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보물이 가득한 웅진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 부여, 익산 세 도시에 걸쳐 있는 8개의 유적지를 말합니다.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 마지막으로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가 여기에 속하지요. 오늘은 웅진시대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인 무령왕릉으로 시작해서 공산성, 사비시대의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5층 석탑까지 둘러보겠습니다.
1500년 전 무령왕 무덤에 들어서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510/M201510N013_img_01.jpg)
송산리 고분군의 1~5호분은 굴 모양의 돌로 만든 무덤이지만, 6호분과 7호분인 무령왕릉은 벽돌식 무덤으로 그 당시 중국 남조와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다른 무덤의 유물은 도굴당했지만, 무령왕릉은 1971년 6호분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돼 1500년 전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났어요.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무덤 중에 유일하게 그 주인을 밝히는 지석이 함께 발견돼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지요.
이제 무령왕릉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아치형 입구를 통과해 터널을 지나면 이것과 같은 모양의 큰 터널이 하나 더! 바로 이 아치형 큰 터널이 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던 묘실이랍니다. 묘실에 들어서니 내벽의 벽돌 무늬가 특별하네요. 안쪽 벽은 28가지 무늬를 지닌 벽돌을 4평 1수(4개는 가로로 쌓고, 1개는 세워서)로 쌓아 만들었어요. 만약 벽돌을 가로나 세로로만 쌓았다면 안정감은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지진으로 인한 횡력★이나 위로 쌓인 흙 무게 때문에 무너지기 쉬웠을 거예요. 따라서 4평 1수 방법으로 벽을 견고하게 해 안정감을 주고 벽돌의 무늬를 맞춰 무덤을 고귀하게 만들었어요.
횡력★ 건물에 수평으로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한편,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4678개의 유물은 이곳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백제의 화려하고 세련된 공예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 중 12종은 국보로 지정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관·전시 중입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는 왕비의 신체 일부도 전시돼 있다고 하니, 시간을 내어 꼭 둘러보세요.
특별한 모양의 연못을 품은 공산성
국립공주박물관을 나와 차로 5분쯤 이동하면 공산성에 도착할 수 있어요. 공산성은 조선시대 때 부르던 이름이고,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이라고 불렀어요. 공산성의 금서루에 올라 오른쪽 성벽을 따라 걸으면 석성과 토성을 모두 살펴볼 수 있고, 진남루, 동문루, 만하루, 공북루 등을 마주하며 백제시대의 건축과 조선시대 문루건축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답니다. 그중 만하루 옆에 있는 연못은 특별한 모양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치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습이거든요. 연못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간이 좁은데, 이러한 구조는 연못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연못은 빗물을 모은 뒤 종종 급할 때 사용하는 물 저장소였기 때문에 조상들은 이것까지 생각해서 연못을 설계한 것으로 보여요. 가능한 빗물을 많이 저장하고, 또 비가 많이 내릴 경우에는 연못이 넘치지 않도록 금강 쪽으로 배수구를 만들어 놓았거든요.
연못 안쪽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만들어 놓은 걸 보니,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의 양이 적은 때에는 사람이 직접 물을 길러 오르내렸나 봅니다. 아차! 왕궁지 터에 원뿔대를 거꾸로 세운 것과 모양이 비슷한 연못이 또 있답니다. 이 연못은 동성왕 때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경용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공산성을 둘러보면서 서로 다른 모양의 두 연못을 찾아 보세요!
백제의 숨결을 따라 사비도성으로~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510/M201510N013_img_02.jpg)
이제 공주를 떠나 사비도성이 있는 부여의 정림사지로 떠나 볼까요?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중앙에 있는 절터랍니다. 정림사는 백제의 다른 사찰과 달리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모양의 평면입니다.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모양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서 조금 안타깝군요. 또 기존 백제 사찰의 목탑이 금당 앞 공간을 1/12 만큼 넓게 차지한 것과 비교해, 정림사는 석탑이 금당 앞공간을 1/100 만큼만 차지합니다. 다른 사찰보다 공간의 여유가 더 있지요. 그리고 금당 앞 공간을 대각선으로 연결했을 때, 중앙에 석탑을 둬 넓은 공간에서도 석탑에 사람의 시선이 머물도록 했습니다.
석탑의 시조,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금당 앞 공간의 중앙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얼마나 더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어요. 미륵사지석탑이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정림사지5층 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석탑다운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줘 아름답기로 유명해요.
기★ 무덤, 비석, 탑 따위를 세는 단위를 말한다.
이 탑은 기단을 낮게 사용하고 1층 탑신부는 높게 했지만, 2층부터는 탑신부의 높이와 너비를 줄여서 사람의 시선이 1층에 머물게 했어요. 그리고 1층 탑신부의 각 모서리마다 안쏠림과 민흘림이 가미된 기둥을 세웠어요. 민흘림기둥은 사각뿔대 모양으로, 옆면은 사다리꼴이죠. 이런 옆면은 윗부분은 좁고 아랫부분이 넓어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기둥을 수직으로 올렸을 때 아래에 비해 윗부분이 크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얇고 넓은 지붕돌은 약간의 경사를 둬 빗물이 떨어지는 면(낙수면)을 만듭니다. 지붕의 1/10 지점에서는 끝을 살짝 올려서 경쾌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을 연출했답니다. 기단부터 5층 지붕돌까지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지만, 상륜부는 많이 훼손돼 노반석의 일부만 남아 있어요.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석탑의 비밀
이 석탑이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유는 이 탑의 전체 높이와 각 층의 높이, 그리고 각 층의 너비 때문이랍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짓기 위해 사용된 자는 고구려의 단위로, 1척의 길이가 약 35cm인 ‘고려척’이에요. 석탑은 지대석의 너비를 이용해 탑을 만드는데, 이 탑의 지대석의 너비는 고려척으로 14척이었어요. 지대석 너비의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기본 척도였다는데, 바로 1층의 높이가 7척입니다.
2층은 1층보단 탑신부 높이를 줄여 2층과 5층의 높이의 합도 7척, 3층과 4층의 높이의 합도 7척, 지금은 많이 훼손된 상륜부 역시 7척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 층 탑신부의 너비를 보면, 1층이 7척, 2층과 5층의 너비의 합이 역시 7척, 3층과 4층의 너비의 합이 7척임을 알 수 있어요. 따라서 1층부터 5층까지의 높이의 합과 각 층의 탑신부의 너비의 합이 21척으로 같네요.
그런데 1층과 2층의 지붕돌 너비를 살펴보면 각각 대략 12척과 10척이네요. 그럼 3층의 지붕돌의 너비는 8척일까요? 아니랍니다. 약 8.4척이고, 4층과 5층의 지붕돌 너비는 각각 대략 7.2척, 6척이랍니다. 1층과 2층 지붕돌 너비의 차보다 3, 4, 5층의 지붕돌의 너비의 차가 작아졌지요. 3, 4, 5층의 지붕돌은 높은 곳에 있어서 실제 크기보다 더 작게 보이고, 각 층 탑신부의 너비가 급격히 작아지면 석탑이 위태로워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지붕돌의 크기를 다소 크게 해 안정감을 준 것이라 추측할 수 있어요. 이 석탑을 보고 있으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왜 백제의 미를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정림사의 옛 모습을 상상하며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존 전시 중인 정림사지 박물관에 들러보세요. 주춧돌과 기단으로 추측해 만든 정림사의 축소 모형도 볼 수 있답니다.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백제문화탐방’, 여러분도 바로 떠나보세요~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 부여, 익산 세 도시에 걸쳐 있는 8개의 유적지를 말합니다.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 마지막으로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가 여기에 속하지요. 오늘은 웅진시대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인 무령왕릉으로 시작해서 공산성, 사비시대의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5층 석탑까지 둘러보겠습니다.
1500년 전 무령왕 무덤에 들어서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510/M201510N013_img_01.jpg)
송산리 고분군의 1~5호분은 굴 모양의 돌로 만든 무덤이지만, 6호분과 7호분인 무령왕릉은 벽돌식 무덤으로 그 당시 중국 남조와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다른 무덤의 유물은 도굴당했지만, 무령왕릉은 1971년 6호분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돼 1500년 전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났어요.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무덤 중에 유일하게 그 주인을 밝히는 지석이 함께 발견돼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지요.
이제 무령왕릉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아치형 입구를 통과해 터널을 지나면 이것과 같은 모양의 큰 터널이 하나 더! 바로 이 아치형 큰 터널이 왕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던 묘실이랍니다. 묘실에 들어서니 내벽의 벽돌 무늬가 특별하네요. 안쪽 벽은 28가지 무늬를 지닌 벽돌을 4평 1수(4개는 가로로 쌓고, 1개는 세워서)로 쌓아 만들었어요. 만약 벽돌을 가로나 세로로만 쌓았다면 안정감은 있어 보일지 모르지만, 지진으로 인한 횡력★이나 위로 쌓인 흙 무게 때문에 무너지기 쉬웠을 거예요. 따라서 4평 1수 방법으로 벽을 견고하게 해 안정감을 주고 벽돌의 무늬를 맞춰 무덤을 고귀하게 만들었어요.
횡력★ 건물에 수평으로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한편,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4678개의 유물은 이곳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백제의 화려하고 세련된 공예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 중 12종은 국보로 지정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보관·전시 중입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는 왕비의 신체 일부도 전시돼 있다고 하니, 시간을 내어 꼭 둘러보세요.
특별한 모양의 연못을 품은 공산성
국립공주박물관을 나와 차로 5분쯤 이동하면 공산성에 도착할 수 있어요. 공산성은 조선시대 때 부르던 이름이고,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이라고 불렀어요. 공산성의 금서루에 올라 오른쪽 성벽을 따라 걸으면 석성과 토성을 모두 살펴볼 수 있고, 진남루, 동문루, 만하루, 공북루 등을 마주하며 백제시대의 건축과 조선시대 문루건축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답니다. 그중 만하루 옆에 있는 연못은 특별한 모양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마치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습이거든요. 연못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간이 좁은데, 이러한 구조는 연못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연못은 빗물을 모은 뒤 종종 급할 때 사용하는 물 저장소였기 때문에 조상들은 이것까지 생각해서 연못을 설계한 것으로 보여요. 가능한 빗물을 많이 저장하고, 또 비가 많이 내릴 경우에는 연못이 넘치지 않도록 금강 쪽으로 배수구를 만들어 놓았거든요.
연못 안쪽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만들어 놓은 걸 보니,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의 양이 적은 때에는 사람이 직접 물을 길러 오르내렸나 봅니다. 아차! 왕궁지 터에 원뿔대를 거꾸로 세운 것과 모양이 비슷한 연못이 또 있답니다. 이 연못은 동성왕 때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를 길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경용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공산성을 둘러보면서 서로 다른 모양의 두 연못을 찾아 보세요!
백제의 숨결을 따라 사비도성으로~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510/M201510N013_img_02.jpg)
석탑의 시조,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금당 앞 공간의 중앙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얼마나 더 계획적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이 석탑은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시조라 할 수 있어요. 미륵사지석탑이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정림사지5층 석탑은 목탑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석탑다운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줘 아름답기로 유명해요.
기★ 무덤, 비석, 탑 따위를 세는 단위를 말한다.
이 탑은 기단을 낮게 사용하고 1층 탑신부는 높게 했지만, 2층부터는 탑신부의 높이와 너비를 줄여서 사람의 시선이 1층에 머물게 했어요. 그리고 1층 탑신부의 각 모서리마다 안쏠림과 민흘림이 가미된 기둥을 세웠어요. 민흘림기둥은 사각뿔대 모양으로, 옆면은 사다리꼴이죠. 이런 옆면은 윗부분은 좁고 아랫부분이 넓어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기둥을 수직으로 올렸을 때 아래에 비해 윗부분이 크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교정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얇고 넓은 지붕돌은 약간의 경사를 둬 빗물이 떨어지는 면(낙수면)을 만듭니다. 지붕의 1/10 지점에서는 끝을 살짝 올려서 경쾌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을 연출했답니다. 기단부터 5층 지붕돌까지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지만, 상륜부는 많이 훼손돼 노반석의 일부만 남아 있어요.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석탑의 비밀
이 석탑이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유는 이 탑의 전체 높이와 각 층의 높이, 그리고 각 층의 너비 때문이랍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짓기 위해 사용된 자는 고구려의 단위로, 1척의 길이가 약 35cm인 ‘고려척’이에요. 석탑은 지대석의 너비를 이용해 탑을 만드는데, 이 탑의 지대석의 너비는 고려척으로 14척이었어요. 지대석 너비의 절반인 7척이 이 탑의 기본 척도였다는데, 바로 1층의 높이가 7척입니다.
2층은 1층보단 탑신부 높이를 줄여 2층과 5층의 높이의 합도 7척, 3층과 4층의 높이의 합도 7척, 지금은 많이 훼손된 상륜부 역시 7척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각 층 탑신부의 너비를 보면, 1층이 7척, 2층과 5층의 너비의 합이 역시 7척, 3층과 4층의 너비의 합이 7척임을 알 수 있어요. 따라서 1층부터 5층까지의 높이의 합과 각 층의 탑신부의 너비의 합이 21척으로 같네요.
그런데 1층과 2층의 지붕돌 너비를 살펴보면 각각 대략 12척과 10척이네요. 그럼 3층의 지붕돌의 너비는 8척일까요? 아니랍니다. 약 8.4척이고, 4층과 5층의 지붕돌 너비는 각각 대략 7.2척, 6척이랍니다. 1층과 2층 지붕돌 너비의 차보다 3, 4, 5층의 지붕돌의 너비의 차가 작아졌지요. 3, 4, 5층의 지붕돌은 높은 곳에 있어서 실제 크기보다 더 작게 보이고, 각 층 탑신부의 너비가 급격히 작아지면 석탑이 위태로워 보일 수 있어요. 그래서 지붕돌의 크기를 다소 크게 해 안정감을 준 것이라 추측할 수 있어요. 이 석탑을 보고 있으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왜 백제의 미를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정림사의 옛 모습을 상상하며 정림사지에서 발견된 유물을 보존 전시 중인 정림사지 박물관에 들러보세요. 주춧돌과 기단으로 추측해 만든 정림사의 축소 모형도 볼 수 있답니다.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백제문화탐방’, 여러분도 바로 떠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