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도 잭 더 페인터의 짓이란 걸 알았다. 문제는 놈의 소행이란 것 말고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는 거다.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페인터를 쫓아야 할까. 내가 가진 확실한 정보는 범행 장소뿐인데…. 아! 그렇다면 지리적 프로파일링 기법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지리적 프로파일링이란 연쇄 범죄자를 잡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기법 중 하나입니다. 동일범의 범
죄로 보이는데 달리 특정할 증거가 없을 때 수사 방향의 우선순위를 제시하죠. 지금 널리 쓰이는 지리적 프로파일링 아이디어는 기차 안에서 휘갈겨 쓴 한 수학자의 메모에서 시작했습니다.
캐나다 경찰이었던 킴 로스모는 어릴 때부터 수학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습니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까지 두렵게 만드는 수학 천재 로스모는 당시 경찰 수사의 판에 박힌 느린 진행에 답답함을 느껴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범죄자를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수학적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다 탄생한 것이 ‘로스모 공식’입니다.
범인의 거점을 찾는 지리적 프로파일링
로스모 전에도 수사에 수학을 사용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주로 범죄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해서 다음에 범죄자가 나타날 장소를 예측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면 로스모는 범행이 일어났던 위치 정보를 이용해 범인의 거점을 찾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가령 스프링클러가 있다고 할 때 떨어진 물방울들만 보고 다음에 물이 떨어질 장소를 예측하는 건 어렵지만, 물방울들이 튄 자리를 보면 스프링클러가 어디에 있는지는 계산할 수 있다는 거죠.
이 아이디어를 반영한 로스모 공식은 ‘라이젤’이라는 프로그램이 됐고, 세계 각지의 수사기관에서 쓰이게 됐습니다. 이후 라이젤 외에도 여러 지리적 프로파일링 프로그램이 생겨났고, 우리나라에도 인구밀도가 높은 한국의 환경에 맞춰 개발한 ‘지오프로스’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습니다.
1998년, 10년 넘게 경찰의 속을 썩이던 미국 라파예트 지역 강간범을 잡는데 로스모 공식이 큰 몫을 했기에 오늘날 지리적 프로파일링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죠. 로스모 공식을 기억한 채 과거로 돌아간 우리의 형사도 연쇄살인마를 잡을 수 있을까요?
파묻힌 진실을 꿰뚫는다
드디어 범인의 거점을 찾았습니다. 형사는 당장 동료들을 불러 현장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원 곳곳에서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이 시신의 수가 그동안 발생했던 연쇄살인 건수와 일치한다면 적어도 잭 더 페인터에게 아주 가까워진 거겠죠. 문제는 한 자리에 한 시신만 묻힌 것도 아니고 형태가 온전하지도 않다는 점입니다. 토막 내서 다른 장소에도 묻어둔 건지 발견된 시신은 뼈의 수가 맞지도 않고 없는 부위가 많은 모양입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도 수학은 힘을 발휘합니다. 쓰나미나 건물 붕괴 등 대규모 재난이 일어난 장소를 발굴할 때는 사체가 온전하게 보전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가장 많이 발견된 부위를 기준으로 최소 개체수를 계산해 전체 피해자 규모를 추정합니다. 예를 들어 왼쪽 허벅지 뼈가 4점, 오른쪽 허벅지 뼈가 7점 나왔다면 아무리 적어도 그 자리에 7구의 시신이 있었다고 볼 수 있죠. 이를 좀 더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 링컨지수, 근사개체수 등의 방법을 이용합니다. 링컨지수는 좌우 뼈의 개수를 곱한 뒤 한 쌍이라 생각되는 수를 나눈 지수이고, 근사개체수는 링컨지수를 통계적으로 조금 수정해 보완한 방법입니다.
수학 이용한 수사, 실제로도 도움 될까?
20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경찰서는 전반기 동안 풋힐즈 구역에서 발생한 절도가 전반기보다 25%적었고 전체 범죄는 13% 줄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주변 다른 지역에서는 범죄율이 오히려 조금 증가했는데 말입니다. 왜 풋힐즈에서만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2012년 전반기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어디에도 없던 실험이 진행됐습니다. 매일 수학 모형이 다음날 범죄가 일어날 확률이 높은 지역을 예측하고 그쪽으로 경찰을 보내 주시하도록 한 겁니다. 그날 순찰 지역을 배정받은 경찰관은 자신이 가는 곳이 컴퓨터가 예측한 지역인지 사람이 예측한 지역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날마다 컴퓨터가 만든 난수에 따라 어떤 경찰에게는 사람이 예상한 지역을 배정하고, 어떤 경찰에게는 수학 모형이 예측한 지역을 배정했죠.
블라인드로 진행된 실험에서 수학 모형이 예측한 결과는 인간의 예측보다 약 두 배 더 정확했습니다. 실험 전, 경찰은 수학 공식으로 인간의 행동을 짐작한다는 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실험으로 수학 수사의 효과를 확인했고 점차 적용 범위를 넓히게 됐죠.
물론 현실 속 모든 범죄를 수학만으로 정확히 계산할 순 없습니다. 범죄는 수많은 변수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의 성향, 환경적 요소 등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죠. 하지만 수학 수사기법이 형사의 경험과 만난다면 범인을 잡는데 분명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도 수사방면 수학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야겠죠.
누군가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혹시 일어날 피해마저 막을 수 있는 수학이라니,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샘솟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