼맨의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은 아닐까.
코르티솔 호르몬
부신피질에서 분비되며 단백질을 분해해 포도당으로 전환시킨다.
노르에피네프린 호르몬
뇌의 시상하부와 전두엽 피질에서 분비되며 뇌가 깨어있게 한다.
에피네프린 호르몬
부신수질에서 분비되며 심박수를 증가시키고 혈관을 수축시킨다. 아드레날린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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