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이 전기가 통한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 첨단플라스틱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얘기다. 지난해 노벨 화학상이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에 돌아갔다. 바로 전도성 고분자다. 2010년이면 전도성 고분자의 활약으로 돌돌 말린 디스플레이나 휴대전화도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일정한 구조를 가진 분자가 반복되는 고분자(폴리머)로 이뤄진 플라스틱은 일반적으로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 때문에 흔히 플라스틱 재료를 전자 소재로 사용할 경우, 전기를 흐르지 않게 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다양한 케이스, 전선의 피복면, 반도체 부품의 패키징(packaging) 재료가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런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플라스틱 재료도 전기가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도성 고분자의 출현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다.
전도성 고분자는 1967년 일본의 히데키 시라카와(Hideki Shirakawa) 교수팀이 우연한 계기로 폴리아세틸렌이라는 플라스틱을 합성한 것이 시초다. 실제로 이 연구팀의 한 한국인 박사가 처음으로 폴리아세틸렌을 필름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1976년 겨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의 앨런 히거(Alan J. Heeger) 교수와 앨런 맥디아미드(Alan G. MacDiarmid) 교수 연구팀이 당시 객원교수로 이곳을 방문중이던 시라카와 교수와 함께 전도성 고분자를 연구하게 됐다. 연구 결과 이들은 폴리아세틸렌 필름에 불순물을 화학적으로 첨가하면 전기전도도가 급격하게 증가해 금속의 전도도에 가까운 높은 값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발견은 그후 많은 연구자들이 전도성 고분자를 개발하고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의 근본이 됐다. 맥디아미드와 히거, 그리고 시라카와는 전도성 고분자 분야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0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부도체에서 도체까지 원하는 대로
모든 물질은 물질을 이루는 원자 내에 전자라는 아주 작은 입자를 가진다. 전기가 통한다는 말은 바로 전자가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물질의 원자와 전자에는 공유상태와 전도상태라는 두가지 에너지상태가 항상 있으며, 두 상태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에너지 간격인 밴드갭이 존재한다. 공유상태는 원자에 전자가 항상 붙잡혀 있는 안정한 에너지상태, 전도상태는 원자에 붙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는 높은 에너지상태를 말한다.(그림1)
평소에는 모든 전자가 공유상태에 있으므로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전기가 통하려면 외부의 어떤 영향을 받아 공유상태에 있는 전자가 전도상태로 이동해야 한다. 즉 온도의 변화를 주거나 빛이나 전기를 가하거나, 화학불순물을 첨가하면 가능하다. 만일 밴드갭이 너무 좁아서 거의 무시할 정도면 전자가 상온에서도 쉽게 공유상태에서 전도상태로 이동할 수 있다. 즉 전자는 물질 내에서 자유롭게 떠돌아다닐 수 있게 돼 전기를 잘 통한다. 이런 물질을 도체라 한다. 반대로 밴드갭이 너무 크면 웬만한 외부 영향에도 두 상태 사이에 전자 이동이 쉽지 않다. 즉 전기가 잘 흐르지 않게 된다. 일반 플라스틱과 같은 부도체가 바로 이런 성질을 갖는다. 반도체는 적절한 밴드갭을 갖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영향만 있으면 전자가 두 상태 사이를 이동하기 쉽다.
전도성 고분자는 밴드갭이 매우 큰 일반 플라스틱과는 달리, 바로 이 밴드갭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 따라서 부도체의 특성에서 도체의 특성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금속과 같은 전도도를 나타내는 플라스틱을 이용하면, 컴퓨터 본체 안쪽에 얇게 코팅해 정전기를 접지하는 역할을 하는 정전기 방지막(전자파 차폐막), 플라스틱 도선 등을 매우 값싸게 제작할 수 있다.
또한 부도체와 도체의 중간 특성인 반도체 특성을 나타내는 고분자 반도체(semiconducting polymer), 또는 플라스틱 반도체(plastic semiconductor)를 사용하면, 기존의 실리콘을 이용한 반도체 소자도 싼 가격으로 제작할 수 있다.
고분자 반도체의 비밀은 탄소결합
플라스틱이 도체나 반도체 성질을 갖기 위해서는 화학 구조적으로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할까. 플라스틱을 현미경으로 아주 크게 확대해 들여다보면 종국에는 아주 가는 실타래 모양을 갖는 사슬 같은 구조(전문용어로 backbone chain)로 이뤄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슬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슬을 이루는 원자들인 탄소, 수소, 산소 등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성질을 갖는 전도성 고분자의 주원소는 이들 원소 중에서 탄소원자다. 탄소원자는 4개의 팔을 갖는데, 이 가운데 한 팔은 탄소원자가 아닌 수소원자 등과 결합하는데 사용된다. 주목할 것은 탄소원자의 나머지 3개 팔이다. 탄소원자들은 각각 서로 3개의 팔을 내놓아 그 중 한 팔은 서로 어깨동무하듯이 연결하고(단일 결합), 나머지 두 팔은 마치 체조할 때 친구와 서로 구부리면서 아래위로 맞잡듯이 연결하는데(이중 결합), 이들 결합이 교대로 이뤄지는 구조적 특징이 있다. 이런 특징을 갖게 되면 높은 에너지상태에서는 탄소원자들 사이에 전자구름으로 이뤄진 긴 터널 같은 통로가 형성된다. (그림2).
결국 이 터널을 전자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전기가 통할 수 있는 것이다.
반도체 성질을 갖는 플라스틱에도 두 에너지상태 사이에 적절한 밴드갭이 존재한다. 외부에서 원하는 대로 이를 적당히 조작하면, 전자가 이동하는 양을 조절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전도성 고분자, 또는 플라스틱 반도체의 응용 분야가 일반 반도체와 마찬가지로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즉 전계효과 트랜지스터(Field Effect Transistors, FET), 광다이오드(photodiodes), 발광 디스플레이(light-emitting display), 태양전지(solar cells) 등에 반도체 소자의 대체 소재로서 이런 전도성 고분자 소재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FET는 전기장을 가해서 전자가 흐르는 양을 조절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호를 조절할 수 있는 트랜지스터로 메모리, 논리소자, 신호처리에 사용되고, 광다이오드는 빛이 들어오는 양을 측정할 수 있는 소자이며, 발광 디스플레이는 전기를 흘려 물질에서 빛을 내게 하는 전기발광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5천시간 빛나는 디스플레이
이 가운데에서도 전기발광 현상을 이용한 고분자 발광 디스플레이는 상업화에 가장 가까운 플라스틱 반도체의 응용 분야다. 구체적으로 보면 TV의 브라운관, 노트북의 모니터 등과 같은 디스플레이에 응용이 가능하다. 고분자를 이용하는 전기발광 디스플레이는 PLED( Polymer Light Emitting Diode) 또는 PELD(Polymer ElectroLuminescence Display)라고 한다. 이때 사용되는 전도성 고분자는 발광 고분자라고 부른다.
요즘 자주 쓰는 노트북 화면은 액정 화면이다. 액정 고분자는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고분자가 아니다. 액정 화면의 액정 고분자는 화면 안쪽의 형광램프에서 나오는 빛을 통과시키거나 차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액정화면은 100% 빛 중에서 7-8% 밖에 통과시키지 못하고 빛을 자체적으로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밝은 데서는 식별이 어려운 점이 있다. 그리고 편광판과 같은 여러 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일정 각도를 벗어난 상태에서 바라보면 잘 보이지 않는 불편한 점이 있다. 또한 TV 브라운관의 경우에는 화면 크기가 클수록 두께가 매우 두꺼워지는 경향이 있다.
최근 들어 일부 발광 고분자가 전기를 흘렸을 때 아주 밝은 빛을 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경우 기존의 노트북 모니터와 TV 브라운관을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모니터나 브라운관을 아주 얇은 판에다 만들 수 있어 초박막형 TV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유기물질(고분자)에 전기를 흘렸을 때 빛을 내는 발광 현상은 1960년대에 처음 발견됐다. 하지만 실용성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PPV라는 전도성 고분자가 빛을 잘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후로 발광 고분자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해졌다. 최근 각광받는 발광 고분자로는 PF(폴리플루오렌)가 있다. PF가 주목받는 이유는 디스플레이로 만들었을 때 실용성이 있을 만큼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사용 가능 기간이 5천시간 정도여서 휴대폰 용도에는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PPV가 1백시간 미만밖에 빛을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진전이다. 한편 발광 고분자의 빛깔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PF에서 나오는 빛깔은 청색, PPV의 빛깔은 녹색 위주다.
머리카락보다 1천배 얇은 막
전도성 고분자에서 빛이 나오는 현상에 대한 원리는 많이 연구돼 왔다. 현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빛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얇은 유리판 위에서 두개의 금속 전극 사이에 얇은 발광 고분자 막을 형성토록 한다. 이 발광 고분자막의 두께는 보통 1백μm(1μm는 1만분의 1cm) 정도인 머리카락보다 약 1천분의 1만큼 얇다. 두개의 전극 중 하나는 빛을 통과시킬 수 있어야 하므로 투명한 전극을 사용한다. 이때 투명 전극을 양극으로 하고 다른 전극을 음극으로 해 전압을 가한다. 그러면 음극으로부터 음전하를 띤 전자는 활성화돼 높은 에너지상태(전도상태)로 발광 고분자 안으로 들어간다. 동시에 발광 고분자로부터는 음전하를 띤 전자가 양극으로 빠져나가면서 발광 고분자 안에는 양전하를 띤 높은 에너지상태의 빈자리(양공, positive hole)가 남게 된다.
여기에 전압을 계속 가하면 발광 고분자 안에 있는 음전하를 띤 전자는 인력에 의해 양극을 향하게 되고, 양전하를 띤 빈자리는 역시 마찬가지로 인력에 의해 음극을 향하게 된다. 이때 전자는 고분자 사슬의 긴 터널 하나를 지나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다른 발광 고분자 사슬로 이동한다. 마치 개울을 건널 때 징검다리를 건너뛰어 가듯이 말이다. 빈자리도 역시 마찬가지 방법으로 전자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발광 고분자 안에서 전자와 빈자리는 빈번하게 서로 만나게 된다. 그러면 높은 에너지상태에 있는 전자와 빈자리는 비로소 안정을 회복하면서 낮은 에너지상태로 떨어진다. 이때 높은 에너지와 낮은 에너지의 차이에 해당하는 만큼의 빛이 발광 고분자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그림3).
여기서 높은 에너지와 낮은 에너지의 차이는 발광 고분자가 갖는 성질(즉 밴드갭 크기)에 좌우되므로, 발광 고분자는 고유의 빛을 내게 된다. 많은 발광 고분자들은 각각 자기 고유의 밴드갭을 가지므로 여러 발광 고분자를 이용해 여러가지 색깔을 낼 수 있다. 빛의 3요소인 빨강, 파랑, 초록은 물론 노랑 같이 원하는 빛깔을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종이 같이 얇은 배터리
연구 초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많이 개선돼 휴대폰 등에 장착하기 위해 여러 기업체가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는 노트북, 아주 얇은 벽걸이 TV 등에 응용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특히 발광 고분자를 사용하는 디스플레이는 여러 면에서 재미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다. 흔히 페트병에 쓰이는 재료와 유사한 종류의 플라스틱을 유리판 대신 사용해 발광 디스플레이를 만들면 접거나 둘둘 말아 갖고 다닐 수 있는 모니터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필자를 비롯한 우리나라 연구소와 외국 여러 연구기관에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컴퓨터도 옷처럼 입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이런 플라스틱 모니터가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발광 디스플레이뿐만 아니라 전도성 고분자를 이용한 전계효과 트랜지스터, 태양전지등에 대해서도 연구가 활발하다. 유리나 실리콘 판이 아닌 플라스틱 판 위에서 이들 소자들이 만들어진다면, 휴대폰, 컴퓨터 등 많은 정보통신기기가 모두 통째로 두루마리처럼 들고 다닐 수 있을 것이다. 종이 같이 얇은 페이퍼 배터리, 페이퍼 디스플레이 등이 2010년 정도면 실용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다른 연구자들은 발광 고분자에서 발광 현상을 이용해 레이저를 만들려고 연구하고있다. 실제로 몇몇 선진국에서는 레이저 현상이 발견돼 레이저 개발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 판이 구부러진 상태에서 녹색의 레이저 빛이 나오는 현상을 실제로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가 주변에서 많이 접하는 플라스틱도 많은 연구 끝에 특수한 성질을 내도록 개발되고, 첨단 기술에 활용되고 있다. 고분자는 앞으로 반도체를 대체할 수 있는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 작년에 미국 맥디아미드와 히거 교수, 그리고 일본 시라카와 교수가 노벨화학상을 탄 배경에는 한국인 과학자의 노력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놀라운 업적이 시작됐다. 때문에 필자는 이 글을 읽는, 과학을 사랑하는 우리 젊은이들이 미래에 펼칠 활약에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