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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남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 있다. 무기를 들고 싸운 용맹한 전사가 아니다. 바로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이다. 그는 24시간마다 바뀌는 난공불락의 독일군 암호를 풀어 전쟁의 역사를 바꿔 놓았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을 보면 튜링 기계, 튜링 테스트, 자동연산장치(일명 에이스) 고안 등 컴퓨터와 관련된 것이 많다. 실제로 그를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튜링은 뼛속까지 수학자였다. 암호 해독이나 컴퓨터에 가려진 수학자 튜링의 진면목을 알아 보자.







“수업이 끝나면 뭐해? 아이스크림 먹고 갈래?”

우리가 보기에는 글자지만, 스마트폰은 0과 1의 조합으로 인식한다. 컴퓨터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왜 그런지 설명하라고 하면 매우 난감하다. 컴퓨터는 왜 이진법 언어만 알아듣는 걸까?

이는 컴퓨터의 원조인 ‘튜링 기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튜링 기계란 테이프에 적힌 여러 가지 기호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다른 기호로 바꾸는 장치다. 이론적으로는 적당한 알고리즘만 있으면 어떤 계산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만들어진 적 없는 가상의 기계지만, 컴퓨터가 모든 정보를 0과 1로 구성된 이진법 언어로 바꿔 인식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최초의 사례다.

튜링 기계의 탄생은 수학 난제 덕분!

튜링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그는 1931년 미국의 수학자 쿠르트 괴델이 발표한 ‘불완전성 정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불완전성 정리란 수학에는 ‘참이지만 증명 불가능한 문제’가 있고, 이런 체계 안에서는 모든 문제를 공리와 정리만으로 일관성 있게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괴델은 이런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괴델 수 대응’이라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어떤 문자나 단어, 문장도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진수인 자연수는 이진수로 표현이 가능하고, 그 역도 언제나 성립한다. 따라서 어떤 말도 0과 1의 조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튜링은 이런 원리를 튜링 기계에 적용했다. 훗날 이것이 컴퓨터 제작에 반영돼 오늘날 컴퓨터가 0과 1의 조합을 사용하는 것이다.



튜링 기계로, 힐베르트의 결정 문제 해결!

튜링은 다른 수학자와 다르게 매우 실용적이었다. 계산이 복잡한 수학 문제나 따져야 할 경우의 수가 많은 문제를 풀기 위해 사람보다 계산이 빠른 컴퓨터를 직접 만들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고안한 튜링 기계의 원리를 이용해 ‘힐베르트의 결정 문제’가 해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 문제는 어떤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결정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항상 존재하는지 묻는 것이다.

튜링은 튜링 기계에서 더 나아가 서로 다른 계산을 처리하는 다양한 튜링 기계를 작동시킬 수 있는 장치인 ‘보편 튜링 기계’라는 개념을 생각해 냈다. 각각의 튜링 기계를 소프트웨어, 이를 실행하는 컴퓨터가 보편 튜링 기계라고 생각하면 쉽다.

튜링은 수학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컴퓨터를 도구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던 열망이 우리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 컴퓨터의 발명으로 이어진 셈이다.



독일의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는 1900년 프랑스 파리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서 20세기에 수학자가 풀어야 할 수학 난제 23개를 소개했다. 그 중에서 2번 문제는 산술 공리에는 모순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었다. 힐베르트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계산인 산술뿐만 아니라 기하학과 대수학 등 어려운 연구를 다루는 수학도 논리적으로 완벽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931년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면서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2, 3, 5, 7, 11, 13, 17, 19, …로 이어지는 소수는 초등학생도 아는 쉬운 개념이다. 그러나 소수의 비밀을 찾는 연구는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수학자의 골머리를 가장 많이 썩혔다. 그 중에서도 ‘리만 가설’은 소수 연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참이라면 소수에도 규칙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튜링은 1937년 처음 리만 가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틈틈이 연구했다. 리만 가설은 소수로 이뤄진 제타함수의 값이 0이 되는 점(0점)은 무수히 많고, 모두 일직선 상에 나타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이 참이라면 소수를 이용하는 오늘날의 인터넷 암호 체계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튜링은 대부분의 수학자와 달리 리만 가설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제타함수의 0점이 일직선에 나타나지 않는 사례를 찾아 나섰다.

리만 가설 풀어 줄 기계 제작

튜링은 제타함수를 계산하는 기계를 떠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바닷물이 일정한 시각에 몰려 들어오고 빠져 나가는 조수의 운동을 예측하는 데 필요한 계산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원리를 이용해 계산 기계를 직접 만들었다. 줄과 도르래를 이용해 조수의 운동에 해당하는 사인함수를 만들고 그 값을 더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도르래에 감긴 줄의 길이가 최종 답이었다.

그러나 이 기계는 정확한 값을 계산하지 못했다. 기계공학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이마저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1953년 맨체스터대에서 개발한 컴퓨터인 베이비로 계산 프로그램을 만들어 제타함수에서 0점이 1540번째까지 일직선 상에 나타난다는 것을 밝혔다.

결국 튜링은 리만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 밝히진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나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수학자로서 삶을 산 약 20년 간 리만 가설의 증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튜링은 1950년대 초반 기계 연구에서 손을 떼고 생물학 연구에 몰두했다. 호랑이나 물고기 같은 동물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패턴이 어떻게 생기는지 수학적으로 밝히려고 한 것이다.

튜링은 1952년 수리생물학에서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바로 ‘형태 생성의 화학적 기초’다. 제목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상상이 안 가지만, 논문의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유전자 안에는 형태소가 있는데, 이들이 서로 확산하고 반응한 결과 동물 피부에 다양한 무늬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피부 색소에 해당하는 형태소가 하나라면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는 확산만 일어나기 때문에 프랑스 국기(A)처럼 단순한 패턴만 만들어진다. 형태소가 두 개지만 화학 반응이 없다면 확산만 일어나기 때문에 복잡한 무늬(B)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즉 열대어의 아름다운 패턴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형태소가 두 개이면서 화학반응이 일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두 형태소가 확산하는 법칙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작용을 촉진하거나 억제한다. 따라서 형태소의 분포가 물결 모양으로 나타나면서 다양한 무늬(C)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내용을 미분방정식을 이용해 설명했다.

튜링의 이 연구는 발표 당시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튜링이 고안한 미분방정식을 시뮬레이션하면 실제 동물의 무늬 패턴과 같다는 연구가 1970년대에 발표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조개껍데기의 무늬나 열대어의 피부 무늬 등을 튜링의 방정식으로 재현했다.





매분 3명이 죽는 사상 최악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해독불가 암호를 풀어 1400만 명의 목숨을 구한 수학자, 앨런 튜링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영화는 튜링을 얼마나 가깝게 묘사했을까? 영화와 실제 앨런 튜링의 삶을 전격 분석했다.

튜링은 퍼즐마니아라 전쟁에 참여했다?!

“전 십자 낱말 퍼즐을 정말 잘하거든요. 독일군의 암호도 퍼즐입니다. 에니그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퍼즐이죠. 전 이런 퍼즐 풀기를 좋아하거든요.”

영화에서 튜링은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사람을 뽑는 면접장에서 이 같이 말한다. 자신은 영국 정부를 위해 일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정치에도 관심이 없다고 한다. 튜링은 단순히 퍼즐마니아라 전쟁에 참여했을까?
튜링은 애국자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를 매우 싫어했다. 또한 그는 연간 1500달러를 받으며 당대 최고의 수학자 존 폰 노이만의 조교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물리치고, 영국 정보암호학교에서 일할 만큼 암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결국 튜링은 암호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군을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영국 정부를 위해 봉사한 것이다.

독일군은 사랑에 빠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왜 당신은 독일군 짝꿍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죠?”
“모든 메시지가 ‘CILLY(실리)’라는 동일한 다섯 글자로 시작되거든요.”

제2차 세계대전은 상대국의 군사 기밀을 먼저 알아내는 쪽이 승기를 잡는 정보 전쟁이었다. 그런데 독일군의 ‘에니그마’로 만든 암호는 경우의 수가 무려 158,962,555,217,826,360,000개에 달해 사람이 푸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튜링은 기계로 만든 암호는 기계로 풀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봄브’라는 암호 해독 기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번번이 독일군의 암호를 푸는 데 실패했다. 영화에서는 사랑에 빠진 독일 에니그마 교환수가 여자 친구의 이름인 ‘CILLY’(실리)를 모든 메시지 앞에 붙인다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암호를 해독했다.
실제 실리는 독일군의 암호 중 규칙이 있는 암호에 붙은 별명이다. 유난히 ‘CIL’이라는 메시지가 많아 붙인 별명으로 추정된다. 에니그마 교환수들은 무작위로 선택한 세 글자를 각 메시지마다 시작 부분에 넣도록 지시 받았다. 그런데 전투가 한창 바쁘게 진행되다 보면 자판에 연달아 붙은 알파벳 ‘QWE’나 ‘BNM’ 같은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빈번했다. 여자 이름의 머리글자인 경우도 많았다. 영국의 암호 전문가들은 이런 실리 메시지를 암호 해독하는 데 적용했는데 간혹 맞는 경우가 있었다. 실리를 튜링이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독이 묻은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독주에 사과를 담그면 잠결 같은 죽음이 온몸에 퍼지겠지.”

1954년 6월 5일 아침, 튜링이 죽어있는 것을 그의 가정부가 발견했다. 그 옆에는 몇 입 베어 먹고 남은 사과가 나뒹굴고 있었다. 사과가 청산가리에 담겼던 흔적이 있어, 자살로 판명됐다.
그런데 튜링의 어머니와 그의 주변사람들은 튜링이 절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죽기 불과 며칠 전까지 매우 활기찼으며, 자신의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가 자실인지, 타살인지 지금에 와서는 밝힐 방법이 없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주문대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튜링은 1938년 영국에서 개봉한 디즈니 만화 영화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열렬하게 좋아했다. 특히 그는 왕비가 사과를 독에 담그는 장면을 좋아해 왕비의 주문을 시도 때도 없이 읊었다. 그 주문이 현실이 되어 그는 독이 묻은 사과를 먹고 세상을 떠났다.

앨런 튜링. 그는 손톱에 시꺼멓게 때가 낄 때까지 잘 씻지도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서툴렀지만, 수학 연구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기계를 고안하는 창의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약 20년간 연구했던 리만 가설과 1940년대 꿈꾸었던 인공지능 연구가 좀 더 진전되지 않았을까. 아마 그랬다면 우리는 또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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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수학동아 정보

  • 조가현(gahyun@donga.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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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많이 알았던 사람>, <튜링 & 괴델, 추상적 사유의 위대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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