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쏟아지는 비로 사막의 토양이 흠뻑 젖었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이 지역 전체가 풍성한 목초로 뒤덮였다. 가축의 수가 두 배 이상 증가했고 다른 때라면 식물을 기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역에서 목화를 기를 수 있게 됐다.”
페루의 항구도시 파이타에는 1891년 엘니뇨가 찾아왔던 때의 기록이 남아있다. 단비를 내리고 가축을 살지게 했던 특별한 해, 주민들은 그 시기를‘풍요의 해’또는‘비의 해’로 기억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엘니뇨는 재앙의 추억이됐다. 숙련된 어부들은 수년마다 한 번씩 북쪽에서 흘러온 따뜻한 바닷물이 해안을 휩쓸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해류가 나타나면 열대 동태평양 연안은 몇 달 동안 따뜻한 바닷물로 채워지고 찬물의 용승이 일어나지 않아 어획량이 크게 준다. 대개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나타나기 때문에 이 더운 해류에는 엘니뇨, 즉‘아기 예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20세기 이전까지 그 누구도 기후 변화와 엘니뇨의 연결 고리를 찾지 못했다. 엘니뇨는 페루와 에콰도르에 이상한 날씨를 몰고 오는 더운 해류일 뿐이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엘니뇨를 겪으며, 페루를 휩쓴 살인적인 홍수와 인도네시아의 가뭄처럼 같은 시기에 일어난 재해에서 엘니뇨라는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엘니뇨는 중태평양에서 동태평양에 이르는 열대바다의 수온이 비정상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현상을 뜻한다. 적도지역에 부는 무역풍은 데워진 열대의 바닷물을 서쪽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태평양 열대 지역의 해수면 온도는 서태평양이 높고 동태평양이 낮은 분포를 띤다. 그런데 엘니뇨가 발생하면 무역풍이 약화되며 뜨거운 해수층이 서서히 동쪽으로 이동한다.
온도 분포의 변화는 대기에서 일어나는 대류현상과 해양에서 움직이는 해류의 틀 자체를 재편한다.
올 겨울 후끈 달아오른 태평양
올해 여름부터 태평양의 수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9월 한 달 동안은 전형적인 엘니뇨 발생 초기 양상을 보였다. 열대 태평양(140°E~80°W)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에 비해 0.5~2.5°C 높은 고수온 상태였고 무역풍도 약해지는 조짐을 보였다. 또 지구 전체의 월평균 기온이 0.6℃ 올라갔다. 각국은 올 겨울 엘니뇨가 발생해 내년 상반기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예보를 서둘러 내놓았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엘니뇨의 강도는 그다지 강하지 않을 거라고 내다봤다.
엘니뇨의 강도를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일까. 기상청 기후예측과 윤원태 박사는 열대 태평양에서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는 정도를 들었다. 해수면의 온도 상승 폭이 클수록 강한 엘니뇨로 볼 수 있는데 전문가들은 엘니뇨를 다섯 단계(매우 강함, 강함, 보통, 약함, 매우 약함)로 구분한다. 평년보다 5℃ 이상 높은 수온이 지속되면 매우 강한 엘니뇨, 3~5℃ 사이면 강한 엘니뇨, 2~3℃ 사이면 보통의 엘니뇨로 분류한다. 올해는 약한 엘니뇨가 발생할 거라 전망했는데 그 이유는 적도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 상승폭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엘니뇨의 강도는 따뜻한 바닷물이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또 얼마나 깊은 곳까지 나타나는가로 구분짓기도 한다. 따뜻한 물의 부피가 커질수록 그 상공에 위치한 대기에 미치는 영향도 증가하므로 강한 엘니뇨로 볼 수 있다.
또 엘니뇨의 지속기간도 강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과학자들은 엘니뇨가 대체로 12~18개월 동안 지속된다고 말하지만 매우 강력한 엘니뇨의 경우에는 수년간 이어지기도 한다.
엘니뇨의 뜨거운 입김
엘니뇨의 발생원인은 아직 분명치 않다. 적도의 무역풍이 약해지는 현상이 엘니뇨 발달에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정답을 찾지는 못했다. 대기와 해양의 복잡한 상호 작용을 꿰뚫지 않고서는 엘니뇨의 발달과 소멸에 이르는 과정을 결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엘니뇨 자체는 수세기 동안 되풀이된 자연현상이므로 무엇이 엘니뇨를 유발시켰느냐보다는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 것이냐를 예측하는 편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엘니뇨가 지구의 기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엘니뇨가 발생한 해의 피해 자료를 훑어보는 일이다. 20세기 최대 규모의 엘니뇨였던 1997~1998년, 과학자들은 1996년 12월에 열대 태평양의 해수면 온도가 평균보다 몇℃정도 올라갈 거라고 예보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그 해의 엘니뇨는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1997년 중반에 이르자 숨겨진 재앙의 몸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악의 홍수가 동유럽을 휩쓸었고 아프리카는 물난리 뒤 찾아온 콜레라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건조한 날씨가 계속됐고 넓은지역의 산림이 순식간에 불타 재로 변했다. 미국 서부 그레이트베이슨과 북부평원은 기록적으로 따뜻한 겨울을 맞아 겨울철 난방비를 22억 달러(1997년 당시 약 2조6000억원)나 절약했고 대서양은 평소보다 잠잠한 허리케인 시즌을 보냈다.
우리나라는 중위도에 위치하기 때문에 적도 태평양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는다. 대신 북서쪽에서 흘러드는 공기의 흐름에 민감하다. 기상연구소 기후연구실 권원태 실장은“보통 엘니뇨 기간에 우리나라는 여름철 기온이 낮아지고 겨울철 기온은 오른다”면서“한반도에서 강수량과 엘니뇨의 관계가 뚜렷하지 않지만 엘니뇨가 일어난 해에는 여름철 강수량이 조금 증가하고 집중호우의 빈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허리케인 수는 줄어
그러나 모든 비정상적인 기상현상의 주범을 엘니뇨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997~1998년 엘니뇨 이후 사람들은 적도 태평양에서 발생한 뜨거운 해류에 비정상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기상예보관이더이상할일이없다’는 농담까지 유행했는데 그 이유는 비가 오든 오지 않든 모두 엘니뇨의 탓으로 돌리면 되기 때문이었다.
엘니뇨는 지난 수천년동안 지속된 자연현상이다.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7년에 한 번씩 지구의 기후패턴을 바꿔 놓았다. 페루는 홍수에 잘 견디는 목화를 엘니뇨 시기에 재배해 손해를 줄였고, 아프리카는 옥수수의 파종시기를 조절했다. 나름의 방법으로 엘니뇨에 적응한 셈이다.
엘니뇨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대서양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 수는 엘니뇨 해에 급격히 줄어든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은 엘니뇨기간에 멕시코만과 카리브해에 부는 서풍이 강해지면서 열대성 저기압의 상승기류를 억제해 허리케인이 되는 것을 막는다고 설명한다. 또 페루 앞바다의 기온이 올라가면 멸치와 정어리 대신 새우 유충의 수가 늘어 새우를 인공 양식할 때보다 비용을 아낄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엘니뇨와 건강’이라는 1999년 보고서에서 엘니뇨 그 자체가 재앙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앞으로 다가올 기후변화를 예고해 주는‘위험 경보기(hazard spawner)' 정도라고 설명한다. 이제 우리는 엘니뇨가 오기 적어도 몇 달 전에는 닥쳐올 위험을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겨울 다시 찾아온 엘니뇨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엘니뇨라는 위험경보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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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엘니뇨 리포트
PART1 크리스마스 악몽에서 깨어나라
PART2 엘니뇨 사냥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