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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포증의 물귀신 작전

피할수록 두렵다

고대 그리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는 계단을, 로마의 통치자 시저는 어둠을 무서워했다.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는 고양이를, 철학자 파스칼은 바깥으로 나오는 걸 두려워했다. 이렇게 뛰어난 사람들도 ‘공포증’에 시달렸다. 이 사실만 봐도 공포증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자신의 의지대로 조절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병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공포증은 우리가 흔히 느끼는 불안이나 두려움과 어떻게 다를까. 도대체 왜 공포증이 생기며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포가 당신을 보호한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가끔 공포를 경험한다. 한밤중에 낯선 곳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혼자 있을 때 커다란 천둥소리를 들을 경우 약간이라도 불안이나 공포를 느낄 것이다. 이렇듯 공포는 매우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감정이다. 공포 경험은 약간 불편한 느낌부터 심한 공황발작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 정도도 다양하고,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는 경우에서 평생 계속되는 경우까지 기간도 다양하다.

우리는 위험을 지각했을 때 공포를 느낌으로써 위험에 맞서 싸우거나 도망갈 준비태세를 갖춘다. 따라서 공포는 진화론적으로 볼 때 적응할 가치가 있는 감정이다. 원시인은 맹수와 마주쳤을 때 공포를 느꼈기 때문에 도망가거나 맞서 싸울 준비를 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공포가 꼭 원시시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거리를 걷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트럭이 나를 향해 돌진해 온다고 상상해보자. 만약 내가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피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안전하게 길옆으로 피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공포가 유기체를 ‘보호’하려는 것이지 ‘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 발달 초기에 공포의 이 같은 보호기능은 특히 두드러진다. 즉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이나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상황에 관계없이 당연하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절대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미숙한 공포는 ‘현실적’인 공포로 변한다. 좀더 적절한 상황을 고려할 수 있는 규칙으로 바뀌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든 낯선 사람은 다 위험하다’라는 절대적 규칙은 낯선 사람의 위협적인 면과 비위협적인 면, 자신과 낯선 사람의 상대적인 힘 등을 고려해서 점점 변해간다.

일상적인 공포는 많은 사람이 겪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고, 우리를 보호하는 기능을 하며, 성장하면서 현실적인 공포로 바뀐다. 그럼 이런 일상적인 ‘공포’와 병적인 ‘공포증’은 과연 어떻게 다를까.
 

무섭다고 피하나. 그럼 영영 공포즈으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두려울수록 정며으로 도전하라.


공포와 공포증의 차이

‘공포증’(Phobia)이란 말은 ‘과장되거나 무력화시키는 공포’라는 의미로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적을 놀라게 하던 전쟁의 신인 ‘포보스’(Phobos)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공포증은 현실성 없는 특수한 공포로, 설명할 수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통제할 수 없고 상황에 대한 회피행동을 유발한다.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공포와 병적인 공포증은 세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공포증은 일상적인 공포보다 훨씬 강도가 강하다. 보통 사람이라도 끔찍한 지하철 화재 사고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날 지하철을 탄다면 어느 정도 공포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이 지하철을 아예 타지 못할 만큼 강하지는 않다.

둘째, 공포증은 일상적인 공포보다 오래 지속된다. 정상적인 사람은 아무리 큰 비행기 사고가 났어도 며칠 지나면 불안감이 없어진다. 하지만 비행기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가 대체로 안전하다는 정보가 있어도 좀처럼 공포가 줄어들지 않는다.

셋째, 공포증은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기능에 지장을 준다. 예를 들어 비행기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도 비행기를 타고 가지 못한다든지, 좋은 일자리를 제의받아도 긴 비행을 요하는 곳이라면 포기한다.

공포증은 크게 사회공포증, 광장공포증, 특정공포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공포증은 다른 사람들이 지켜볼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할 때 지나치게 불안하고 긴장하는 것이다. 무대공포증이나 대인공포증이 이에 속한다. 광장공포증은 즉각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장소나 상황에 처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이다. 또 특정공포증은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과도하게 공포를 느끼는 것을 말한다.

특정공포증을 일으키는 대상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인간의 진화 초기에 가장 공포를 유발하는 자극은 실제 위험이 있었던 대상이나 사건들이다. 맹수나 뱀에 대한 공포가 바로 그런 사례. 그러나 맹수나 뱀공포증은 오늘날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악마공포증은 점차 사라진 반면 현대에 와서는 첨단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방사능공포증, 핵무기공포증과 같은 새로운 공포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한 지하철. 끔찍한 지하철 화재 사고를 경험한 사람은 지하철 타기를 꺼린다. 이게 심하면 지하철공포증이 된다.


회피와 두려움의 악순환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특정공포증이 있는 사람의 공포 대상 중 일반인과 비슷한 것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특정공포증의 대상은 동물, 높은 장소, 질병, 외상, 죽음의 순서로 많이 나타난다. 대상에 따라 특정공포증은 동물형, 자연환경형, 혈액-주사-상해형, 상황형 등의 유형으로 나뉜다.

사례 1은 동물형 공포증이다. 전형적으로 다른 공포증보다 이른 시기에 시작되며 대부분 아동기에 발병한다. 사례 2는 공포 대상이 천둥번개, 높은 장소, 물 등인 자연환경형 공포증. 이 경우도 주로 아동기에 발병한다. 사례 3은 혈액-주사-상해형 공포증으로 혈액이나 부상을 보거나 주사 같은 의학적 처치를 받을 때 나타난다. 사례 4는 대중교통, 터널, 비행, 운전, 폐쇄된 공간 같은 특수한 상황에 의해 유발되는 상황형 공포증이다. 이는 아동기와 20대 중반의 두 시점에서 가장 빈도가 높게 나타난다.

특정공포증을 가진 사람이 공포 대상이나 상황에 직면하면 크게 세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신체적, 인지적, 행동적 증상이 바로 그것. 신체적 증상으로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지며 몸이 떨리고 땀이 난다.

인지적 증상으로는 불안한 생각들이 머리에 자꾸 떠오른다. 불안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공포 대상이나 상황에 직접 해를 입을 거라는 생각이 그 중 하나다. 금방이라도 동물에게 물릴 것 같고 엘리베이터에 타기만 하면 갇힐 것 같다. 또 하나는 두려워하는 자신의 반응 때문에 해를 입을 거라는 생각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 숨이 가빠지다가 질식할 것 같고, 높은 곳에 올라가다간 어지럼증 때문에 떨어질 것 같다.

특정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공포 대상이나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장 많이 보이는 행동적 증상은 회피다. 일단 피하려고 한다. 그만큼 회피행동은 공포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처 방략이다. 게다가 피하고 나면 일시적으로 안도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회피하려는 욕구가 더 강해진다. 이렇게 해서 회피와 두려움 간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헉! 상어다! 저 삐죽한 이빨로 금방이라도 유리를 뚫고 나와서 나를 물어뜯지 않을까?' 동물을 무서워하는 공포증은 특히 어린아이에게 많이 나타난다.


공포도 학습된다

공포증은 도대체 어떻게 생길까. 공포증이 발달하는 경로 중 하나로 ‘외상적 조건형성’이 있다. 당신이 개를 볼 때마다 개가 심하게 짖었다고 가정해보자. 혐오스럽고 겁을 주는 소리와 개가 당신 뇌에 짝지어 제시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개를 볼 때마다 개가 무섭게 짖을 것이라고 학습하게 돼 나중에는 개를 보기만 해도 두려워진다. 높은 데서 떨어지고 난 다음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것도 같은 예다.

또다른 경로는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관찰하고 난 다음 공포증이 생기는 ‘관찰학습’. 다른 사람이 어떤 대상에 의해 다치거나 그런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을 봄으로써 공포증이 발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 것을 관찰한 아이는 자신도 천둥소리를 무서워하게 된다. 공포증 발달의 또 한 가지 경로는 두려움에 대한 정보를 직접 전달받는 것이다. 누군가가 특정 대상이나 상황이 매우 위험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줬을 때 공포증이 생길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큰 개가 위험하다고 계속 말하면 아이는 큰 개에 대한 공포증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다.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포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과도하거나 불합리하다고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증은 지속된다. 공포증을 지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회피행동이다. 공포 대상을 피하면 ‘두려운 대상을 직면하면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반박할 기회가 없어진다.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지도 못한다. 이로 인해 공포증이 ‘생생하게’ 유지된다.

공포증에서 해방되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오랫동안 피해왔던 상황에 직접 부딪쳐 보라. 거미가 나오는 곳에 계속 있어 봐야 거미가 해가 없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직접 타 봐야 그 안에서 공기가 부족해 죽지 않는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같은 ‘직면훈련’을 계속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공포 대상이 뇌에서 두려움 대신 편안함과 새롭게 연합된다.

단, 가장 쉬운 상황이나 대상부터 단계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뱀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처음부터 뱀을 직접 보는 훈련보다는 뱀 그림부터 보는 게 좋다. 또 두려워하는 상황에 충분한 시간동안 머물러야 한다. 너무 짧게 머물면 더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그만두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공포가 최고로 상승했을 때 떠나는 셈. 이 ‘고비’만 넘기면 두려움과 불안은 자연히 줄어든다.

물귀신은 도망가면 갈수록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한번 도망 다니기 시작하면 계속 도망 다녀야 한다.

[사례1]
가정주부 정씨는 어려서부터 쥐를 두려워했다. 검은 그림자를 쥐로 착각해 비명을 질러 어린 딸이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시골에 있는 시댁을 방문하기도 힘들다. 한번은 시골 부엌에서 쥐를 보고 기절할 뻔했다. 교외로 나가는 것조차 두려워해 몇 년째 가족여행도 못하고 있다.

[사례2]
중학생인 희수는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 얼마 전 학교 단체여행으로 제주도 성산일출봉에 갔는데, 올라가다가 순간 밑을 보고 너무 두려워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결국 친구가 희수를 끌다시피 해서 겨우 내려왔다. 희수는 다음달 수학여행 때 높은 곳에 다시 올라가게 될까봐 벌써부터 두려워하고 있다.

[사례3]
초등학생 민주는 주사를 두려워한다. 어렸을 때 장염으로 입원해 주사를 맞은 뒤부터다. 아파서 병원에 가도 주사만은 맞지 않겠다고 떼를 써 약만 타오는 경우가 많다. 고학년이 되고 나니 떼쓰는 게 창피해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병원에 가면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지난달에는 식중독에 걸렸는데도 주사 맞기를 거부해 결국입원까지 하고 말았다.

[사례4]
고등학생인 상민이는 얼마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꼼짝 없이 혼자 갇혀 있었다.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밖에선 대답이 없고,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갇혀있던 시간이 고작 10분이었는데 꼭 10시간처럼 느껴졌다. 그 뒤 상민이는 엘리베이터 타는 걸 두려워하게 됐다. 집이 아파트 17층인데도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계단으로 다닌다. 아무리 바빠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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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김은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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