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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이버 공간에서 특효 약물 디자인

질환단백질 구조를 알면 해법이 보인다

최근 생명공학의 발전은 단백질 구조를 좀더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한다. 이에 따라 실험실이 아닌 컴퓨터 화면 위에서 새로운 약물을 디자인할 수 있다. 질환단백질의 정보를 가상공간에서 마음대로 주물러 질병 정복에 앞장서고 있는 최첨단 약물발굴 현장으로 가보자.


지난 2000년 미국 화학회는 그해 가장 돋보이는 화학연구 10가지를 선정해 발표했다. 이 중에는 미국의 제약회사 머크사가 개발한 에이즈 치료제 ‘프로테이즈 억제제’가 포함됐다. 에이즈 바이러스(HIV)의 단백질 분해효소인 프로테이즈는 HIV가 숙주세포에 침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에이즈 바이러스의 생존에 필수적인 단백질이다. 프로테이즈 억제제는 숙주세포의 표면 단백질을 분해하는 프로테이즈의 작용을 억제해 숙주세포 내로 에이즈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과정을 막는다. 증상을 완화시키는 기존의 에이즈 치료제와는 개념부터 다른 근본치료제다. 프로테이즈 억제제는 현재 6종 이상의 약이 시판되고 있으며, 뛰어난 효과로 에이즈 감염 환자의 생존율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고 있다. 프로테이즈 억제제는 어떻게 개발됐을까.
 

모니터 위의 단백질은 입체안경을 끼고 보면 실감난다.



컴퓨터에 설치한 실험실

머크사는 프로테이즈 효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단백질이 어떻게 생겼나를 알아보자는 생각에서다. 마침내 1986년 프로테이즈의 3차원 구조가 X선 회절법에 의해 밝혀졌고, 머크사는 신약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프로테이즈 생김새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에 대입해 프로테이즈의 골격 구조와 표면 구조를 모니터 상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특히 단백질의 활성부위를 확대해 관찰하고, 이 부위에 맞는 약물을 가상적으로 디자인해 모니터 상에서 맞춰보길 수천차례. 이런 과정을 통해 프로테이즈의 활성부위에 꼭 들어맞는 프로테이즈 억제제가 개발됐다.

이처럼 특정 질환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파악하고, 컴퓨터를 이용한 합리적인 디자인을 통해 신약을 만드는 학문을 ‘구조약물디자인학’(SBDD, Structure -Based Drug Design)이라고 한다. 전통적 신약발굴은 약효를 나타내는 천연물 또는 효소기질 등의 화학구조를 토대로 합성화학자의 변형을 통해 신물질을 발굴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구조약물디자인학을 이용한 신약발굴은 질환단백질의 형상화를 통한 3차원적 접근, 컴퓨터를 활용한 빠른 계산능력과 데이터 처리, 그리고 합리적인 디자인이라는 면에서 실험실에서 시약을 합성하거나 새로운 분자를 고안하는 고전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사이버 공간에 실험실을 차려놓고 치밀한 계산을 거쳐 인간의 의도대로 새로운 분자를 설계하는 분야가 바로 구조약물디자인학이다. 연구대상을 2차원이 아닌 3차원 구조로 확장해 분자의 형태, 표면특성, 활성부위의 구조를 밝히는 구조약물디자인학은 전통적인 실험실 위주의 분자설계보다 훨씬 정확하게 원하는 약물을 만들 수 있다. 또한 개별적인 분자 상호작용을 계산할 수 있으며 자료를 쉽게 저장, 편집, 복제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어 신약개발에 없어서는 안될 최첨단 무기다.


병의 원인은 단백질의 변형

 

병의 원인은 단백질의 변형

프로테이즈 억제제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컴퓨터를 이용해 신약을 설계하려면 먼저 대상이 되는 질환단백질의 생김새를 파악해야 한다. 그럼 질환단백질이란 무엇일까.

우리 몸의 수억가지 생리현상은 거의 모두가 단백질에 의해 조절된다. 사람 몸에 병이 생긴다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해 단백질이 제대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과하게 활동하는 경우, 또는 외부에서 침입한 미생물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정상적인 단백질이 변형되거나 전혀 새로운 단백질이 인체 내에 생겨 질병을 일으킨다. 이처럼 병의 원인이 되는 단백질을 질환단백질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이런 질환단백질의 기능을 억제하거나, 미생물 침입자의 단백질 기능을 제한하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질환단백질의 생김새, 즉 입체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다. 하지만 이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단백질은 단순한 유기분자가 아니라 체내에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 특정 역할이 정해지는 생체분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체 단백질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단백질이 체내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단백질은 게놈이라 불리는 DNA 염기서열 정보에 따라 체내에서 합성된다. 지난 2001년 2월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로 밝혀졌듯이, 인간의 DNA는 30억 염기쌍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 속에는 전화번호부 2백권 정도의 정보가 포함돼 있다.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네염기로 구성된 이 서열 속에 우리 자신의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하고, 숨쉬는 모든 행동에 필요한 정보가 유전자로 포함돼 있다.

단백질은 유전자 안에 포함된 정보에 따라 만들어지고 그 역할도 결정된다. 유전자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단백질은 마치 일정한 활동만이 입력된 로봇처럼 생체 내에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한다. 그리고 이런 단백질의 활동이 집약돼 생리현상이 일어나고 생명이 유지된다.


치료 가능한 질환단백질 5백여개

이처럼 단백질은 생명현상을 주관하는 매우 중요한 물질이다. 그렇다면 단백질은 어떻게 생리현상을 조절할까.

단백질의 비결은 바로 독특한 3차원 입체구조에 있다. 적혈구 속에는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이 들어 있다. 헤모글로빈 가운데는 철(Fe) 원자가 끼어 있어 산소와 결합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복잡하고 미세한 구조로 돼 있는 헤모글로빈은 산소의 농도가 높은 곳에서는 3차원 구조가 변하면서 철 원자와 결합하고 있던 산소분자를 떨어뜨린다. 산소가 떨어진 자리는 구조가 변해 이산화탄소가 결합하기 알맞은 구조로 바뀐다. 적혈구가 산소를 운반하는 원리다. 이 밖에 혈당량을 조절하는 인슐린, 근육을 이루는 미오신과 액틴, 다당류를 분해하는 아밀라아제, 지방을 분해하는 리파아제 등도 3차원 입체구조의 미묘한 차이로 생리현상을 조절한다.

이처럼 단백질은 3차원 입체구조의 아주 작은 차이로 인해 생체 내의 수억가지 생리기능을 조절한다. 당연히 인체에 존재하는 모든 단백질은 3차원 입체구조를 이루고 있다. 단백질의 3차원 입체구조는 그 기능과 밀접히 연관돼 있기 때문에 모양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바로 생체기능에 이상이 생긴다.

따라서 단백질의 3차구조를 밝히는 일은 생물체의 주요 기능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즉 단백질의 구조가 밝혀지면 그 구조로부터 단백질이 하는 일을 알 수 있거나 적어도 추측이 가능하고, 나아가 병의 원인이 되는 질환단백질 구조에 적합한 신약을 개발할 수 있다. 많은 구조약물디자인학자가 단백질 구조연구에 매달리는 이유다.

현재 인간의 체내에서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는 약 8천개 정도가 알려져 있다.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이 숫자는 약 3-4만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기능을 조절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질환단백질은 현재까지 5백개 정도가 알려져 있다. 시중에 알려진 약의 대부분은 이 5백개의 질환단백질을 표적으로 삼는 약인 셈이다. 하지만 최근의 단백질 연구는 인체 내에서 약물의 표적이 될 수 있는 단백질 수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 앞으로 2-3년 내에 질환단백질 수는 3천-4천개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정돼, 구조약물디자인학의 적용범위는 매우 넓어질 전망이다.


박테리아 정보가 결정적 도움

인체 내 단백질의 기능과 질병의 원인이 되는 질환단백질의 모양을 알면 이들의 기능과 작용 메커니즘을 이용해 질환단백질의 기능을 조절하는 신약을 디자인하는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단백질의 구조는 어떻게 파악할까.

단백질 분자가 이루고 있는 3차원 입체구조 연구는, 현대 생명공학이 발전하기 이전인 1900년대부터 구조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단백질 구조 파악의 가장 고전적인 방식은 핵자기공명법(NMR)이나 X선 결정학이다.

X선 결정학은 단백질을 결정화해 X선을 쏘인 후 나오는 빛의 회절 패턴을 분석해 단백질 구조를 계산한다. 이를 위해서는 양질의 단백질 결정과 높은 에너지의 X선이 필요하다. X선 세기에 따라 분해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방사선가속기에서 나오는 X선을 사용해 비교적 작은 결정이라도 구조를 알 수 있다. 방사선가속기는 미국, 일본 등 전세계 7개국 만이 보유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그 중 하나로 포항 가속기연구소에 제3세대 가속기가 있다.

최근에는 최첨단 컴퓨터공학과 전산학적 도구를 이용해 좀더 쉽게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고 있다. 바로 포스트게놈프로젝트의 주역인 단백질체학(프로테오믹스)이다. 인체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을 컴퓨터를 이용해 체계적으로 밝히고 관리하는 학문이다.

프로테오믹스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게놈정보를 이용해 해당 단백질의 기능은 물론 구조까지 밝히고 있다.

또한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축적돼 있는 박테리아, 효모, 초파리 등의 단백질 정보도 사람의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의 게놈크기는 사람에 비해 작기 때문에 많은 미생물의 염기서열이 해독돼 있고 단백질 구조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정보는 사람 단백질 구조를 밝히는데 유용하게 이용된다.


글리벡 탄생의 비밀

X선 결정학과 핵자기공명법, 그리고 프로테오믹스로 해당 단백질의 구조가 밝혀지면 새로운 약물 디자인이 비로소 시작된다. 단백질 구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각종 정보와 수식을 컴퓨터에 대입해 3D 형상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단백질의 입체영상을 컴퓨터 화면 위로 띄울 수 있다.

마우스만 움직이면 3차원 입체영상의 단백질 구조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질환단백질의 활성 부위를 확대해 관찰함으로써 이 부위에 맞는 화합물을 가상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고, 질환단백질의 활성부위에 맞춰보는 일도 가능하다. 이같은 작업을 ‘가상 약물디자인’(virtual drug design)이라고 하는데, 구조약물디자인학의 기본과정이다.

구조약물디자인으로 개발된 신약으로는 만성골수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이 대표적 예다. 만성골수백혈병 환자는 ‘C-ABL’이라는 비정상적인 단백질을 갖고 있다. 이 단백질은 세포의 분화를 조절하는 타이로신 복합체를 활성화시키는 효소다. 정상적인 세포의 경우 타이로신은 세포 분열이 필요한 경우에만 합성돼 세포의 증식을 촉진한다. 하지만 백혈병 환자는 C-ABL이 끊임없이 타이로신을 활성화시켜 세포를 무한정으로 분열시킨다. 바로 백혈병이다.

스위스의 노바티스사는 먼저 C-ABL 효소의 3차원 구조를 파악했다. 그런 뒤 이 단백질의 구조를 컴퓨터 화면 위로 옮겼다. 이때부터 질환단백질인 C-ABL의 기능을 억제하기 위한 가상약물 디자인이 시작된다. 수많은 시도와 연구 끝에 C-ABL와 결합해 타이로신 복합체를 만드는 ATP 대신, 이 자리에 꼭 들어맞는 약물을 개발했다. 바로 글리벡이다.

하지만 이 결과는 어디까지나 가상공간에서 얻은 것일 뿐이다. 컴퓨터 상에서 이뤄지는 일이 실제로 똑같은 결과를 낼 것인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이를 위해 시험관 내에서 글리벡이 ATP를 대신해 C-ABL과 실제로 반응하지는 확인하는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결과는 NMR을 이용한 복합체 실험, X선을 이용한 복합체 구조규명 실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확인된다.
 

글리벡 탄생의 비밀
 


자동차 3백만대의 가치

새로운 약물을 만드는 일은 마치 미지의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찾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 과정에는 크게 두가지 개념이 사용된다.

단백질을 자물쇠, 치료약을 열쇠라 했을 때, 모든 종류의 ‘후보열쇠’를 만들어 대량으로 자물쇠에 맞춰보는 방법을 고효율약효검색(HTS, High Throughput Screening)이라고 하면, 자물쇠의 내부 구조를 파악하고 컴퓨터를 이용한 합리적인 디자인을 통해 열쇠를 만드는 과정은 구조약물디자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자물쇠(단백질)의 입체구조는 X선 결정학과 NMR, 프로테오믹스를 통해 밝히고, 이 입체 모양을 컴퓨터를 이용해 눈으로 들여다보며 활성부위에 맞는 화합물을 디자인하거나 찾는 것이다.

구조약물디자인학은 첨단 생명과학기술과 컴퓨터기술이 융합된 신약발굴 기술이며, HTS와 함께 신약 후보 발굴을 위해 선진 제약회사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는 단백질 구조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업적을 가진 우수한 연구자가 많고, 방사선가속기와 BT, IT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신약 한개를 발굴하면 자동차 3백만대를 수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스위스나 스웨덴 같은 작은 나라가 국민소득 수위권의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신약산업이 발달돼 있기 때문이다. 자원이 빈약하고 경제적 난국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가 변화의 시대 21세기를 맞아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은 지식집약 산업인 신약 발굴을 통해 고부가가치의 새로운 약을 만드는 일일 것이다.

2002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전영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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