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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수학자 러셀 수학을 논리 위에 세우다

러셀이 첫 번째로 가진 직업은 수학자예요. 24살의 어린 나이에 대학교 수학과의 선임 연구원이 되어 연구와 강의를 이어 가게 되지요. 그런데 러셀이 수학자가 된 계기는 외로웠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어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러셀은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어요. 학교 교육에 반대하는 할머니 때문에 러셀은 집에서 개인 교습을 받으며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이런 러셀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렸으니, 바로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이었어요. 러셀이 11살 때 형 프랭크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알려 주었는데, 러셀은 이 순간이 매혹적이고 감미로웠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답니다.

 

수학과 사랑에 빠진 러셀은 1890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의 장학생으로 입학해요. 이때 스승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수리논리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눈에 들어요. 자신의 실력을 알아봐 준 화이트헤드의 영향을 받아 수학과 논리학에 빠지지요. 러셀은 수학과를 3년 만에 최우등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1895년 모교의 선임 연구원이 돼 연구와 강의를 하며 수학자의 삶을 삽니다.

 

현대 수학의 기초를 다지다!

 

러셀은 1900년부터 수리논리학에 몰두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이탈리아의 기호논리학자 주세페 페아노를 만났거든요. 페아노는 수학을 논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러셀의 마음을 뜨겁게 했어요.

 

러셀은 ‘수학=논리학’이라는 생각으로 수학을 논리학 위에 세우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집합으로 수학의 체계를 완성하려 했던 고틀로프 프레게의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내용을 편지에 적어 프레게에게 알립니다.

 

당시의 수학계 상황을 살펴보면, 프레게는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가 완성한 집합론을 사용해 수학의 체계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어요. 프레게의 도전이 성공을 눈앞에 두던 때쯤 러셀이 프레게가 주장하는 논리의 모순을 발견한 거지요. 이것이 유명한 ‘러셀의 역설’이에요.

 

김병한 연세대학교 수학과 교수는 “집합론으로 수학의 기본을 잡으려는 현대 수학의 시초에 내재된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한 것은 러셀의 수학자 인생에서 가장 큰 공헌”이라며, “이것이 없었다면 현대 수학이 없었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어요.

 

언어의 모호함은 빼고, 자명하게!

 

러셀은 수학의 모든 것들을 기호만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와 약 10년 동안 연구해 완성한 저서 <;수학의 원리>;는 최대한 기호로 수학 개념을 표현해 언어적 모호함이 없도록 했어요. 이 책에 담겨 있는 유명한 내용 중 하나가 ‘1 + 1 = 2’임을 증명한 것이랍니다.

 

러셀의 이러한 노력은 현대 수학에서 중요한 기호논리학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습니다. 또 언어적 모호함을 배제한 기호 사용은 현재 프로그래밍 언어에서 논리적 모순을 찾는 데 많이 활용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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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수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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