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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수학자] 에미 뇌터

박형주교수의수학자이야기


당대의 학자들은 그녀를 가리켜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여성수학자였을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여성과학자로, 퀴리 부인과 동격이라고 말한다. 현대 대수학의 건설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대칭 개념으로 물리학적 불변량의 존재를 설명해 물리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녀는 바로 에미 뇌터다.
 

늦게 출발해 꽃피운 재능

뇌터의 수학적 재능은 일찍 발현되지 못했다. 실제로 그녀가 이룬 최고의 업적들은 모두 40세 이후에 이룬 것이며, 그녀의 학문적 절정기는 50세 때였다. 수학 분야에서 대부분의 주요 성취가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 이뤄지곤 하는 사례에 비추어볼 때 분명 이례적이다. 수학 교사를 하다가 40세 이후에 위대한 수학자 반열에 오른 바이어르스트라스와 같은 사례가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뇌터의 재능이 늦게 발현된 것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교육과 연구에서 배제됐던 당시 독일 사회체제의 영향이 크다. 1860년대에서 1880년대를 거치면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순으로 여성의 대학입학이 가능해졌지만, 독일 대학들은 1900년까지도 여성의 대학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뇌터도 아버지인 막스 뇌터가 에어랑겐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덕분에 수학을 일찍 접할 수 있었지만, 대학입학이 불가능해 에어랑겐 대학과 괴팅겐 대학의 청강생 신분에 만족해야 했다.

여성의 대학입학이 허용되자, 뇌터는 1904년에 에어랑겐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폴 고든의 지도하에 불변이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7년간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한 연구가 힐베르트와 클라인의 주목을 받아, 1915년 그들의 초청으로 괴팅겐 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여성에게 정식 교수 임용을 하지 않았기에 뇌터는 무급으로 연구와 강의를 했고, 이 때문에 그녀는 절약하는 생활이 평생 몸에 배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정식 임용을 주장하던 힐베르트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성별 차이로 강사임용을 결정하다니, 이곳은 대학이지 목욕탕이 아니지 않소?”

이러한 독일 대학에서의 성차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줄어들었다. 1919년부터 연구 환경이 개선되자, 그녀의 연구 업적도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다. 그 결과 1928년 볼로냐 세계수학자대회(ICM)에서는 초청강연자로, 1932년 취리히 세계수학자대회에서는 기조강연자로 초청될 정도로 학자로서의 성취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써 세계 수학계에서 그녀의 위상도 공고하게 되었다.


현대 대수학의 토대를 다지다

뇌터의 초기 연구는 불변이론의 알고리즘에 관한 것이었다. 학위취득이 늦었고, 수학적 교류가 제한되었던 그녀는 당시 수학의 주요 흐름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에어랑겐 대학에서 무급으로 강의를 하던 시절에 신임교수로 부임한 피셔를 통해 불변이론에 대한 힐베르트의 추상적 접근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크게 감동받아 관련 연구를 시작하게 된 그녀는, 후에 추상적이고 공리적인 20세기 대수학의 건설에 주요한 기여를 한다.

이런 사례를 보면 젊은 수학자에게 연구의 조류와 새로운 사고의 틀을 이해하기 위한 여행이나 다른 연구자와의 교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실험학문 분야의 실험실만큼이나 수학자에겐 학회참석 등의 연구교류가 중요하고, 지금도 수학자라는 직업은 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직업에 속한다.

서른세 살의 나이에 괴팅겐으로 옮긴 직후, 그녀는 특이하게도 물리학 분야의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아인슈타인과 힐베르트 등이 몰두했던 일반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물리량 보존 문제를 대칭성의 관점으로 해결한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도 20세기 물리학의 주요 업적으로 거론되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전이나 이후에도 물리학에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마도 당시 그녀의 초청자였던 힐베르트가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분야와 문제에 개방적인 그녀의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뇌터는 서른아홉에 발표한 논문에서부터 스스로의 독창성을 과감하게 표현하며, 현대수학의 흐름에 중요한 기여를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환★의 아이디얼 이론’을 정립하고, 유한 생성되는 환의 개념을 체계화했다. 이는 후에 ‘뇌터환(Noetherian ring)’이라 불리며 20세기 수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요 개념이 된다. 자신의 이름을 딴 개념이 교과서에 실리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 수학의 한 분야인 대수학에서 쓰이는 개념으로, 두 개의 연산에 대하여 닫혀 있는 집합을 뜻한다.


위대한 멘토

에미 뇌터를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바는 그녀가 따뜻한 품성을 가진 위대한 멘토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를 내세우지 않았고, 젊은이들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첫 번째 박사학위 학생이었던 그레테 헤르만은 지도교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며, 그녀를 가리켜 ‘학위지도의 어머니’라고 칭했다. 괴팅겐 시절의 동료였던 헤르만 바일은 그녀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가리켜 ‘막 구운 빵처럼 따뜻했다’고 말했다.

학문적 성취가 절정에 달하던 50세를 전후 해서 세계 수학계에서 그녀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아인슈타인이나 바일과 같은 유태인 학자들과 함께 그녀도 직장을 잃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안전과 연구를 위해 소련과 영국 및 미국의 수학자들이 동분서주했는데,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은 미국의 브린모어 대학이 그녀를 초청하는 데에 성공했다. 전임교수 4명과 대학원생 5명에 불과한 학부교육 중심이었던 브린모어 대학으로서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녀는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브린모어에 있으면서 프린스턴 대학에서도 강의를 했는데, 뇌터의 업적을 이해하는 동료와 학생들에 둘러싸여 즐겁게 지냈다고 한다. 미국에 도착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자궁암으로 5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뤘을 것으로 여겨진다.

뇌터는 브린모어에서 대학원생 4명을 지도했는데, 학생들과 캠퍼스를 산책하며 토론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녀가 학생에게 미친 영향과 멘토링 방식은 전설적이어서, 그녀의 이름을 딴 ‘여학생 지원 프로그램’이 여럿 만들어졌다. 독일연구재단은 에미 뇌터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여성 박사후연구원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여성수학자회에서는 매년 뛰어난 여성수학자를 선정하여 에미 뇌터 강연을 개최한다.

4년마다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도 독보적인 여성수학자가 강연하는 ‘ICM 에미 뇌터 강연’이 있다. 내년 2014년에는 서울에서 이 강연이 열릴 예정이다.


에미 뇌터는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조적인 수학 천재다.
 
_알버트 아인슈타인
 

2013년 05월 수학동아 정보

  • 박형주 교수, 2014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
  • 사진

    위키미디어
  • 사진

    포토파크닷컴
  • 진행

    장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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