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모니터를 보세요. 현재 아만자 씨의 위 상태는 이렇습니다. 암덩어리가 보이시죠? 혈관과 신경이 다치지 않도록 종양을 잘 분리해 떼어낼 것입니다.”
아만자가 모니터의 의료영상 시뮬레이션을 지켜보며 힘없이 묻는다.
“저…, 수술은 잘 되겠죠?”
“아, 모든 수술 과정은 워드프로세서형 수술로봇 ‘레오나르도’가 집도할 테니 염려 놓으세요. 다만…”
“다만 뭐요?”
“아만자 씨의 전립선에서 또다른 암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초기암이기는 하지만.”
“뭐라고요? 하나도 모자라 둘씩이나…”
“아! 하지만 걱정 마세요. 양성자치료기를 사용하면 수술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양성자빔으로 암세포만 정확히 조준해서 태울 겁니다.”
암이 또 있다는 말에 놀랄 겨를도 없이 의사가 말을 이었다.
“혹시 치료 뒤 암이 재발하게 되면 ‘아미타닙’(amitanib)이라는 신종 다표적항암제를 사용할 겁니다. 하루에 한 번씩 먹는 알약인데 구토 같은 부작용도 없고 머리도 빠지지 않죠. 모든 치료 과정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 인상 좀 펴고 크게 웃으세요. 하하하!”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앞둔 환자에게 크게 웃으라니 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의사의 자신있는 태도에 한편 안심도 된다. 8년 전 위암으로 세상을 뜬 아내가 조금만 버텨줬더라면….
그리 멀지 않은 2015년. 위암환자 아만자씨가 국립암센터에서 의사와 나눌 대화의 일부다. 가상 상황이지만 허무맹랑한 얘기만도 아니다. 암 세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믿음직한 삼총사가 있기 때문이다. 수술로봇과 양성자치료기, 그리고 표적항암제가 그 주인공이다.
암을 제거하는 섬세한 손길, 로봇 손
자신의 배 속에 있는 종양을 떼어내기 위해 배를 20cm 정도 절개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병은 고쳐야 하지만 통증과 수술 뒤 남는 끔직한 흉터는 상상만 해도 두렵다. 고통과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수술에 대한 바람은 외과 수술에 ‘최소침습수술’(minimal invasive surgery)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불러왔다.
최소침습수술은 절개 부위를 최소화하는 수술법이다. 대표적인 예가 배에 작은 구멍 몇 개만 뚫고 내시경과 수술도구를 집어넣어 수술을 하는 복강경 수술이다. 하지만 2차원 영상으로 멀고 가까움의 구별이 어렵고 골반강내(골반뼈로 둘러싸인 부분)처럼 좁은 공간에서는 수술기구를 자유롭게 조작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한 것이 바로 복강경 수술로봇이다. 수술칼, 가위, 소작기(전기나 초음파로 수술부위를 절개하는 기기) 같은 수술장비를 로봇팔에 장착하고 외과 의사가 각각의 로봇팔을 원격으로 제어해 수술을 한다.
로봇손은 사람 손을 넣을 수 없는 좁은 구멍으로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절개를 조금만 해도 된다. 게다가 로봇은 손 떨림 제거장치와 미세작동 기능 덕분에 수술 부위의 혈관과 신경을 정확히 확인하면서 정교하게 암을 제거할 수 있다.
현재 가장 많이 보급된 최첨단 로봇수술시스템은 ‘다빈치’라는 로봇이다. 다빈치 수술시스템은 ‘로봇 카트’, ‘수술 콘솔’과 ‘영상전달장치’로 이뤄져 있다. 로봇 카트는 실제로 수술을 하는 로봇팔 부분으로 복강경 카메라를 조종하는 팔과 수술기구를 작동하는 3개의 팔로 이뤄졌다. 수술용 기구를 조작하는 팔은 7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의사의 손동작을 그대로 전달한다.
수술 콘솔은 의사가 실제로 수술을 하는 장치다. ‘마스터 기구조정장치’ 앞에 앉아 입체영상을 보며 수술기구를 조작하면 이 동작이 그대로 로봇 카트에 전달된다. 또 수술 콘솔 아래 있는 발판을 밟아 전기 소작기와 수술기구 조종장치, 복강경 카메라 중 조작할 기구를 선택한다. 영상전달장치는 수술 부위를 10~15배 확대한 입체영상을 수술 콘솔에 전달한다.
다빈치는 2005년 4월 연세대의대 세브란스 병원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뒤 지금까지 전립선암, 위암, 자궁암, 대장암 수술 등 약 200차례 수술을 했다. 출혈과 통증이 적고 합병증이 생길 위험성이 낮으며, 입원 기간이 짧고 회복도 빠르다는 평이다.
2015년이 되면 로봇 수술은 어디까지 발전할까. 현재 수술로봇은 수술의 정확도를 높이고 통증과 상처를 최소화하는 보조도구 정도지만 앞으로 수술 전 과정을 로봇 혼자서 하고 의사는 수술과정을 확인만 하는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여기에는 가상현실 구현시스템과 ‘촉각 장비’(haptic device)를 결합해 만든 ‘수술계획장비’를 이용한다. 진단장비로 환자의 수술 부위를 3차원으로 재구성한 뒤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으로 최적의 수술방식을 결정한다. 이 과정을 컴퓨터에 입력해 로봇이 수술의 전 과정을 진행하게 한다. 마치 워드프로세서로 모든 편집과정을 마친 뒤 출력 버튼을 누르면 화면과 똑같은 출력물이 나오는 상황과 비슷하다.
수술 전 촉각 장비로 환자의 수술부위를 직접 만지면서 수술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수술 성공률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뿐만 아니라 수술 시간도 상당히 단축된다. 이런 워드프로세서 형 수술로봇이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
암치료의 절대무공, 양성자치료
수염이 하얀 무림의 고수가 두부 위에 벽돌 한 장을 올려놓고 다시 그 위에 두부를 올려놓는다. 팔을 천천히 움직여 하늘을 향해 커다란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손으로 벼락같이 두부를 내리친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벽돌이 두 동강 났다. 하지만 벽돌 위아래에 있던 두부에는 상처 하나 없다. 중국 무술 중 최고의 파괴력을 가진 장법 철사장(鐵沙掌). 철사장은 적에게 아무런 상처를 남기지 않고 내장만 상하게 하는 무공이다.
무협소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암치료에 적용되고 있다. 무림 고수의 손에서 나오는 강력한 기의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양성자치료기에서 나오는 양성자 빔이다. 양성자 빔은 수소 원자핵의 흐름이다.
양성자치료법은 방사선치료의 일종이다. 방사선 치료는 X선이나 전자빔을 인체에 쏴 암세포를 파괴한다. 지금까지 환자치료에 많이 사용했던 X선은 체내에 에너지가 흡수되는 범위가 넓어 암 주변의 정상세포까지 손상을 입혔다.
하지만 양성자 빔은 X선과 달리 체내에서 멈추기 직전 대부분의 에너지를 내놓고 사라진다. 이는 양성자 빔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인데,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발산되는 지점을 ‘브래그 피크’(Bragg peak)라고 한다. 피크가 생기는 지점은 빔의 세기와 통과하는 물질에 따라 달라진다. 인체를 투과하는 양성자 빔의 세기를 조절하면 마치 철사장을 익힌 무림 고수가 두부 사이의 벽돌을 깨듯 암세포만 정확히 조준해 파괴할 수 있다.
양성자치료는 중요한 세포조직 주변에 암이 발생해 외과 수술로 제거하기 힘든 골종양이나 전립선암에 효과가 좋다. 특히 눈 뒤쪽에 발생하는 안구암은 외과수술을 할 경우 안구를 적출해야 하지만, 양성자치료법을 사용하면 수술 없이 완치가 가능하다. 또 X선 치료를 오래 할 경우 성장저해가 우려되는 유아에게도 탁월한 치료효과가 있다.
하지만 양성자치료가 모든 암에 만능은 아니다. 간암, 폐암, 유방암, 기타 재발암은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치료효과가 크게 달라지며, 여러 부위에 전이된 암에 대해서는 X선 치료법과 치료효과가 비슷하다. 특히 가슴이나 배에 있는 암은 환자가 숨을 쉴 때마다 불규칙하게 움직여 양성자 빔을 정확하게 조준하기 힘들다.
방사선치료는 환자라는 유리병 속에 있는 암이란 이물질을 제거하되 그 유리병을 깨뜨리지 않고 치료하는 방법이다. 이런 관점에서 양성자치료는 암환자들에게 꿈의 치료라 불릴만 하다. 최근 방사선치료기에 ‘호흡추적장치’를 부착해 호흡에 따른 움직임을 고려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돼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다. 양성자치료가 한 단계 더 발전한다면 2015년 쯤 암치료의 절대무공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암세포만 공격하는 저격수, 표적항암제
수술로봇의 섬세한 손길도, 무술권법 같은 양성자 빔의 브래그 피크도 잡지 못하는 암이 있다. 백혈병이나 악성림프종 같은 혈액암은 장기의 일부에 암 덩어리가 생기는 보통 암과는 달리 혈액을 타고 암세포가 빠른 속도로 퍼진다. 또 암세포가 넓게 퍼져 있거나 재발해 수술이 어려운 경우도 속수무책이다. 이런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 화학요법이다.
화학요법은 알약을 먹거나 약물을 정맥에 투여하는 치료법으로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에 비해 간단하지만 이미지는 썩 좋지 않다. 탈모, 구토, 검게 변한 피부처럼 고통스러운 모습이 떠오른다. 항암제는 암세포처럼 빠르게 분열하고 증식하는 세포를 죽이는데, 골수, 소화관, 모낭에서 빠르게 자라는 정상세포가 함께 손상을 받기 때문이다. 마치 도시에 숨어든 테러리스트를 잡기 위해 던진 수류탄이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과 비슷하다.
최근 들어 암세포만 골라 죽이는 ‘표적항암제’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암세포가 증식할 때 내놓는 유전물질과 단백질을 표적삼아 암세포만 선별해 공격하는 ‘저격수’인 셈이다. 저격수의 능력은 목표 대상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얼마나 잘 찾아내느냐에 달렸다. 마찬가지로 표적항암제는 암세포에만 나타나는 표적을 찾는 일이 관건이다.
1960년 만성골수성 백혈병 세포에만 나타나는 표적이 처음 발견됐다. 필라델피아 염색체로 알려진 이 작은 염색체는 BCR-ABL 합성단백질을 만들어 만성골수성 백혈병을 일으킨다. BCR-ABL 합성단백질을 표적삼아 정밀사격을 하는 저격수는 바로 ‘이마티닙’이라는 화학물질이다.
2001년 스위스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이마티닙을 원료로 만든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을 출시했다. 현재 글리벡 복용환자가 암이 발병한 뒤 5년 이상 생존할 확률은 80~90%에 이른다. 최근에는 라파티닙과 트라스투주맙이 유방암의 저격수로 나섰다.
암과의 전쟁에서 백병전 같은 표적치료와 더불어 ‘보급로’를 차단하는 치료법도 한창 개발 중이다. 암세포에 영양을 공급하는 혈관 생성을 막아 암세포를 굶겨 죽이는 방법이다. 암세포가 새로운 혈관을 만들지 못하도록하는 ‘베사시주맙’은 기존 항암제와 함께 투여하면 대장암, 폐암, 유방암, 신장암에 효과가 있다. 또 인터페론 이외에 특별한 치료제가 없었던 신장암에는 ‘소라페닙’과 ‘수니티닙’이 새로운 치료제로 인정받고 있다.
2015년이 되면 암세포 자체를 공격하는 동시에 암세포 성장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을 공급하는 새로운 혈관의 생성을 막는 ‘다표적치료제’가 화학요법의 중심에 설 전망이다. 정상세포를 손상시키지 않고 암세포만 죽이는 표적치료제를 개발해 털모자를 쓴 암환자의 모습이 하루빨리 추억 속으로 사라지길 기대한다.
![01 글리벡은 만성골수성 백혈병 세포에만 나타나는 단백질을 표적삼아 암세포만 공격하는 표적항암제다. 02 이레사는 폐암 표적항암제의 가능성을 연 첫 주자로 꼽힌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0702/S200702N024_IMG_0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