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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잠들어있는 마스터유전자를 깨워라

줄기세포 운명 결정하는 유전자 사냥

 

마스터 유전자


“척수가 심하게 손상돼 두 다리로 가는 신경이 마비됐군요. 일단 경과를 보면서 줄기세포치료를 해야겠어요. 다행히 당신이 태어날 때 탯줄에서 분리해둔 제대혈 줄기세포가 있어요. 이 줄기세포를 이식해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을 되살려 봅시다. 생명이란 정말 신비롭죠? 일단 줄기세포를 성장호르몬과 섞어 척추신경에 넣기만 하면 더디긴 하지만 손상된 부위의 신경세포로 분화하거든요.”

믿기지 않는다. 2030년 1월, 새해 기분에 들떠 광란의 질주를 한 것이 화근이었을까. 나는 지금 병원에 와있다. 정신은 멀쩡한데 무기력한 두 다리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다행히 의사의 입에서는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 대신 줄기세포 얘기가 흘러나왔다. 문뜩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공원을 달리던 기억이 떠올라 눈가가 젖어들었다. 다음 주말에는 친구들과 스키장에 가기로 했었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이 돼버렸다.

하지만 좌절하기에는 이르다. 끊어진 신경을 되살려줄 마지막 희망인 줄기세포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줄기세포는 재생의학의 치료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손상된 조직에 본인의 골수나 탯줄에서 얻은 성체줄기세포를 이식해 재생을 돕는 원리다. 또 몸속 216종류의 조직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배아줄기세포도 임상시험 중이다.

다시 2007년 1월, 줄기세포의 미래를 무조건 낙관하기에는 만능세포를 앞에 둔 우리의 고민이 너무 크다. 충분한 양의 줄기세포를 얻는 방법부터 원하는 방향으로 분화시키는 메커니즘까지 풀어야할 숙제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이식한 줄기세포가 돌연 암세포로 변할 가능성도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노하우를 쌓은 우리 몸이 하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줄기세포를 다룰 수는 없을까.

동화 속 마법사는 언제나 죽은 이를 살려내는 방법으로 물병 세 개를 사용한다. 빨간 병의 물을 몸에 바르면 심장이 뛰며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돌고, 흰 병의 물은 뼈와 살을 돋아나게 한다. 파란 병의 물을 끼얹으면 망자의 혼이 되돌아온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수정란이 체내 여러 조직과 기관으로 분화하는 동안 세포덩어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물병’의 활약은 쉼없이 이어진다. 이 물병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마스터유전자다. 특정 조직의 세포로 분화를 유도하는 유전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생명체의 몸 설계하는 ‘호메오유전자’


줄기세포는 과연 만능세포인가. 줄기세포 분화를 결정하는 마스터유전자를 찾기 위한 경쟁이 가속되고 있다.


줄기세포를 뼈와 심장, 뇌로 분화시키는 일은 배아가 세포분열을 되풀이하며 복잡다단한 생명체로 변해가는 과정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과 같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이뤄진 뒤 3~5일이 지나면 배아의 세포는 100~200개로 늘어난다. 이 단계를 배반포기라고 하는데, 태아를 만드는 세포와 태반을 만드는 세포가 함께 존재한다.

2~3주 뒤 배아는 분화를 시작하며 3종류의 세포층으로 나뉜다. 가장 바깥부분을 둘러싸고 있는 외배엽은 몸의 옆면을 따라 신경관을 촘촘히 묻는다. 이를 기준으로 앞쪽에는 뇌를, 뒤쪽에는 척수를 만들고 일부는 표피가 된다. 중배엽은 뼈, 근육이나 콩팥 같은 내장기관으로, 내배엽은 소화기관과 호흡기관으로 분화한다. 한몸에 있는 조직과 기관이라도 서로 다른 배엽에서 분화했다면 태생이 다른 셈이다.

1995년 노벨생리의학상은 배아 단계에서 몸의 구조를 결정하는 마스터유전자를 발견한 세 명의 생물학자에게 돌아갔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에드워드 루이스 교수는 초파리의 돌연변이를 연구하다 몸의 형태를 만드는 유전자 무리를 발견했다. 이 유전자들은 염색체상에서 차례로 정렬돼 있는데, 첫 번째 유전자는 머리, 두 번째는 가슴, 세 번째는 몸 뒤쪽의 분화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두 명의 독일 생물학자도 가세해 2만여개의 초파리유전자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며 발달과정을 조절하는 새로운 유전자들을 찾아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들의 연구로 곤충의 다리나 날개가 어느 부분에 생길지, 인간의 머리가 어디로 분화할지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속속 드러났다. 이는 훗날 ‘호메오(Homeo)유전자’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초파리부터 상어, 공작새와 인간에 이르는 다양한 생물의 신체 설계를 담당하는 공통된 유전자집단이다. 세포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스터유전자인 셈이다.

선충이나 초파리, 제브라피쉬, 쥐 등의 모델생명체를 연구하면 인간의 몸을 만들고 발달시키는 마스터유전자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초파리와 쥐의 눈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기원은 같다. 초파리의 눈을 만드는 유전자(Eyeless)를 쥐의 배아에 이식하거나 반대로 쥐의 눈을 만드는 유전자(Pax6)를 초파리의 배아에 이식해도 정상적으로 눈이 생긴다. 서로 다른 생물이지만 동일한 마스터유전자가 배아 발생 초기 단계에서 세포의 분화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사이의 소통 이해해야


충남대 김철희 교수는 1994년부터 제브라피쉬를 모델로 마스터유전자를 찾고 있다.


아직까지 마스터유전자에 대한 연구 수준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성별을 결정하는 유전자(Sry)나 눈을 만드는 유전자(Eyeless, Pax6), 형태를 결정하는 호메오유전자, 뼈를 만드는 유전자(Runx2, Bmp), 색소세포를 만드는 유전자(MITF), 세포간 신호를 전달하는 몇몇 핵심유전자(Wnt, Shh, Notch)를 찾아낸 정도다. 충남대 생물학과 김철희 교수팀은 유전체 구성과 발생과정이 인간과 유사한 제브라피쉬를 모델로 유전자 사냥에 나섰다.

제브라피쉬의 배아에 인간유전자를 발현시켜 나타나는 변화를 관찰하면 각각의 유전자가 가진 기능을 알 수 있다. 특히 줄기세포 분화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마스터유전자를 찾아내는 일이 관건이다. 실제로 신호를 전달하는 유전자인 마인드 밤(Mind bomb)은 배아줄기세포가 신경세포로 분화하는 속도를 조절한다. 또 Runx2는 성체줄기세포가 뼈를 만드는 세포로 분화하도록 유도한다.

김 교수는 “세계적으로 마스터유전자를 먼저 찾아내려는 경쟁이 치열하다”며 “마스터유전자를 중심으로 2만5000개에 이르는 유전자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배아줄기세포를 도파민신경세포로 분화시킬 때는 여러 유전자(Notch, Nurr1, Pitx3)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유전자끼리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지 이해해야 줄기세포 분화메커니즘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배아줄기세포건 성체줄기세포건 분화의 메커니즘을 꿰뚫을 수만 있다면 난치병 치료의 길이 열리는 건 시간문제. 하지만 줄기세포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심장이나 폐처럼 필요한 장기를 줄기세포로 직접 만드는 일은 꿈같은 얘기다. 그러나 손상된 조직의 세포를 복구하는 줄기세포치료에는 희망을 걸어 볼 수 있다.

줄기세포 운명 결정짓는 조건을 찾아라!


난치병 환자를 가족으로 둔 이들에게 줄기세포치료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그렇다면 줄기세포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마스터유전자는 과연 존재하는가. 이화여대 생명과학과 김재상 교수는 “발생과정에서 마이오 디(MyoD)유전자는 골격근육세포 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특수한 경우 다른 배엽의 세포까지 골격근육으로 유도하므로 마스터유전자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줄기세포를 원하는 대로 분화시키는 일을 유전자만으로 설명하기는 무리다. 또 모든 종류의 세포에 운명결정자로서 마스터유전자가 존재하는지도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KAIST 생명과학과 임대식 교수는 “마스터유전자 하나만으로 줄기세포 분화과정에서 스위치를 켜고 끄듯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며 “중요한 것은 생체 내의 다양한 유전자와 단백질, 호르몬의 상호작용”이라고 강조했다.

줄기세포의 분화 과정은 계단식으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될 수 있다. 각 단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줄기세포에 마스터유전자를 직접 삽입하거나 화학물질을 첨가하고 특정 세포와 함께 배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줄기세포를 분화시키는 방법은 여전히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 이것저것 변수를 바꿔가며 최적의 조건을 찾는데 머물러 있다.

21세기프런티어사업단의 하나인 세포응용연구사업단 김동욱 단장은 배아줄기세포로 도파민신경세포, 세로토닌신경세포, 올리고덴드로사이트(축색돌기를 감싸는 신경세포)를 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파킨슨병에 걸린 쥐의 뇌에 도파민신경세포를 이식하자 증상이 완화됐고 세로토닌신경세포는 우울증 치료에 효과를 보였다. 또 올리고덴드로사이트는 신경세포를 감싸는 막을 만들어 척수가 손상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다. 김 단장 역시 줄기세포를 특정세포로 유도하는 유전자나 신호전달물질을 사용해 분화효율을 높였다.

2030년 줄기세포치료는 어느 단계까지 발전할까? 김재상 교수는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심장근육세포나 인슐린을 분비하는 췌장의 베타세포, 연골세포처럼 메커니즘이 비교적 단순한 경우는 줄기세포치료에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골수에서 추출한 성체줄기세포로 피부나 연골을 배양하는 기술은 임상시험이 시작됐다.

그러나 주위의 세포들과 복잡하게 얽혀 끊임없이 소통해야하는 신경세포의 경우 좀 더 난해하다. 시험관에서 배아줄기세포로 도파민신경세포를 얻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뇌에 이식했을 때 다른 신경세포들과 제대로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생명, 그 영원한 난제


현재 성체줄기세포치료가 활발히 임상시험 중이라면 배아줄기세포치료는 아직 동물 배아줄기세포로 실험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2030년 각각의 분야에서 가장 유망한 치료분야를 뽑아봤다.


미국 존스홉킨스의대 장윤영 교수는 “성체줄기세포의 경우 현재 임상시험 중인 뇌혈관질환이나 척수손상 치료에 상용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당뇨와 간질환도 줄기세포치료법이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배아줄기세포의 경우는 파킨슨병이나 당뇨, 심장병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동물 배아줄기세포로 실험하는 단계이므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한 미궁을 조금씩 더듬어가고 있다. 생명의 본질을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난치병 치료나 생명 연장의 꿈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만들고 조절하고 통제하는, 말 그대로 마스터 역할을 하는 유전자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명현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인간게놈연구를 통해 채 3만개가 되지 않는 인간유전자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각각의 기능과 네트워크, 복잡미묘한 화학물질의 상호작용까지 이해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030년에도 줄기세포치료는 여전히 난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명의 발생과 분화과정에서 꾸준히 단서를 찾아가다보면 언젠가 줄기세포를 다루는 ‘미다스의 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두운 미궁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바로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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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신방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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