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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둥근지 몰랐던 옛사람, 경위도 개념 있었다

위도는 북극이 땅에서 올라온 각도

경도와 위도는 지구상에서 위치를 나타내는 기초적인 정보다. 중국, 한국, 일본 등이 공유하는 동아시아 전통천문학에서는 17세기 이전까지 땅이 둥글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경위도의 개념을 어떻게 정립할 수가 있었을까.

지구상에서 위도는 그곳의 지평선에서 북극이 올라와 있는 각도(북극고도)와 같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라도 위도가 다른 두 지방을 여행해보면 북극성의 고도가 차이 난다는 점을 금방 깨닫는다. 이는 감각적으로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도에 대한 인식은 매우 일찍부터 있었다. 중국에서는 북극고도를 ‘북극이 땅에서 올라온 각도’라는 뜻으로 ‘북극출지도’(北極出地度)라고 불렀지만, 사실 이는 위도의 개념이나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이미 기원전 3세기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상에서 두 지점 사이의 거리와 위도의 차이를 이용해 지구 크기를 측정한 일은 유명하다.

외국에 가면 그곳의 시간에 시계를 맞추는 일에서 알 수 있듯이, 경도는 그 지방의 시간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계시계도 없고, 전화로 다른 곳의 시간을 물어볼 수도 없는 전통시대에 경도를 인식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동양이나 서양이나 경도는 위도보다 훨씬 나중에 개념화됐고, 또 경도를 측정하려는 노력도 늦게 나타났다.


땅이 둥근지 몰랐던 옛사람, 경위도 개념 있었다



한양의 정확한 위도 알고도 못썼다
 

여주의 세종대왕릉에 복원된 세종 때 간의. 간의는 적도면으로 각도를 재기 위해 진북극에 축을 맞췄다. 극축을 맞추려면 북극고도를 알아야 하므로 조선의 천문학자들이 위도를 측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먼저 위도 얘기를 해보자. 우리 역사에서 위도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발견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나 통일신라, 발해 등에서도 북극출지도를 측정하고 공식적인 수치를 정해놓았을 것이나 이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에 고려의 북극출지도를 38도1/4(당시 원의 중심각을 365도1/4로 썼음, 360°법으로는 37°41′)이라고 남긴 것이 우리나라 위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칠정산’이라는 역법을 만든 천문학자 이순지는 위도를 잘 알아 세종의 신임을 받은 일화가 있다. 그는 한양의 위도가 얼마냐는 세종의 질문에 38도3/4(38°02′)이라고 대답했다. 지금의 수치(37°33′)를 생각해보면, 이순지가 말한 값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 정도의 오차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됐던 것 같다. 세종은 이순지의 수치가 원사에 나온 값(37°41′)과 일치한다며 그를 크게 신임하고 그뒤 역법을 교정하는 일을 맡겼다. 세종 때는 제주도 한라산, 강화도 마니산, 함경도 백두산의 위도를 측정했다고 전해지는데, 수치는 남아있지 않다. 대체로 조선 전기의 우리나라 위도 기준은 원나라에서 정한 값을 사용했던 것 같다.

위도 차이는 밤낮의 길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중요하다. 중국은 땅이 넓어 지역에 따라 위도 차이가 크므로 대표적인 지방의 위도를 역서에 표시했다. 이는 위정자가 자신이 다스리는 넓은 지역을 고르게 보살피고 있으며 그곳에까지 자신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원나라가 고려의 위도를 자기 역사책에 표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고 원나라 황제의 지배력이 고려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알리려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청나라는 1713년 한양의 위도를 측정하기 위해 천문학자들을 파견했다. 이때 측정한 값은 37°39′15″였다. 이 수치는 그뒤 청나라가 반포하는 역서에서 조선의 기준 위도가 됐고, 조선에서도 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정조 때는 중국 황제가 하는 방식을 모방해 조선팔도의 관찰사가 있는 도시의 위도와 경도를 계산해 우리나라 역서에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구한 수치는 그 지역에서 직접 측정한 값이 아니라 지도상의 거리를 경위도로 환산한 값이었다.

위도는 북극이 지평선에서 올라온 각도를 재는 방식으로 쉽게 얻을 수 있다. 다만 북극성은 정확히 북극에 있지 않아 아무런 표시가 없는 진북극을 구하는 문제가 조금 어려울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 역사에서는 위도에 대한 정밀한 측정치가 없고 원나라나 청나라에서 정한 값을 사용하는데 만족했을까. 우리 조상들이 위도를 정확히 측정하고 적용할 필요를 별로 못 느꼈기 때문이다. 진북극에 정확히 맞춰진 여러 가지 관측기구를 제작했던 우리 천문학자들은 한양의 위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천문학을 연구하고 역법을 만들 때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한양의 정확한 위도 값을 알고 있다고 해도 함부로 적용해 쓸 수 없었다.

중국의 속국이 되거나 중국에 사대를 해야 하는 처지에서 중국이 기준으로 삼은 우리나라의 위도 값에 큰 무리가 없다면 그 값을 따르는 편이 외교적 관례에 어울리고 효율적인 일이다. 우리 손으로 정밀하게 관측한 새로운 수치를 쓰겠다고 하면, 천문학은 제왕의 학문이고 중국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해 한반도의 피지배 왕조가 그런 일을 하려 하느냐는 힐난을 받을 것이 뻔하다. 또한 고구려와 발해를 제외하면, 우리 역사 속의 왕조는 대체로 한반도에 국한돼 있어서 지역별 위도차는 남북으로 4~5도여서 한반도 중앙부의 개성이나 한양 중 어느 지점의 위도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역법을 만들고 일식을 예측하는데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위도 값은 역사서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항해에서 경도를 알기 위해 달과 항성의 거리를 측정하는데 쓴 육분의.



최초의 기계시계 오차는 24시간에 수초
 

최초의 크로노미터(01)는 24시간에 불과 수초의 오차가 나는 정밀시계로 1735년 영국의 기술자 존 해리슨(02)이 만들었다. 크로노미터 그림은 프랑스 작가 루이스 보든이 쓴 ‘항해의 역사를 바꿔놓은 해상시계’(2004)에 나오는 것이다.최초의 크로노미터(01)는 24시간에 불과 수초의 오차가 나는 정밀시계로 1735년 영국의 기술자 존 해리슨(02)이 만들었다. 크로노미터 그림은 프랑스 작가 루이스 보든이 쓴 ‘항해의 역사를 바꿔놓은 해상시계’(2004)에 나오는 것이다.


칭기즈칸이 동서로 드넓은 제국을 건설하면서 중국 천문학에서도 경도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됐다. 칭기즈칸은 정복전쟁의 초기에 금나라를 정벌하고 그곳의 역법을 도입했다. 그리고 정복이 진행되면서 동서로 넓은 영역에 걸친 영토를 얻게 됐다. 하지만 서쪽 지역에서는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만든 역법으로 예보한 월식이 맞지 않았다. 천문현상이 경도에 따라 다른 시간에 관측되기 때문이다. 이 오차를 개선하기 위해 ‘경오원력’이라는 역법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오늘날 경도 차에 해당하는 ‘이차’(里差)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됐다. 이차의 원리는 원나라 이후로 널리 알려졌고 절기, 시각과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데 널리 적용됐다.

조선에서도 경오원력을 연구하고 참고했으므로 조선 전기부터 천문학자들은 동서로 떨어진 지역에서 천체현상의 관측시간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두 지점의 경도 차이를 ‘동서로 치우친 각도’라는 뜻으로 ‘동서편도’(東西偏度)라고 불렀다. 경도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개념은 완전히 알고 있었던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한반도의 시간이 명나라나 청나라의 수도였던 북경보다 42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양항해가 일반화되면서 유럽에서는 16세기부터 경도측정법을 개발하는 일이 과학계의 중요한 이슈가 됐다. 월식이나 목성의 위성식처럼 지구 전체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천문현상을 관측해 시간을 서로 비교하는 방법이 가장 초보적이다. 그러나 이는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라 효율적인 측정법이 아니었다. 언제든 쓸 수 있는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 달과 항성의 거리를 관측하는 월거(lunar distance)법이다. 우선 달의 궤도 근처에 있는 기준 항성들에 달이 접근하는 시각을 미리 계산해 표를 만들어둔다. 그런 다음 항해하는 도중에 달과 항성의 거리를 관측하고 이것을 기준표와 비교하면 그 지점의 경도를 얻을 수 있다. 이 방법은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관측기구와 관측기법이 발달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이는 19세기 초 기계시계가 경도 측정에 널리 이용되기 전까지 가장 신뢰받는 방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개발된 것이 정밀시계 이용법이다. 본초자오선의 시각에 맞춰진 시계를 갖고 항해를 하다가 시계의 시간과 천체관측을 통해 얻은 그곳의 지방시를 비교하면 경도를 구할 수 있다. 이 방법의 관건은 오차가 거의 없는 정밀시계, 즉 크로노미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1735년 존 해리슨이라는 영국인 기술자가 24시간에 불과 수초의 오차밖에 나지 않는 최초의 크로노미터를 만들었다. 1761년 그는 156일의 항해에 54초의 오차가 생기는 정밀한 크로노미터를 완성했다. 그뒤 크로노미터는 해리슨을 비롯한 시계 제작자들의 손을 거쳐 더 정밀해졌고, 1700년대 후반에는 대량생산됐다. 1800년대 초부터는 불편한 월거법 대신 크로노미터를 사용하는 것이 대세였다.

그리니치 표준시보다 9시간 빠른 우리나라의 경도 기준은 동경 135°선이다. 이 선은 울릉도 동쪽 350km 위치를 남북으로 지나 한반도의 어떤 지점에도 닿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의 경도 기준이 한반도에 있지 않은 것이다. 북경과의 시차를 42분으로 정해 쓰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오히려 한반도의 경도에 맞는 시간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경도선은 1884년부터 세계적인 합의를 거쳐 그리니치 표준으로부터 15° 간격으로 같은 시간대를 배분했다. 우리가 천문학적으로 합당한 시간을 쓰려면 서울을 통과하는 동경 127°의 표준시를 써야 하지만, 다른 나라와 30분 차이가 나는 표준시를 쓰기는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위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일이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대로 현재는 우리의 경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지만 이를 기준으로 한 시간을 쓰지는 않는다. 과학적으로 정확하다고 해 그것이 늘 의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과학은 사회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요소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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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전용훈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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