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학자를 비롯한 수학의 역사 대부분은 서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엄연히 동양에서도 수학은 있었고, 우리나라 역시 수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14 서울세계수학자대회를 맞이해 우리나라 수학의 발전과정을 짚어 보았다

조선의 산학, 한국 수학사의 물꼬를 트다!


우리나라에 수학이 도입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역사는 깊다. 찬란했던 통일신라시대의 첨성대와 석굴암과 같은 문화유산과,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산학을 다뤘던 국학과 같은 교육기관은 조선 이전에도 수학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수학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사료가 충분하지 않다. 이에 반해 조선시대부터는 실록이나 산학서와 같은 분명한 역사적 근거가 뒷받침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 현재의 우리 앞에는 조선의 수학이 생생하게 살아 찬란했던 우리의 정신문화를 증언해 주고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 수학(당시로는 산학)이 중요하게 인식된 이유로는 고려가 멸망한 이유 중 하나인 문란한 농지측량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조선 초부터 임금들은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특히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은 나라의 정책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과학과 수학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에 등급별로 농지를 측량하게 했으며, 공정하게 세금을 거두기 위해 도량형도 정비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부제학 정인지에게 수학을 배우는 등 수학을 장려했다. 그리고 농지, 조세, 공납 등을 담당하는 호조에 산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30명 이상 배치했다. 세종 25년 11월 17일에 기록된 실록 내용을 보면 세종이 얼마나 수학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다.

“산학은 비록 한낱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국가의 행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중략)… 최근 농지를 등급별로 측량하는 데 있어서 이순지, 김담 등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 셈을 능히 할 수 있었을까. 널리 산학을 익히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

이같이 세종이 수학을 중시하자 여러 나라의 정책들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수학의 실용성이 빛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제로 생활에 쓰일 수 있는 ‘실학’이 대두되면서 산학이 더욱 중시되기에 이른다. 또, 중국을 통해 서양과학이 들어오면서 수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수학자

홍정하(1684~?)
조선 최고의 산서 ‘구일집’을 펴내다!


조선 숙종 때의 수학자이다. 조선시대의 산서 중 수학을 공부하기 위한 교재로는 으뜸인 ‘구일집’이란 산서를 썼다. 이 책에는 신비로운 수의 규칙을 정리한 파스칼의 삼각형, 10차 방정식의 풀이, 나무로 만든 산가지를 이용해 쉽게 계산을 할 수 있는 산목셈 등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라 홍정하가 중국의 사신 하국주와 수학 문제 풀이를 대결해 하국주를 당황하게 한 일화도 실려 있다.

최석정(1646~1715)
오일러보다 60년 앞선 라틴 마방진!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수학자이다. 저서인 수학책 ‘구수략’은 총 4편으로 이뤄져 있는데, 측량법, 수열과 급수, 연립일차방정식, 마방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 ‘9차 직교라틴방진’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직교라틴방진은 오일러가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미 최석정의 구수략에 소개되어 있어 오일러보다 약 60년이 앞선다. 이 때문에 최석정은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선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상혁(1810~ ? )과 남병길(1820~1869)
신분을 뛰어넘는 학문의 세계!


이상혁과 남병길은 조선 후기, 19세기 초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았다. 남병길은 양반 출신으로 수학과 천문학에 능통해 당시 천문학에 관해서는 일인자로 손꼽혔다. 중인 출신의 이상혁은 남병길보다 10세 많고 서로 신분도 나이도 달랐다. 하지만, 동시대를 산 두 수학자는 서신을 서로 주고받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며 수학을 함께 연구했다. 특히 이상혁은 현대의 급수론인 ‘퇴타술’ 등 자신이 개척한 수학이론으로 같은 시대 서양의 수학 수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경지에 올랐다.

한국 수학사, 100년의 기적!

조선시대에 이어 지난 100년은 한국 수학사에 있어서 놀라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19세기 말 ‘대한제국’이 세워지며 격변의 시기를 보내게 된 우리나라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당시 수학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는 독립운동가 이상설을 꼽을 수 있다. 당대 모든 분야의 학문에 뛰어난 최고의 학자이기도 했던 이상설은 1895년 성균관장으로 부임해 한국 최초로 성균관 경학과 교과과정에 수학과 과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서양 수학책을 한글로 번역해 1900년 <;산술신서>;란 수학책을 펴내기도 했다. 나라의 독립만큼 근대 수학교육 보급에도 누구보다 앞장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서양 수학의 본격적인 도입도 잠시, 우리나라는 1910년 뼈아픈 일제 강점기로 들어간다. 그리고 광복을 맞이한 후에야 비로소 수학이 정상적인 발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는 ‘조선 수물학회’가 창립되었고, 1949년에는 우리나라의 수학자가 최초로 미국수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 주인공은 수학자 ‘이임학’이다.

당시 청년 수학자였던 이임학은 1940년대 남대문 근처에서 미군이 버린 고서 더미에서 <;미국수학회보>;를 발견했다. 그 저널에 소개된 유명한 수학자 ‘막스 조른’이 제시한 문제를 풀어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를 본 조른은 ‘이임학’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수학회보에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인 수학자를 세계 수학계에 최초로 알린 것이다. 이후 이임학은 자신의 이름을 딴 ‘리(Ree) 군’이라는 대수학 개념을 발견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리(Ree) 군’은 지금까지도 수학자들이 연구하는 중요한 분야다.

한편 광복 후, 우리나라에는 여러 훌륭한 수학자들이 등장한다. 국내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윤식’, 서울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거리의 수학자 ‘최규동’, 최초의 한국 수학사 전문가인 ‘장기원’, 또 최초의 여성 수학박사인 ‘홍임식’ 등은 한국 수학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수학자들의 헌신과 열정 덕분일까? 1981년 한국은 전세계의 수학자들이 설립한 국제수학연맹(IMU)에 가입하게 된다. 국제수학연맹은 수학 논문의 수를 근거로 회원국의 수학적 역량을 5개의 등급으로 나누는데, 첫 해 한국의 등급은 가장 낮은 1군이었다. 그러나 가입한 지 10년도 안 된 1993년에는 2군으로 한 단계 성장하더니, 2007년에는 한 번에 무려 두 단계가 성장해 두 번째로 높은 4군이 되었다. 이와 같이 한 번에 두 등급이 상승한 나라로는 국제수학연맹(IMU)이 설립된 이래 한국이 유일하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업적으로 인정받는 수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다가오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기조 강연을 맡은 고등과학원 수학부의 황준묵 교수나 정수론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이자 옥스퍼드대 수학과 석좌교수인 김민형 교수, 한국인 여성 최초로 미국 예일대 수학과 종신교수로 임용된 오희 교수 등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수학자는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세계수학자대회(ICM)는 수학자들의 활발하고 역동적인 학문의 교류가 이뤄지는 장이자, 개최국에게 있어서는 국가의 수학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실제로 2002년에 세계수학자대회를 개최한 중국은 이후, 수학 수준이 더욱 성장해서 미국을 이어 세계 최고의 수학 강국이 되었다. 2014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14년 08월 수학동아 정보

  • 장경아(kate103@donga.com) 기자
  • 이창우
  • 글 및 사진

    이장주
  • 기타

    우리 역사 속 수학이야기(이장주 지음), 한국 근대수학의 개척자들(이상구 지음)

🎓️ 진로 추천

  • 수학
  • 역사·고고학
  • 교육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