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서울대학교에서 대칭과 관련이 깊은 ‘군론’을 연구하는 이승재 박사후연구원입니다. 지난 호에서는 모교인 옥스퍼드대학교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오늘은 옥스퍼드대 수학과와 그 역사를 짚어보려고 합니다.
“선과 각도, 그리고 조형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이것이 없이 자연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현상의 근원은 이들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
- 옥스퍼드대 초대 총장 로버트 그로스테스트 -
옥스퍼드대 교육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예요. 그는 몇몇 사료에서 옥스퍼드대 초대 총장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영국의 대철학자이자 자연철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중 한 명인 로저 베이컨 역시 이 그로스테스트의 교육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로스테스트는 신학과 자연철학을 가르쳤지만, 수학을 활용한 분석과 과학적 사고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 1896년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그로스테스트 초상화예요.
그로스테스트는 옥스퍼드대 초대 총장으로 알려진 철학자로, 자연철학에서 수학을 활용한 분석을 중요하게 여겼어요.
중세시대부터 수학 교육 중요시
적어도 1209년부터 교육기관으로 존재했던 옥스퍼드대는 일곱 개의 ‘자유과(Liberal Arts)’ 학문을 가르치는 고등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설립 때부터 1550년까지는 문법과 수사학, 변증학(논리학)을 배우는 4년제 과정과 산술과 기하학, 점성술, 음악을 배우는 3년제 과정으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자유과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있는 지식인’이 공통으로 갖춰야 할 폭넓은 소양을 쌓을 수 있는 과목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중 산술과 기하학 이렇게 두 과목이 수학 영역에 속합니다. 그만큼 옥스퍼드대의 교육에서 수학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는 걸 엿볼 수 있지요.
▲ 12세기 프랑스 몽 생 오딜 수도원의 수녀인 헤라드 폰 란츠베르크의 저서 <;호르투스 델리키아룸>;에 담긴 그림으로, 교양있는 지식인이 꼭 배워야 한다는 자유과의 일곱 학문을 나타내고 있어요.
수학의 발전을 위하여!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
설립 초창기부터 수학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했던 옥스퍼드대지만, 지식인이 가져야 할 소양을 넘어 ‘수학’이라는 단독 학문으로서 연구의 가치를 인정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습니다.
옥스퍼드대 출신의 영국 고전학자이자 수학자였던 헨리 세빌 경은 17세기 영국의 엉망이었던 수학, 과학 발전의 상태를 보고, 1619년 본인의 재산을 기부해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와 ‘세빌리안 천체물리학 교수’라는 자리를 옥스퍼드대에 만들었습니다. 1597년 런던 그레셤칼리지에 만들어진 그레셤 기하학 교수 자리에 이어 영국에서 두 번째로 생긴 수학만을 위한 교수 자리입니다.
첫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는 최초의 그레셤 기하학 교수이자 그레셤칼리지를 영국 수학의 중심지로 만든 헨리 브릭스가 맡았습니다. 17세기 영국에 처음 생긴 수학만을 위한 교수 자리는 모두 브릭스가 맡아 이끌었지요.
이 영예로운 자리는 현재도 옥스퍼드대에 있으며, 2017년부터 프랜시스 커완 교수가 제20번째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옥스퍼드대 대표 수학의 영웅들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
재임기간 1649~1703년
존 월리스는 1649년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로 임명돼 1703년까지 무려 54년 동안 이 자리에서 활발하게 수학 연구를 이어갔습니다. 그는 영국 왕립학회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무한대 기호인 ‘∞’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무한과 극한을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초창기 연구자 중 한 명입니다. 후에 영국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의 미적분 연구에 많은 영향을 줬습니다.
재임 기간 1704~1742년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이자 수학자, 기상학자, 지구물리학자인 에드먼드 핼리 역시 1704년부터 1742년까지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그는 뉴턴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뉴턴 역학이 집대성 되어있는 <;프린키피아>;의 출판을 지원하고, 천체의 궤도가 완전한 원이 아닌 타원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 약 75~76년 주기로 지구에 접근하는 핼리혜성의 특징을 알아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재임 기간 1919~1931년
20세기 초 영국을 대표하는 수학자인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의 수학자로 잘 알려졌지만, 1919년부터 1931년까지 12년 동안 옥스퍼드대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를 역임하며 활동했습니다. 이 당시 하디는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 리만 가설 해결하기,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르기 등 6가지 소원을 빌기도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모두 이루지 못했습니다.
재임 기간 1963~1969년
20세기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인 마이클 아티야 경 역시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 자리를 맡았습니다. 재임 기간 중이었던 1966년 만 40세 이하 젊은 수학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필즈상’을 받았지요. 2004년에는 수학계 가장 권위 있는 공로상인 아벨상도 받았습니다.
1966년 수학과만을 위한 건물을 짓다
이렇듯 설립 초창기 때부터 수학 교육에 신경을 썼고, 17세기에 수학만을 위한 교수 자리를 만들 정도로 수학 교육에 앞장섰던 옥스퍼드대였지만, 정작 수학과만을 위한 건물을 지은 건 아주 최근인 1966년입니다.
1920년대 세빌리안 기하학 교수로 재임 중이던 하디는 수학 수업을 할 때마다 매번 빈 강의실을 수소문해서 빌려야 하는 상황을 개탄하며 수학과 건물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의 바람이 바로 이뤄지진 못했지만, 30여 년 뒤에 수학과 건물이 생기지요.
참고로 하디보다 100년 정도 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자로 더 잘 알려진 옥스퍼드대 수학자 찰스 도지슨(필명 루이스 캐럴)이 수학과 건물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학교에 항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고 하네요.
1966년 처음 수학과 건물이 지어졌지만, 수학과의 모든 학생과 교직원들, 그리고 수업까지 감당하기엔 건물이 너무 작아서 2개의 다른 건물을 더 활용해야만 했습니다. 교수들조차 연구 공간이 부족해 두세 명씩 방을 함께 써야 했지요. 학생들은 수업을 들을 자리가 부족해서 선형대수학같이 1학년 전체가 공통으로 들어야 하는 과목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공룡 뼈들을 보며 수업을 들어야 했습니다.
옥스퍼드대 수학과의 역사와 명성에 걸맞지 않은 작은 수학과 건물을 쓰다 보니 사람들의 불만과 걱정이 쌓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새 건물을 짓기 위한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많은 검토와 회의가 오간 끝에 지금의 수학과 건물이 지어졌지요. 바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푼 영국의 대수학자 앤드루 와일스 경의 이름을 따서 만든 앤드루 와일스 건물! 2013년 완공돼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했던 옥스퍼드대 수학자의 필즈상 수상
2022년 7월 5일 제임스 메이나드 옥스퍼드대 교수가 허준이 교수님과 함께 2022 필즈상을 거머줬는데요. 사실 옥스퍼드대의 역사와 명성, 수학 업적과 비교하면 옥스퍼드대 수학과 출신 필즈상 수상자가 적다는 건 학교의 큰 아쉬움이자 약점 중 하나였습니다.
1936년부터 지금까지 86년 동안 64명의 필즈상 수상자가 나왔지만, 옥스퍼드대 소속 필즈상 수상자는 고작 4명밖에 없거든요. 그중에서도 옥스퍼드대에서 수학을 배운 수상자는 1986년 수상자 사이먼 도널드슨 교수님과 올해 수상자인 메이나드 교수밖에 없고, 다른 두 분은 필즈상 수상 당시 소속이 옥스퍼드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옥스퍼드대는 모교 출신 필즈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항상 고대했었는데, 메이나드 교수의 수상으로 학교가 마치 축제 분위기와 같았습니다.
참고로 제 옥스퍼드대 재학시절은 메이나드 교수와 겹치는데요. 심지어 메이나드 교수의 박사 지도교수님이신 로저 히스-브라운 교수님은 제 석사 논문 지도교수님이십니다. 연구 분야가 어느 정도 겹치다 보니 종종 밥도 같이 먹고, 학술 행사에도 같이 참여했었습니다. 2013년에는 당시 옥스퍼드대 재직 중이셨던 김민형 교수님의 타원 곡선 강의의 조교를 메이나드 교수와 함께 맡기도 했습니다. 그게 벌써 9년 전인데 이렇게 메이나드 교수가 필즈상을 타다니! 저도 너무 신기하면서 기분이 좋네요. 그 당시 메이나드 교수가 저한테 좋은 조교라고 평가해 준 이메일이 있는데 앞으로 ‘가보’로 간직해야겠어요.
이렇게 제가 다니고 공부했던 옥스퍼드대 수학과를 소개하니 재밌기도 하고, 글쓰기 준비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도 많아 뿌듯하네요. 다음 호에서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려고 합니다. 특별한 손님을 소개할 테니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