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음이 밀려드는 어느 일요일 오후 나지막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젊은 부부가 떡 한 접시를 들고 서있었다. 새로 이사를 왔단다. 이사를 들었다고 떡을 돌리던 풍습이 자꾸 사라지는 요즘이라 아직도 이런 ‘옛날’ 사람들이 다 있구나 하며 마음이 훈훈해졌다. 좋은 이웃을 만난다는 것만큼 큰 행복도 별로 없다.
복제인간이 옆집에 이사오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 젊은 부부가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필자의 상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날이 우리 곁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정말 우리 시대에 복제인간이 우리 동네에 이사를 올지도 모른다. 만일 이런 일이 당신에게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쩐지 어딘가 수상쩍다 싶었다니까, 어휴 소름끼쳐”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복제됐으면 어때, 사람들이 아주 성실하고 좋더구먼. 그 사람들은 이미 내 친구야”라고 할 것인가.
생명과학의 눈부신 발달이 새로운 사회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간 유전체(genome)가 거의 그 전모를 드러냈고 양에서 출발한 체세포 복제가 급기야 원숭이에 이르렀다. 복제인간의 탄생은 이제 거의 현실로 다가섰다. 기형인간이 만들어질 확률은 아직 엄청나게 높지만 기술적으로는 사실상 더이상 큰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인지 종교계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성(神聖)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엄청나게 술렁이고 있다.
언뜻 보기에 인간복제를 비롯한 새로운 생명과학의 지식과 기술들은 기존의 종교적 믿음이나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윤리와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보인다. 사람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 온 세상을 쑥밭으로 만들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어디까지나 유전자 복제이지 결코 생명체 복제가 아니다. 아무리 지금 우리가 징기스칸을 복제한다 하더라도 그가 징기스칸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위대한 정복자가 될 약간의 포악한 성격은 타고날지 모르나 세상이 완전히 딴판으로 바뀐 현대에 그가 제2의 징기스칸이 될 확률은 거의 영에 가깝다. 테레사 수녀와 이수현을 아무리 많이 복제한다 해도 그들이 모두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복제인간은 출산시간이 좀 많이 벌어진 쌍둥이에 불과하다. 나는 쌍둥이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가 만일 지금 나를 복제한다면 무슨 이유에선지 어머니의 뱃속에서 수십년을 더 있다가 나온 쌍둥이 동생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수초 간격으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들이 결코 똑같은 사람으로 자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늦둥이 쌍둥이 동생이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인간이 될 리는 절대 없다. 유전자는 나와 완벽하게 같을지라도 그 유전자들이 발현되는 환경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 쌍둥이들이 좀 많아진다는 것이 그렇게도 끔찍한 일인가.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
이런 상상을 또 해보자. 어느날 젊은 청년 복제인간이 목사님을 찾아와 하나님을 영접하겠다고 밝혔다고 가정해보자. 교회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필자는 복제인간들에게도 거듭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혼은 절대로 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영혼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위에 세상을 살며 터득한 온갖 지식들이 한데 어울려 엮어진 산물이다. 복제인간에게도 그 나름대로 영혼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가 하나님을 영접한다면 그에게도 영혼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어차피 첫 탄생 즉 생물학적 탄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거듭나는 두번째 탄생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DNA는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복제의 길을 걸을 것이다. DNA가 이룩한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들 중의 하나가 인간의 두뇌일 것이다. 인간의 뇌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창세기 22장 17절) 만들어주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 뇌가 이제 막 섹스 없이도 유전자를 다량으로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DNA의 꿈을 대신 실현하고 있다. DNA는 지금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는 걸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종교학자 테드 피터스(Ted Peters)는 유전자형(genotype)으로부터 표현형(phenotype)이 만들어지듯 DNA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하나의 생명체로부터 다음 생명체로 전해지는 것은 오로지 DNA밖에 없다. 이 묘한 화학물질 안에 생명의 모든 디자인이 다 들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정신은 결국 물질(the physical)의 형이상학적 표현(metaphysical expression)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영혼을 얻는다. 하지만 생물학자인 필자는 영혼도 결국 하나의 생물학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도 절대로 똑같은 영혼을 갖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영혼이 DNA의 직접적인 표현일 수는 없다. 하지만 생물학은 유전학이 아니다. 생물학에는 유전학 외에도 유전자와 환경의 관계를 다루는 생태학이 포함돼 있다. 쌍둥이는 유전적으로 동일할지 모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절대로 동일할 수 없다. 복제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전자 복제보다 우리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은 유전자 조작의 문제이다. 복제인간은 한둘 만들어보다 시들하게 느낄 가능성이 크다. 한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한 미국프로농구 구단주가 마이클 조던을 다섯명 복제해 경기장에 내세우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던 다섯으로는 결코 우승하기 어렵다. 샤킬 오닐, 모텀보, 힐, 아이버슨, 그리고 조던으로 구성된 팀을 이길 수 없다.
유전자 조작은 다양성 줄여
저 남태평양 어느 외딴 섬에서 엄청난 수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허황한 꿈을 꿀 정신병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복제인간에 대한 매력과 호기심은 의외로 빨리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전자 조작은 자칫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마구 뻗어나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유전자의 기능들이 속속 밝혀지고 각자가 가진 결함들이 어떤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그 유전자를 보다 훌륭한 유전자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왜 일지 않겠는가. 노화의 비밀이 밝혀져 다만 몇개의 유전자만 갈면 수십년을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곧 태어날 아기의 유전체 정보 전부가 적혀 있는 차트를 손에 든 의사가 예비 부모와 하는 대화를 상상해보라. “축하합니다. 예쁜 따님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조사한 유전체 정보에 따르면 바로 이 유전자 때문에 사십대 중반쯤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확률이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높습니다. 저희 병원에 그것과 대체시킬 유전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세상 어느 부모가 그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체 할 수 있단 말인가. 의사 선생님은 거듭 병에 꼭 걸린다는 것이 아니고 그럴 확률이 약간 높다는 것이라며 안심을 시키려 해도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유전자 치환이 아무리 비싸다 하더라도 부모로서는 빚을 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좀더 훌륭한 유전자로 자신 또는 후손의 유전체를 질적으로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다. 그간의 진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해온 일이 바로 그 일이 아니던가. 특히 성(sex)이란 정확하게 유전체의 질적 향상을 위해 진화한 생물학적 현상이다. 문제는 우리들이 행할 유전자 치환시술이 그동안의 진화에 정확하게 역행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데 있다.
유성생식은 유전자의 다양성을 도모하기 위해 자연이 고안해낸 방법이다. 그런데 사회의 구성원 거의 전부가 똑같은 유전자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확하게 유전자의 다양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각각의 개인들은 유전적으로 우수해지지만 개체군 전체는 엄청나게 연약하게 변한다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이 숨어 있다.
생명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전례 없이 어려운 문제를 던져주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에 심각한 도전을 하기 때문이다. 일찍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이 ‘멋진 신세계’에 걸맞는 새로운 윤리가 필요하다. 혹자는 필요에 의해 윤리의 기준을 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멋진 신세계를 위한 새로운 윤리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윤리 역시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해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인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도덕을 운운하며 도덕적으로 살기를 열망하는가. 그것은 도덕적인 사람들이 부도덕한 사람들보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사람들이 부도덕한 사람들보다 덜 성공적이어서 자식을 많이 남기지 못했다면 우리를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유전자는 지금 우리 몸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만든 유전자가 보다 많은 자손을 남기게 해주었기에 ‘도덕유전자’가 지금도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윤리기준을 마련하는 일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새 포도주는 마땅히 새 병에 담아야 한다. 과학의 발달이 우리에게 너무 갑작스레 많은 숙제들을 던져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지를 앞세운 두려움과 뻔히 보이는 것을 애써 부정하려는 어리석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문제의 과학적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는 일이 우선 이뤄져야 하고 그에 따라 현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그 새로운 규범에 따르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다.
과학자들의 연구를 막무가내로 막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담그기를 멈출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해야 한다. 과학자가 새로운 연구를 시작할 때마다 일일이 윤리 검열을 받지 않으려면 과학자로 자립하기 전에 스스로 윤리적 소양을 쌓아야 한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도 확고한 세계관과 역사관을 세울 수 있도록 인문사회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과학자라고 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더이상 노벨이 걸었던 길을 걸을 수 없다. 현대과학이 자칫하여 저지를 수 있는 사고는 더이상 다이너마이트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의 자기반성과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과학자들 스스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세워야 한다. 다른 모든 일도 그렇듯이 자율규제가 지나친 외부의 간섭을 막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두려움과 어리석음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종교와 과학 간의 대화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든 공통적으로 윤리는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하지만 이제는 윤리와 종교도 과학의 범주에 들어왔다. 기독교 시인 오든(W. H. Auden)이 말했듯이 “과학이 없이는 평등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윤리가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려면 과학과 종교가 함께 일해야 하며,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는 과학과 종교에 고루 달려 있다고 물리학자 다이슨(Freeman Dyson)은강조한다. 미국작가허바드(Elbert Green Hubbard)는이런말을남겼다.“ 교회는죄인들을구원하지만과학은 죄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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