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선택한 생존전략 중 하나는 바로 ‘아름다운 꽃 피우기’다.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들 사이에서 더 크고 아름답거나 향기로운 꽃을 피워 곤충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식물 중에서도 가장 진화한 종자식물만이 꽃을 피운다.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겉씨식물의 꽃은 열매와 비슷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겉씨식물은 대개 수나무와 암나무가 각각 수꽃과 암꽃을 피운다. 수꽃에서 나오는 꽃가루는 바람을 타고 암꽃에 날아간다. 하지만 바람 방향이나 세기에 의존해야 해 수분★확률이 낮다.
그래서 식물은 곤충을 이용해 번식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면 곤충을 어떻게 끌어들어야 할까? 보고는 절대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이다! 달콤한 꿀과 즙, 향기…. 어떤 식물은 커
다랗고 화려한 색깔의 꽃을 피우는 미인계를 택했다. 꿀을 얻으려는 벌과 나비가 좀 더 오랫동안 머물면서 꽃가루를 확실히 옮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미인계의 비밀 ‘플로리겐’을 찾아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식물은 복잡한 진화를 거쳐야 했다. 그 중 가장 커다란 변화가 바로 호르몬이다.
사람은 매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잠에서 깨고, 끼니 때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만큼 배가 고프다. 늦은 밤에는 꾸벅꾸벅 잠이 쏟아진다. 우리 몸속에 생체시계가 있는 것처럼 꽃의 일생에도 생체시계가 있다. 식물학자들은 여러 실험을 통해 씨앗에서 싹이 돋거나, 줄기가 자라거나, 낙엽이 질 때마다 특
정한 호르몬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꽃이 피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식물이 꽃이 피는 데 햇빛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29알려져 있었다. 러시아의 식물학자 미하일 차일라캰은 나팔꽃을 이용해 실험을 했다. 나팔꽃을 깜깜한 곳에 약 10시간 동안 뒀다가 밝은 곳에 내놓으니 꽃눈에서 꽃이 피었다. 그런데 밝은 곳에 내놓기 전에 잎을 모두 따버리면 꽃이 피지 않았다. 그는 햇볕을 받으면 잎에서 개화호르몬이 만들어져 줄기를 타고 끝부분으로 가 꽃을 피운다고 결론지었다.
과학자들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식물에서도 호르몬을 분리해 연구한다. 그 결과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줄기가 햇볕을 향해 자랄 때, 기온이 뚝 떨어져 낙엽이 생길 때처럼 다양한 경우에 어떤 호르몬이 각각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냈다. 하지만 플로리겐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물음표였다. 어떤 작용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플로리겐 자체를 분리하는 데 성공한 사람도 없었다.
식물학자들은 잎과 줄기 속 체액, 꽃눈에서 발현하는 유전자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플로리겐의 정체를 추적했다. 그리고 식물이 햇볕을 충분히 받을 때 어떤 과정을 거쳐 꽃이 피는지 한 가닥 실마리를 찾아냈다.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낮에는 잎에서 ‘자이겐티아’ 유전자가 발현됐다. 이 유전자에서 만들어진 자이겐티아 단백질은 ‘콘스탄스’ 유전자가 발현되도록 도왔다. 콘스탄스 단백질이 일정한 양만큼 생기면 ‘FT유전자’가 발현되었다. 실제로 지난 2012년 싱가포르국립대 연구팀은 줄기를 타고 끝부분으로 이동하는 FT유전자의 mRNA(유전자가 발현되는 과정의 중간단계)를 발견하기도 했다. FT유전자는 또 다른 여러 유전자를 발현시켰다. 이 유전자들이 서로 돕거나 견제하면서 꽃의 각 기관을 만든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결국 FT유전자가 꽃을 피우는 데 핵심적인 ‘플로리겐’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꽃의 각 기관을 만드는 ABC모델
미국의 식물학자인 조지 하운과 크리스 서머빌은 애기장대에 돌연변이를 일으킨 뒤 각각 피우는 꽃 모양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만들고, 꽃의 어느 부위가 생기지 않는지 관찰하는 방식이다. 실험 결과 연구팀은 애기장대가 꽃을 만드는 데 작용하는 여러 호르몬을 역할이 비슷한 것끼리 묶어 세 그룹으로 나눴다. 이를 ABC모델이라 부른다. 하지만 한 그룹마다 수 개, 많게는 수십~수백 개
의 유전자가 들어 있다. 같은 그룹에 속해 있는 유전자끼리도 서로 돕거나 견제한다. 즉, 같은 그룹에 생긴 돌연변이라도 정확히 어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겼느냐에 따라 꽃의 모양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네덜란드 와게닝대 국제식물연구소의 시몬 무릭 박사팀은 ABC모델을 응용한 수학모형을 만들었다. 각 그룹에 속한 유전자의 특성과 상호작용에 따라 꽃이 만들어지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함수로 나타낸 것이다. 이 외에도 기온이나 습도, 일조량 같은 변수도 넣었다. 무릭 박사팀은 이 모형을 이용해 꽃의 모양을 좀 더 정확히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뿌리와 잎, 줄기가 자라는 정도와 꽃눈이 발달해서 꽃이 피는 시기까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속씨식물은 다양한 꽃을 피운다. 벚나무는 팝콘처럼 작은 꽃을 수없이 많이 피우고, 튤립은 꽃잎을 항아리처럼 둥글게 모아 핀다. 식물마다 다르게 생긴 꽃을 피우는 이유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해 벌과 나비 같은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식물학자들은 꽃이 곤충을 최대한 많이 유인하기 위해 어떻게 진화했는지 연구했다. 그리고 백합에 주목했다. 백합은 꽃잎이 다른 꽃에 비해 크기 때문에 하늘 높이 날고 있는 곤충의 눈에도 쉽게 띄고, 특유의 향기도 널리 퍼뜨린다. 가장 신기한 점은 다 피었을 때의 백합 꽃잎을 모으면, 꽃봉오리였을 때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커다란 꽃잎이 어떻게 작은 꽃봉오리 안에 갇혀 있었을까?
거대한 꽃잎을 감춘 기하학적 비밀
미국 하버드대 생물진화응용과학연구실의 락히미나라야난 마하데벤 교수팀은 백합이 피는 과정에 기하학적으로 접근했다. 꽃봉오리가 점점 벌어져서 꽃잎이 활짝 펼쳐질 때까지 과정을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해 관찰한 것이다.
연구팀은 꽃봉오리의 세로축(꽃대)을 y축, 꽃이 펼쳐지는 가로 방향을 x축으로 정했다. 그리고 시간에 따라 꽃이 움직이는 모습, 즉 꽃잎이 오므리고 있는 각도와 위치 등을 변수로 하는 수학모형을 만들었다. 이 모형을 이용하면 백합 꽃봉오리가 펼쳐지는 과정을 시뮬레이션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꽃봉오리에서는 꽃잎이 꽃대를 향해 휘어져 있다가, 꽃이 피면서 점점 꼿꼿해졌다. 그리고 꽃대 반대 방향으로 휘어지면서 펼쳐졌다. 꽃잎은 꽃봉오리 안에서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꽃이 피면서 팽팽해졌다. 꽃잎이 최대한 펼쳐진 다음에는 다시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생겼다.
연구팀은 식물이 꽃을 크게 피우더라도 꽃봉오리는 가능한 한 작게 만들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꽃봉오리가 너무 크면 비바람이나 외부 압력으로 망가지거나 떨어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합은 거대한 꽃잎을 주름이 질 정도로 오므려 작은 꽃봉오리 안에 감추는 방법을 택했다.
이렇게 식물은 최대한 많이 번식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기하학적으로 안정된 모양으로 꽃을 피운다. 그리고 꽃은 수분을 성공할 확률을 더욱 높이기 위해 과학적, 수학적으로 좀 더 획기적인 전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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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꽃 피는 수학적 생존전략
생존전략 1 화려한 꽃 미인계
생존전략 2 널리 퍼지는 꽃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