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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26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연구노트

수학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직관력과 지성이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 비견될
정도의 인물이다. 아쉽게도 일반 대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로텐디크가 수학자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1950~1970년대였다. 이 시기에 현대수학의 중요한 분야를 완전히 새로 정립했으며, 자신이 개척한 분야를 알리고 세계의 수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했다.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도 이 시기에 받았다(1966년). 필즈상은 국제수학연맹이 4년마다 개최하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40세 이하의 뛰어난 업적을 낸 몇 명의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1988년 1월 10일 모든 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1991년 8월의 어느 날 집을 떠나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그런데 그로텐디크는 모습을 감추기 전, 제자이자 현재 몽펠리에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연구소에서 프로젝트 리더를 맡고 있는 장말구아르 교수에게 그동안 발표하지 않은 연구노트를 모두 남기고 떠났다. 말구아르 교수는 그 당시를 회상하며 말을 꺼냈다.

 

“그로텐디크 교수님은 1970년대에 논문 발표를 그만뒀습니다. 그렇다고 연구까지 중단한 건 아니었어요. 발표하지 않은 연구의 내용이 제가 받은 노트에 모두 담겨 있었지요. 제게는 그 내용을 보관하는 책임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출판할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책임까지 있었습니다.”

 

말구아르 교수는 이 노트를 계속 보관하다가 2017년 5월 10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온라인에 공개했다.

 

모 아니면 도인 성격의 소유자, 그로텐디크 말구아르 교수는 그로텐디크가 극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며칠 동안 굶다가도 무언가 한 가지를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하루도 빠짐없이 그걸 먹었다. 말구아르 교수는 “그로텐디크 교수님은 어렸을 때 아주 가난해서 원하는 음식을 많이 먹지 못해 그런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로텐디크는 1928년 3월 28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렬한 혁명주의자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서 겨우 5년 동안만 부모와 함께 베를린에서 살았고, 부모가 차례로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뒤에는 독일 함부르크의 친척집에 머물며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1939년 독일에서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가 섞인 나치즘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유대인인 그로텐디크는 학대를 피해 기차를 타고 파리로가 아버지와 재회했다.

 

재회의 기쁨도 잠시, 그로텐디크는 어머니와 1940년 환경이 열악한 리외르코 수용소에 갇혔다. 이후 유대인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며 몹시 힘든 생활을 이어갔다. 설상가상으로 1942년 아버지는 나치 정권에 의해 독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수용소에서 혼자 보낸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고독한 시간은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도 생각을 만들고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줬다”고 생각했다.

 

 

이후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중부 생테티엔 남쪽에 있는 해발 900미터의 삼림지대인 르샹봉쉬르리뇽으로 피신했다. 현지 학교인 콜레주 세베놀에 다니며 프랑스 대학 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다.

 

그로텐디크는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한 문제에 불만이 많았다. 특히 현실에 기초한 길이나 넓이, 부피 같은 개념을 제대로 정의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불만이었다. 그는 ‘측도 이론’에 흥미를 느꼈는데, 이 이론은 수십 년 전에 ‘르베그측도와 적분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완성돼 있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혼자 힘으로 이를 이끌어냈고, 아주 나중에서야 기존에 있던 이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로텐디크는 몽펠리에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강의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기 초에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고 모든 지식을 흡수했기 때문에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로텐디크의 뛰어난 재능을 눈여겨 본 교수들의 추천으로, 1948년에 파리로 가서 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19살에 파리 수학계에 나타난 그로텐디크는 빈약한 교육을 받은 탓에 고등사범학교 대학원 과정이나 세미나에서 다루는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수준 높은 내용을 빠르게 습득해 곧 저명한 교수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그로텐디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학 지식인 집단과 가깝게 지냈는데, 이들은 합의를 통해 결론을 냈다. 한편 그로텐디크는 느리지만 납득할때까지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이런 차이 때문일까? 그 집단의 지식인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로텐디크는 현대 수학을 완전히 바꿔놓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고등과학연구소(IHES)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런데 순수한 학문 연구기관이 길 바랐던 IHES에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자금이 일부 들어오자, 전쟁을 극도로 싫어했던 그로텐디크는 IHES를 떠났다. 이후 자신이 공부했던 몽펠리에대로 돌아와 1988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김치와 맺은 인연
먼 나라의 수학자였지만, 그로텐디크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우리의 전통 음식인 김치를 좋아했던 것이다. 건강에 좋다고 생각해 직접 담가서 매일 먹었으며, 김치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그로텐디크에게 김치를 알려준 건 제자였던 윤석임 전 덕성여자대학교 교수였다. 말구아르 교수에게 김치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로텐디크 교수님의 집에서 직접 김치 담그는 방법을 배우고, 함께 담가 나눠 먹었습니다. 맛있기는 했지만, 산도가 강해 매일 먹기는 힘들었어요. 하지만 음식을 보존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치 에세이에는 필요한 도구나 만드는 방법이 쓰여 있었습니다. 학문적인 논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말 엄청나게 자세한 내용이 들어있었지요. 여기서도 그분의 연구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치가 건강에 좋다며 매일 먹었던 모습을 봐도, 관심이 있으면 끝까지 하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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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새로운 기하학의 탄생, 그로텐디크의 노트

Part 1. 26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연구노트

Part 2. 현대 수학의 보물, 그로텐디크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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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호 수학동아 정보

  • 김경환 기자(dalgudot@donga.com)
  • 도움

    장 말구아르(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노트 프로젝트 리더), 장미셸 마랭(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노트 프로젝트 리더)
  • 기타

    [참고 서적] 아미르 D. 악젤 ‘수학 미스터리, 니콜라 부르바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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